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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두 갈래 외진 길에서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비익련리(比翼連里) (Lovers)

장전 2016. 8. 22. 10:13










어느덧 아내와도 헤어지는 연습을

- 홍신선




성긴 빗발 뿌리다 마는
어느 두 갈래 외진 길에서
정체 모를 흉한(凶漢)처럼 불쑥 나타날
죽음에게


그대와 내가 겸허하게 수락해야 하는 것


그 이름은
사랑인가







몹쓸 상상이지만 가끔 당신 없이 사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습니다

상상만이었으므로 실정법을 위반한 것은 아닙니다만 혼자 즐겁게 킥킥 웃기도 하였으므로

마음속은 언제나 캥깁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니 애초에 다시 태어나는 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므로 몹쓸 상상이지만 당신 없이 사는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 나이므로 무죄입니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나는 당신 없이 사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깨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밥 먹고 출근하라고 붙잡는 사람도 없습니다

몇 시에 돌아오냐고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에고치 허물 벗듯 이불은 저녁까지 허공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없으므로 읽지도 않을 책을 산다고, 몸에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옷을 샀다고 구박할 사람도 없습니다

짝짝이 양말을 신고 나가도 붙잡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퇴근 후 손씻지 않아도, 자기 전에 이를 닦지 않아도, 저녁을 늦게 먹어도,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늦은 밤이 되면 나는 내가 벗어둔 허물 속으로 들어가 이불의 벌어진 입을 꼭꼭 여미고 누울 겁니다


혼자서는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것처럼 깊은 잠을 잘 겁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아침을,

몹쓸 상상이지만 가끔 당신 없이 사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그대여 부디



- 어느 시인의 시작 노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