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장전 2011. 3. 31.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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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예술가들의 작품 말고도
그들의 삶과 사랑을 궁금해 할까?
그들의 창조물인 작품들에 바로 그들의 삶이,
인생이 녹아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나온 영화가 슈만과 브람스와 클라라의
삼각관계(?)를 다룬 영화 클라라...
그 어느때 보다 창조성이 강조되고 있는 요즈음
(황석영의 표절이 세간에 관심을 끌고 그가 망가지는 때에...)
예술가들의 창조성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슈만은 일단 젖혀두고 브람스와 클라라와의 관계에서
브람스가 창작한 '독일레퀘엠' 창작과정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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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브람스(Brahms, Johannes, 1833.5.7~1897.4.3)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도 열정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랑을 평생 갈구하였으며 사랑을 지켜나간
너무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특히 그의 사랑 중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은
그의 예술가적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게 한 사랑으로
그가 클라라를 만난 순간이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와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
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그 후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가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하루도 그의 작품에 관한
찬사가 없는 날이 없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대해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시 피아니스트로서 서른네 살이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사모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바꾸어 놓으며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면서
그 증거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만 그의 온 정열을 쏟으려하고 있었다. 

우정과 존경은 사랑으로 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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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슈만이 정신병이 악화되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1854년 3월 4일 슈만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우정과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불타는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편지를 통해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상기시켰고
자신은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클라라 역시 브람스와의 관계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많은 기쁨을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람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끔찍한 재앙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의 영혼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와
자신이 음악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은인이요 친구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충실해야겠다는 소망 사이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폭풍과 같은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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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착상한 광폭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하고 있다. 
"자, 이제 막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말야." 
하지만 다행이도 그를 이런 악몽과 같은 내면의 싸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즉, 1856년 7월 마침내 슈만이 죽은 것이다.
슈만 사망 이후 클라라는 남겨진 7명의 아이들의 양육과
남편 슈만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서 살아가는 의미,
남겨진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미망인 클라라 슈만으로 변모해갔다.
한편 브람스도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한 인식이 커갔다. 
그런 중에 브람스의 마음에 문득 떠오른 것이
'독일레퀴엠'이라 불리는 '무'(無)-'체험'(Gar Nicht)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는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
(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하는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다.
이처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슈만이 죽은 후
침착하나 더욱 깊이 있는 사랑의 공감으로 변해갔고,
외부의 장애가 사라지고 그가 자유롭게 클라라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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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뇌졸중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가졌고,
예술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 7일 완성하였다. 
이 네곡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이 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
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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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천재들의 삶은 비현실적인 욕망과 환상을 구현하고자
몸부림친 창조적 작업에 대부분 바쳐진 삶이었다.
그들은 세속적인 부귀와 행복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동기와 힘에 이끌려 자신들의 삶을 희생시켜온 경우가 많다.
천재적인 예술가들은 무의식적 비밀의 세계를 넘나든 장본인들로서
평범한 대중들이 손쉽게 인식할 수 없는 직관력과 감수성을 통해
그들만의 세계를 모든 대중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표출해 낸 사람들이 아닐까...
물론 그에 대한 대가는 갈등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일 수 밖에 없었기에
그들은 세속적 안락과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천재들일수록 고귀한 인품과 세속적인 부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사고뭉치, 거지발싸개 같은 싸가지없는 쓰레기 좀비들과 어울리며
북한에가서 위대한 수령 만세를 외치는 고은이나 황석영이나
그와 같은 부류로서 남의 글에 험담이나 하는 꽁지영이 보다
섬시인 '이생진' 시인을 '반 고흐'나 '브람스'보다 더 존경하는 이유가... 
영화 '클라라' 스틸 컷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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