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이광수

장전 2007. 10. 7. 23:15
   
  무등일보 연재 [호남의병 일백년] 제2부 7회 자신회의 을사5적 처단
  글쓴이 : 문전재     날짜 : 06-05-20 20:11     조회 :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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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2월 奇山度가 매국노 李根澤을 응징하였다는 소식에 슬퍼할 조선 백성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을사5적을 비롯한 친일파들만이 가슴을 죄며 일제에 빌붙어 구차한 생명을 보존하기에 바빴다. 1년 여가 지났음에도 친일파들의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는데,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더욱 강해진 까닭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바깥출입을 할때 언제나 일제 군경의 ‘호화로운 경호’를 받았다.
특히, 을사5적의 호위상황은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의 四人轎나 人力車의 행차시에는 앞에서 일본 순사가 길을 인도하였으며, 副官 2명은 말을 타고서 뒤를 맡았다. 좌우는 헌병과 순검들이 쌍쌍으로 버텨서서 에워싸고 다녔다. 이들에게 줄잡아 6-7명씩의 호위병력이 붙어다녔으니, 그 위세를 즐기려는 자들은 친일할 생각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처단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8시 軍部大臣 權重顯(륵약체결시 농상공부대신)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入闕하는 중이었다. 서울의 寺洞 입구(현 종로구 인사동)를 지날 무렵, 별안간 왠 청년 한 명이 인력거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 역적아 네 죄를 아느냐”라고 외쳤다. 이와 동시에 그는 권중현의 어깨를 붙잡고서 품속에 있는 육혈포를 급히 꺼내려 하였다. 그러나 주머니에 걸려 멈칫거리는 사이에 주위의 경호원들이 달려 들었다. 넋이 빠진 권중현은 근처 민가로 숨어들었다.
바로 이때 姜相元이 재빨리 나서며 권중현의 가슴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왠 일인가. 첫번째 실탄은 맞지 않았고, 두번째는 대문 모서리에 박혔으며, 세번째 총알은 일본 순사를 맞혔다.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바람처럼 튀어 근처 민가의 측간에 숨었는데, 하필 친일파 閔泳徽의 집이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경무청에 압송되고 말았다.
매국노 권중현의 피격소식은 당시 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사건이 서울의 한복판, 그것도 밤이 아닌 통행이 빈번한 출근시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았다. 대부분 친일파인 고위관료들은 자신들도 언제 그러한 위험에 직면하게 될런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불안에 떨었다. 특히, 이번 사건은 몇몇 사람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하에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상당수의 전현직 관료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친일정권의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 중심인물은 전남 출신들이었다. 즉, 낙안출신의(현 벌교읍) 羅寅永(羅喆)과 강진출신의 吳基鎬가 그들이다. 이들은 힘과 용기를 지닌 의병출신을 불러모아 5적의 처단과 친일정부의 전복 나아가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다.
나인영과 오기호는 사실 의열투쟁과는 거리가 먼 개화파 관료들이었다. 즉, 나인영은 온건개화파인 金允植의 門人으로서 注書를 역임하였으며, 오기호는 主事를 지낸 적이 있었다. 이들은 관직에서 물러나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하면서 실력양성을 통한 부국강병을 도모하였다. 따라서 일본과의 협조를 통하여 조선도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을사륵약에 의해 이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마각을 보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제의 구축에 앞서 을사륵약의 체결에 앞장선 매국노를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정권이 부패되고 온 국민이 도탄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을사5적의 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들의 죄악은 천하만고의 의뜸으로서 國賊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인영 등은 이들을 처단할 무장력이나 조직이 없었다.
나인영 등은 5적을 처단하기 위하여 열혈인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朴大夏를 추천받았다. 마침 박대하는 의병항쟁의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서울에 올라와 있었다. 나인영은 박대하의 “의병은 불 속에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다”는 말에 감동되었다. 그는 박대하에게 의병의 조직과 무장력을 동원하여 5적의 처단하자고 설득하였다.
박대하 역시 침체일로에 있던 의병항쟁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도 5적의 처단이 효과적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하였다. 이들은 민영환의 門人이었던 李鴻來, 충주의 李容彩 등과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나인영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모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金東弼 박대하 이홍래 이용채 등은 전라 · 경상도에서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입을 맡았고, 남원출신의 金寅植은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이들을 후원한 사람으로는 學部協辦 閔衡植, 前 郡守 鄭寅國 崔翼軫 李光秀 등이었다.
그리하여 나인영은 약 200여 명을 확보하여 1907년 2월에 自新會라는 비밀조직을 결성하였다. 드디어 5적을 처단을 조직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自新會의 취지나 5적암살의 정당성을 홍보할 문서들도 작성하였다. 나인영 자신은 愛國歌와 同盟書 斬奸狀, 李沂(구례)가 자신회의 趣旨書와 自現狀, 尹柱瓚(강진)과 이광수(창평)가 정부와 통감부, 일본군 사령부, 각국 영사관에 발송할 공함과 내외국민에 보낼 포고문을 지었는데, 이 글에서 5적 처단의 大義와 독립의 보존을 위하여 애국의 血性으로 나섰음을 주장하였다.
이목을 피하기 위하여 변복으로 한, 두 명씩 서울에 올라온 의병출신의 행동대를 객주가에 분산 투숙시켜 매국노를 응징할 그 날을 기다리게 하였다. 나인영 등의 주도인물들은 1907년 2월 하순 행동대로 하여금 5적의 邀擊을 지시하였으나 연락이 잘못되었으며, 그 뒤에는 30명씩 1개조로 5적의 집을 습격하려 하였으나 이 때에도 준비부족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인영 등은 정예의 요원들을 선발하여 5적의 출근길에 저격하기로 하였다. 1907년 3월 25일로서 네번째의 시도인 셈이다. 오기호 등은 참정 박제순, 김동필 등은 내부대신 이지용, 이홍래 등은 군부대신 권중현, 박대하 등은 학부대신 이완용, 徐泰雲 등은 법부대신 이하영, 이용채 등은 이근택을 각각 맡기로 하였다. 각 조는 3-4명으로 이루어진 결사대로서 각자 지정된 장소에서 저격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박제순 조는 광화문 해태상, 이완용 조는 돈의문, 이하영 조는 소의문, 권중현 조는 사동 입구에서 각각 대기하였다.
6개조 가운데 이홍래가 주도한 권중현 조만이 저격을 시도하였을 뿐 나머지 조는 모두 실패하였다. 삼엄한 경호와 준비부족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강상원만이 체포되었으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처분에 맡기겠다”며 의연하게 행동하였다. 그 역시 의병정신으로 당당하게 맞섰던 것이다. 강상원이 체포된 후 일제군경은 연루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에 나인영 오기호 등은 스스로 주모자임을 밝히고 행동대는 죄가 없으니 모두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나인영 등은 ‘국적을 제거하는 것이 모살미수죄에 해당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항변하며 연루자 30여 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나인영 오기호 이기 윤주찬 이광수 李承大 崔東植 徐廷禧 李完秀 車正午 李承唐 등은 전남출신이었으며, 김인식 姜相元 黃文叔 黃聖周 李京辰 李鍾學 崔相五 등은 전북출신이었다. 호남인들이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5-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아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珍島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대종교를 창시하여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서정희 등은 광주지역 3 · 1운동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 농민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제38회(95. 7. 12) ; 을사5적의 처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