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 위안 3번 Db 장조

장전 2016. 7. 8. 21:32



리스트 : 위안 3번 Db 장조

Consolation No.3 in D-flat  major

     

   

Seymour Bernstein Piano : Liszt, Consolation in D-flat Major

 

리스트 : 위안 3번 Db 장조

Consolation No.3 in D-flat  major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11 ~ 1886) 헝가리

 

1836년 다구 백작부인을 만나고, 그녀와 이어지지 못하는 사랑 때문에 오랜 마음앓이를 했던 리스트는 결국 모든 걸 내던지고 검은 사제복을 입는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딸 코지마가 피아노 주자이며 지휘자인 그녀의 남편 폰 뷜로의 곁을 떠나 하필 리스트의 제자였던 바그너에게로 달려가버린 떠들썩한 불륜사건도 한몫했다고도 한다. <위안>은 1849~1850년에 작곡된 여섯 개의 모음곳으로 바이마르 초기의 작품이다.​ 작곡가 자신의 가장 섬세하고 소박하며 시적 심미안이 가득한 면보를 보여주는 작품인데, '위안'이라는 제목은 생트 뵈브의 시집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리스트 작품의 특징인 화려하게 도도한 테크닉의 과시들이 사라지고, 마음을 착 가라앉혀주는 내면의 소리 같은 선율이다. 슈만이나 쇼팽, 브람스를 한데 섞어놓은 느낌이랄까? 녹턴도 연상되는 잔잔하면서도 우아한 음악이 들을 때마다 아름답다. - 최영옥과 함께하는 클래식 산책 발췌 p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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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와 다구 백작부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 (Seymour Bernstein)

[6·25 참전 유명 피아니스트 內韓]
"음악은 증오 다스려주니까… 1951년 4월 24일 인천항 첫발
스물세 번째 생일이라 기억해… 목숨 걸었던 한국, 두 번째 고향"


"북한에서 연주해달라는 초청을 받는다면? 기꺼이 가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싶어요. 음악은 총을 쏴서 남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니까요. 농구에만 관심을 보이는 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다는 걸 보여주고 싶군요."

지난 4월 개봉돼 감동을 안긴 다큐멘터리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주인공인 세이모어 번스타인(89)이 한국에 왔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보훈처가 마련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4일 서울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번스타인은 "음악을 통해서라면 나를 비롯한 모든 이의 진심이 김정은 위원장에게도 전해질 거라 믿는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세이모어 번스타인(오른쪽) 등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이 24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6·25전쟁 제66주년 국군 및 UN군 참전 유공자 위로연’에서 건배하고 있다. 전쟁 당시 최전방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번스타인은“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던 한국이 내 두 번째 고향”이라고 했다. /연합뉴스


1950년 12월 미 8군 육군 보병으로 입대한 번스타인은 전쟁이 한창이던 한국으로 파병됐다. "1951년 4월 24일 새벽 5시 30분 인천항으로 들어왔어요. '전쟁에 들어가는구나. 평생 다시는 이런 공포를 맛보지 못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그랬어요." 부대로 가던 기차 안에서 처참히 무너진 건물, 희망 잃은 한국인들을 보면서 '나의 주된 임무는 한국과 한국인을 지키는 것'임을 깨달았다는 그는 "내가 그날을 왜 정확하게 기억하는지 아나요?"라고 물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 스물세 번째 생일이었거든요."

전쟁터에서 피아노를 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포연이 자욱한 최전방에서 그는 이듬해 11월 전역할 때까지 군복을 입고 트럭에 피아노를 싣고 다니며 동료 바이올리니스트 케네스 고든과 100여 차례 음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을 위로했다. 피아노 옆에는 언제라도 전투에 나설 수 있게 소총을 놓아둬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전날까지 함께 웃고 농담하던 전우의 시체를 두 눈으로 봐야 하는 일이었다.


다큐 영화에서도 그 순간을 떠올리며 왈칵 눈물을 쏟았던 번스타인은 "내 삶에서 너무나 가슴 아픈 경험이었다. 한국이 자유를 얻게 도왔다는 것. 그게 우리한텐 아주 큰 위안"이라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이 있었음에도 한국이 두 번째 고향인 이유"라 했다.

1960년 미 국무부 후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땐 4·19혁명이 일어나 콘서트가 모두 취소됐다. "연주회를 열려던 바로 그날 혁명이 터졌어요. 군 트럭을 타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 머리 위로 총탄이 날고 학생들은 시위를 하고 있었지요." 다친 학생들을 위해 서울대병원으로 피아노를 옮겨 연주한 그는 "엄마들이 부상자들 사이에서 자식을 찾으며 '아이고, 아이고' 소리쳤다. 마음이 아파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했다.

이날 오후 번스타인은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참전유공자 위로연에서 최전방에서 군인들을 위해 자주 연주했다는 프란츠 리스트의 '위안'을 들려줬다. 오는 27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는 유엔 참전 용사들을 초청한 감사 만찬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예정이다. "피아노 소리를 듣듯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상대의 감정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조선일보 2016.6.25 기사)


참전용사 출신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 오른쪽 사진은 번스타인(가운데)이 6·25전쟁 중 미 해병 1사단에서 공연하는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좌) 6.25전쟁 당시 대구에서 공연을 위해 피아노 조율사 고용 등 많은 도움을 준 한국인 이은혜 선생님과 함께 기념촬영하는 번스타인. /국가보훈처 제공

(우) 한국전쟁 참전당시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사진=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소네트' 캡처.


Consolation No. 3, Franz Lisz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