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일정聞一亭의 애민과 충정, 이최선李最善(1825~1883)
이최선의 자는 낙유樂裕이고, 호는 석전石田 또는 석전경인石田耕人이다. 1825년(순조 25) 4월 17일에 담양 장전면(현 창평면 장화리)에서 양녕대군의 15세손인 아버지 규형奎亨과 상산김씨商山金氏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최선의 가문이 담양에 거주하게 된 연유는 양녕대군의 증손인 추성수秋城守 이서李緖가 전라도로 귀양을 왔기 때문이었다. 1507년(중종 2) 8월 26일에 대사성大司成 이과李顆, 하원수河源守 이찬李纘, 병조정랑兵曹正郞 윤귀수尹龜壽, 내금위패두內禁衛牌頭 김잠金岑, 손유孫洧 등이 중종을 몰아내고 견성군甄城君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려다 서얼인 노영손盧永孫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과․이찬․손유는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고, 이찬의 형인 진성수珍城守 이면李綿은 경상도 초계로, 동생인 이서李緖는 전라도 창평으로 유배되었다. 이서는 유배된 지 14년만에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귀경하지 않고 대곡면大谷面 등갈리藤葛里에 머물면서 그는 자손들에게 “내 자손은 정치에 나가지 말라”하는 유훈을 남겼다.
그후 이최선의 6대조인 이형정李衡井이 지금의 장전마을로 이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들은 장전이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후손들이 계속해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을 경우 가문이 몰락할 것을 염려하여 다시 과거를 준비하고 과거시험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문은 유학에 종사하면서 문학文學과 효우孝友를 생활화하였고, 이최선은 현자賢子로 양육될 수 있었다. 특히 선현先賢으로부터 처사處事를 바르게 하여 의義로 귀속시키고 독서에 힘쓰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이최선은 이러한 실천을 통해 행의行義를 행동윤리로 삼아 학문의 좌표를 형이상形而上의 이론보다는 행의의 실천을 윤리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최선은 어려서 영민하여 3세에 글을 알았고, 5세에는 글을 지을 줄 알아 어른들이 운자韻字를 들어주면 마치 미리 지어놓은 듯이 응답할 정도였다. 항상 어른들 곁에서 의심나는 점을 물어 지혜를 길렀고, 12~13세 때에는 경사經史에 능통하였다.
그는 15세(1839)에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의 문하에서 수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17세(1841)에 어머니를, 27세(1851)에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게 되어 스승인 기정진에게 더욱 의지하면서 철저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기정진의 문인이 된 이최선은 정성을 다하여 40여 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정자 문하의 여원명呂原明(1039~1116)에게 견주어지기도 하는 노사문하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학문은 물론이고 현실에 대한 감각과 실천에 있어서도 기정진의 사상을 계승하며 발전시켰다. 또한 이최선은 노사문하에 있으면서 행의行義를 중심으로 하는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35세(1859, 철종 10)에 사마시司馬試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다.
그 이후 40세(1864, 고종 1)에 초시初試에는 합격했으나 복시覆試에서는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리고 50세(1874, 고종 11)의 늦은 나이에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열린 증광시增廣試 문과文科에 응시했으나 초시에 불합격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한강을 건너면서 몸에 지닌 은장도와 옥거울을 물에 던지고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였다.
이최선은 더 이상 관직에 뜻을 둘 수 없음을 느꼈고, 향촌에 은둔하면서 어지러운 세상과 등지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살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향에 돌아온 후에 최치원의 시 ‘대막대 지팡이는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띄우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筇無出山步 筆絶入京書]’와 두보의 시 ‘돌밭 띠풀집은 푸른 이끼로 황량한데, 다만 원컨대 남은 생애 밥이나 배불리 먹었으면[石田茅屋荒蒼笞 但願殘年飽喫飯]’를 붙여놓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문제에 대해 눈을 떼지 않았다.
1862년에 지방의 수령과 이서들의 탐학으로 인하여 일어났던 임술농민항쟁 때에 「삼정책三政策」을 상소하였다. 이최선은 삼정의 폐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기강의 쇄신으로 염치를 일깨워 힘써 실행하게 하는데 있다고 하면서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올바른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이치를 밝히는 ‘도학에 힘쓰고[勉道學], 언로를 개방하며[開言路], 인재의 선발을 엄정하게 해야 한다[嚴科程]’고 하였다.
그리고 186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로 침입한 병인양요 때에는 종친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동의계同義契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강화도로 향하였다. 비록 도착하였을 때는 프랑스군이 퇴각한 후였지만 대원군을 만나 인재등용에 대한 조언을 하였다.
이러한 이최선의 사상과 행동은 스승인 노사 기정진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기정진의 사상은 주리론主理論 사상에서도 독특한 유리론唯理論으로 리와 기를 대립시키는 이원적인 사상이 아니라 리와 기를 하나로 보는 일원적인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유리론 사상은 이최선의 「삼정책」과 의병활동에서 모두 리를 근본으로 하는 행동양식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기정진과 이최선이 보여주는 스승과 제자의 돈독한 정은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할 때 전해 준 시 한 수에 잘 나타나고 있다.
金城秋色入離歌 금성의 가을빛 이별노래 드리우고
持贈長鞭奈老何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宗姓宜爲編戶倡 종성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橫經孰與揮戈多 경을 빗기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이 어느 것이 더한지
但看日月麗黃道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뿐이니
焉有男兒臥綠蓑 남아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客裏若逢賓雁翮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爲傳漢水精無波 한수가 잠잠해 파도없다 전해주오.
그리고 이최선은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기정진에게 답하는 시를 적어 올렸다.
仗劒西風一放歌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蒼黃時事奈如何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臨危成敗非吾度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快死南兒問幾多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是日方承催血詔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晩天容易脫漁蓑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師門贈別慇懃意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歸泊江都誓一波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이렇게 이최선은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 자신의 사상과 이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고, 향촌 유림으로서 은둔과 출사의 뜻을 가진 전형적인 선비로 살다가 1883년(고종 20)에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조선봉건사회의 구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보수․봉건적인 입장이었지만, 백성 위주의 안정된 삶을 위하여 모든 폐단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기정진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던 것이었고, 또한 학문에 대한 실천적 행동양식의 근원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실척적인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후손들에게 계속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아들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의거한 인물이었다.
성균관成均館의 박사博士를 지낸 손자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1873~1953)는 이기李沂․윤주찬尹柱瓚․민형식閔衡植 등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최선의 행의적行義的 실천론은 그의 자손들에게로 이어졌다.
이최선의 가문을 통해서 한말 위정척사 유림가들의 사상이 항일운동가들에게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장전마을에는 이최선이 책을 읽던 문일정과 영서당迎瑞堂이 남아있다(유성한, 조선대박물관 연구원).
1. 위정척사운동을 이끈 전남의 인물
19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조선은 내우외환에 휩싸였다. 안으로는 삼정三政의 문란에서 야기된 1862년의 농민항쟁이 삼남지방을 뒤흔들었고, 밖으로는 구미열강과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도전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성립된 위정척사운동은 재지양반과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것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다. 노사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이렇다할 사승師承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학문적 일가를 이룸으로써 노사학파를 형성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 위정척사운동의 불을 지핀 인물이다. 이러한 그를 ‘장안만목불여장성일목長安萬目不如長城一目’이라 하였고, 훗날에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의 한 사람 혹은 근세유학의 3대가의 1인으로 평가받았다.
기정진은 전라북도 순창에서 태어났으나 부모상을 마친 18세 이후에는 전라남도 장성에서 주로 살았다. 그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어려서 금사金賜였으나 대중大中, 후에 대중大仲으로 바꾸었으며, 호는 잠수潛叟․지리수支離叟․공동자 倥侗子․무명와無名窩․노하병부蘆下病夫 등등을 사용하다가 만년에는 노사거사蘆沙居士를 즐겨 썼다.
「연보」에 따르면, 그는 40대 중반이후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는 「납량사의納凉私議」(1843, 45세)․「정자설定字說」(1845, 47세)․「우기偶記」(47세)․「이통설理通說」(1853, 55세)․「외필猥筆」(1878, 80세) 등이 손꼽힌다. 이러한 글에서 그는 이理를 절대시하는 이론을 체계화하였는데, ‘천하의 대변大變 중에서 가장 큰 변고는 기氣가 리理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라 말한 점에서 그의 사상적 특징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그는 저술보다도 문인들과 논변論辨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그것은 「답문유편答問類編」으로 정리되어 전해진다.
학문적 깊이와 독창성이 알려지면서 노사의 주위에 수많은 학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184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노사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를 따랐던 문인들은 대부분 전남과 영남 서부지역 출신들로서 약 600명이나 되었다. 노사와 그의 문인들은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세계관에 입각하여 도학적인 전통을 수호하거나 위정척사운동 나아가 의병전쟁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세기 중후반의 조선의 위급한 상황을 성리학적 입장의 개혁을 통하여 극복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가 1862년의 농민항쟁과 1866년의 병인양요에 대한 대책에 담겨져 있다.
그런데 노사학파의 사상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첫째 노사를 비롯한 문인들의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둘째 이른바 도학道學의 진흥, 즉 성리학 이론의 탐구와 발전, 셋째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 등의 방향이 그것이다. 특히, 의병항쟁은 위정척사운동의 구체적 실현으로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근왕운동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한편, 노사는 1862년 농민항쟁에 이어 자신의 두번째 시무책을 병인양요직후인 1866년 음력 7월에 올렸다. 이는, 이른바 위정척사운동의 기치를 처음으로 올린 기념비적인 내용과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하여 매천 황현은 “이때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은 양요로 인하여 사교邪敎를 배척하고자 항의하였다. (중략) 이 두 사람의 학술과 문장은 많은 사람을 압도하였다. 그들의 입신 처세도 본말이 있기 때문에 지난날 사관仕宦을 첩경으로 삼아 권문權門에게 머리를 굽힌 사람과는 완연히 달랐다.”라고 평하였다.
당시 노사는 서양세력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방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는데, 모두 6개 조항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이른바 「비어책備禦策」으로서 “정묘산定廟算․수사령修辭令․심지형審地形․연병鍊兵․구언求言․내수외양內修外攘” 등이 그것이다. 이를 좀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로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 둘째로 유사시에 대비하여 국내의 지세地勢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셋째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적軍籍의 효율적인 관리와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 넷째로 모든 국민들에게 현명하고 건설적인 대안을 개진케 하여 적극 수용하되, 한글로 쓰여진 시무책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내정개혁을 과감하게 수행하는 것만이 외세를 막는 지름길이라 주장하였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결인심結人心”, 즉 인민의 힘을 결집시켜야 한다고 특히 강조하였다. 아울러 사대부의 군역 부담과 서원의 무용성을 제기하였으며, 병인양요 당시에는 격문을 지어 거병을 추진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는 성리학적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 노사학파의 문인 가운데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인물들의 행적을 간단히 짚어보고자 한다. 정재규․이최선․기우만․오준선 등이 그들이다. 정재규鄭載圭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22세에 노사를 찾아와 수학했다. 그는 스승의 학설을 충실히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노사의 학설을 비판한 간재艮齋 전우田愚에 맞서 치열한 논전을 주도하였다. 정재규는 도학뿐만 아니라 절의의 실천에서도 앞장섰다. 이른바 신사척사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갑오경장에 반대하는 반개화운동에도 가담했고, 을미사변과 단발령 직후에는 의병을 도모한 바 있으며, 을사조약 이후에도 면암 최익현․송사 기우만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하였다.
이최선李最善은 담양 장전長田 출신으로 15세에 노사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도학의 탐구와 절의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1862년 임술농민항쟁 당시에 그는 6천여 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삼정책을 작성, 담양부사에 전달한 바 있다. 삼정책은 그의 현실인식을 잘 보여주는데, 그는 사회적 기강과 염치가 무너졌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이 발생했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인재의 발굴과 도학의 진흥, 그리고 언로의 개방을 들었다. 이러한 내용은 노사가 제시한 각종 대책과 비슷한데, 스승의 사상을 계승한 측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최선은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서울로 떠났는데, 노사는 출정한 그를 위해 시를 지어 격려하였다. 그리고 「외필」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독외필讀猥筆」을 지어 스승의 학설을 적극 옹호하였다. 이러한 그를 ‘내불기심외불기인內不欺心外不欺人’이라고 평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 승학承鶴은 부친과 더불어 노사의 문인으로서 기우만의 전기의병에 가담하였으며, 손자인 광수光秀는 나철羅喆 등과 함께 오적암살단五賊暗殺團으로 활동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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