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며칠 뒤 선암사 古梅, 꿈결같은 향기 뿜을 것인데…

장전 2011. 3. 30. 09:08

 

 

며칠 뒤 선암사 古梅, 꿈결같은 향기 뿜을 것인데…


 

입력 : 2011.03.28 22:33

  


600살 白梅·紅梅가 300살 '젊은' 나무들 거느린 무우전 돌담길은
이 땅에서 우리 매화가 가장 아름답게 피는 곳
은은한 향기에 취하면 마음까지 맑아진다


엊그제 저물녘 순천 선암사에 들었다. 섬진강 따라 꽃 폭죽 터지기 시작한 3월 마지막 주말, 구례 산수유와 하동 매화로 눈을 씻고 왔더니 절은 땅거미에 잠겨 있다.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어서 일주문에서부터는 바쁜 마음에 뛰다시피 했다.

대웅전 오른쪽 뒤 언덕에 한옥처럼 생긴 절집이 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무우전(無憂殿)이다. 태고종 종정 스님이 머무는 곳이라 대문에 '종정원(宗正院)'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대문 옆 늘씬한 홍매(紅梅)부터 쳐다본다. 아직 꽃망울만 맺고 있어서 가지에 불그레한 기운이 감돌 뿐이다.

무우전 왼쪽 돌담길로 들어섰다. 어둑한 속에 하얀 점들이 떠 있다. 길 양쪽 무우전과 칠전선원 담을 따라 늘어선 백매(白梅)들이 드문드문 꽃불을 밝혔다. 이제서야 동안거(冬安居)를 마치고 세상으로 나서고 있다.

무우전 돌담길은 이 땅에서 우리 매화가 가장 아름답게 피는 길이다. 스무 그루 남짓 도열한 매화나무들 나이가 적어도 300살이다. 매화가 150살 넘으면 고매(古梅)라고 부른다. 늙은 매화 한 그루만 있어도 매화 찾아다니는 탐매(探梅)꾼이 꼬이는데 고매가 스무 그루를 넘는다니. 이 중 백매와 홍매, 600살 안팎 두 그루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이제 막 꽃을 피운 몇 그루 백매는 비교적 젊은 나무들이다. 무우전 돌담에 붙어선 천연기념물 홍매는 이번 주말은 돼야 꽃망울을 터뜨릴 것 같다. 굽은 등걸에 푸르스름한 잿빛 이끼까지 껴 휑하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성긴 가지 끝 점점이 거짓말처럼 고운 진분홍 꽃을 틔울 것이다. 꿈결 같은 향기를 내뿜을 것이다.

돌담길 왼쪽 원통전과 칠전선원 사이에 백매 한 그루가 8m 거목으로 버티고 서 있다. 630살 가까운 선암매(仙巖梅)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는 700여년 전 원(元)나라 때 심었다는 중국 찰미과(札美戈)다. 선암매는 그에 버금갈 뿐 아니라 400년 된 일본 가류바이(臥龍梅)를 압도한다. 아름드리 줄기에서 뻗어나온 가지들이 꽃망울을 자잘하게 달고서 담 너머 원통전을 수줍게 들여다본다.

이날 잠깐 구례 화엄사에 들러 각황전 옆 흑매(黑梅)하고도 눈을 맞췄다. 붉다 못해 검은빛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흑매는 꽃망울이 더 잘아 선암매보다 며칠 늦게 필 모양이다. 고매들의 꽃불은 이윽고 장성 백양사 고불매(古佛梅)로 옮아 붙을 것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옛 선비들은 겨울 눈 속에 피는 설중매(雪中梅)를 높이 쳤다. 찬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 차갑도록 고결한 꽃빛, 영혼에 스며드는 청향(淸香)을 사랑했다. 퇴계 이황은 마당에 100그루 매화를 심어 놓고 매화 필 때면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한겨울 달밤엔 추위를 이기려고 도자기로 만든 의자에 숯불을 피워놓고 앉아 매화 곁을 떠날 줄 몰랐다.

그렇게 음력 섣달, 납월(臘月)에 피는 매화를 납월매라고 불렀다. 민족지사이자 역사가인 호암 문일평은 겨울 매화가 사라져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삼남(三南)의 난지(暖地·따뜻한 지역)에 매화가 있기는 있으나 동매(冬梅)가 아니요 춘매(春梅)이며, (서울에선) 매화를 배양하였으나 지종(地種·땅에 뿌리내린 나무)이 아니요 분재일 뿐이다.'

남도 땅 순천 낙안읍성의 민가(民家) 마당에 1980년대까지 납월매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이 600년 홍매가 명을 다하기에 앞서 1983년 금둔사 주지 스님이 씨를 받아다 낙안읍성을 내려다보는 산사(山寺)에 심었다. 납월매 혈통을 이어받은 덕분인지 금둔사 홍매 여섯 그루는 섬을 제외하곤 가장 먼저 꽃을 피운다. 음력 섣달은 아니어도 이르면 2월 하순부터 꽃소식을 전한다.

3월 첫 주말에 금둔사 납월 홍매를 보러 갔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봄꽃이 더디 오는지 한두 그루만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문일평의 말대로 겨울매는 사라지고 봄매만 남은 모양이다. 그래도 서른 살이 채 안 된 매화가 제법 그윽한 향기를 뿌리며 화신(花信)을 띄우는 게 대견했다.

이맘때면 섬진강변 광양 다압 언덕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 만발하는 매화도 곱다. 하지만 우리 고매를 마주하면 일본에서 온 매실 경작용 매화가 얼마나 얕고 가벼운지 금세 안다. 일본매는 수령도 100년을 넘기지 못한다.

4월 초순이면 하동 쌍계사 십리길이 벚꽃에 뒤덮일 것이다. 섬진강과 함께 가는 19번 국도와 861번 지방도도 벚꽃 터널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농염(濃艶)한 봄꽃들은 사람을 몽롱하고 나른하게 만든다. 우리 매화의 맑고 서늘한 냉염(冷艶), 은은한 암향(暗香) 속에 서면 머리가 개운해지고 마음이 청신(淸新)해진다. 이 봄, 우리 고매들을 만나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