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광순(高光洵,高光旭) |
|
|
|
1848.2~1907.10 |
|
|
|
전남 담양 |
|
|
|
의병 |
|
|
|
독립장(62) |
|
|
|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금산(錦山) 7백 의사(義士)의 지도자로 알려진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사손(祀孫)으로 생부(生父)는 고정상(高鼎相)이나 고경주(高慶柱)에게 계후되었다. 2남1녀를 낳았으나, 아들은 일찍이 실패하고 딸은 행주(幸州)의 기산도(奇山度)에게 출가하고 광훈(光薰)의 아들 재춘(在春)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그의 집안 중에 함께 의거를 일으킨 사람은 인봉(麟峰) 고제량(高濟亮)과 고광훈(光薰) 고광수(光秀) 고광채(光彩)가 있다. 이처럼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항일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위엄이 있어 남이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성품을 지녀 지도자적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학문은 생가 외조부 황주(黃洲) 김공에게 익히고, 장성하자 상월정(上月亭)에 올라가 10년 동안 문을 닫고 심력을 다하여 육경(六經)을 전공하였으며 제가(諸家)의 소작은 읽지 않았다. 과거에 응하였으나 부정이 심하여 관직을 외면하였고, 집안도 10대 종가이나 가산(家産)은 여의치 못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보기 위하여 상경하였을 때 당시 집권자이었던 민응식(閔應植)이 그를 보고서 수석을 약속하였으나 관서(關西) 사람이 돈 1백만 냥을 뇌물로 바쳐 중도에 변경시켰기 때문에 고광순은 낙방하였다. 고광순은 민응식을 찾아가 "대감이 돈 1백만 냥에 국사(國事)를 희롱하니 참으로 1푼 가치도 없는 인물이구려. 고광순이 어찌 세도가의 이용물이 되겠는가? 내가 망령이다."하고 옷소매를 떨치고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다시 과거를 보지 아니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라도 지방에서는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녹천(鹿泉) 고광순(高光洵)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 등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원수를 갚고 나라를 구원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때 이웃 고을인 나주(羅州)에서 민중 이속들이 모두 호응하여서 의거하였으며, 해남군수(海南郡守) 정석진(鄭錫振)과 담양군수(潭陽郡守) 민종열(閔鍾烈)이 참서관(參書官) 안종수(安宗洙)를 처단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안종수는 본래 불법횡포가 심한 인물로서 단발령 이후 강제 삭발에 앞장 섰기 때문에 처단된 것이다. 이 소식에 접한 고광순이 속하였던 광주의진에서 대장 기우만이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함께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어서 고광순은 대장 기우만을 호종하여서 기삼연 기주현(奇周鉉) 양상태(梁相泰) 기동관(奇東觀) 이승학(李承學) 기 재(奇宰) 기동로(奇東魯)와 더불어 나주로 가서 단을 쌓고 맹서를 하고, 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사당과 금성산(錦城山)에 제사를 올려 신의 도움을 빌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다시 각 고을로 통문을 돌려서 2월 30일 광주에서 회합할 것을 알렸다. 당시 많은 의병이 나주 지역에 운집해 있었지만,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이며 맨 처음 의거한 곳이기 때문에 창의소 중앙본부를 광주에 두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맨 처음 의거한 해남군수 정석진이 살해되고 담양군수 민종열이 체포되자 의진은 크게 동요하였다. 그리고 대집회가 있기도 전에 2월 27일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이 사람을 보내어 의병을 해산할 것을 은근히 선유하니 호남 의병진의 인심은 풀어졌다. 끝내 기삼연이 의진 해산을 반대하였으나, 기우만은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정말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의 화를 재촉하는 길이 되기에 알맞은 일인즉, 자수하여 우리들의 의리나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
하고 통곡하며 해산령을 내려 호남의 을사 의거는 미연에 그치고 말았다. 의병 해산 후 고광순은 비분강개하여 국치(國恥)를 씻을 생각만 하고 집안 일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하였다.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영남 호남으로 출몰하여 대중을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4월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이 순창(淳昌)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족조(族祖)인 인봉 고제량(麟峰 高濟亮)과 함께 면암을 찾아갔으나 이미 면암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였다. 다시 인봉과 함께 기우만과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아 오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체포되었다. 고광순은 좌절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12월 11일(양 1907년 1월 24일) 고광순은 인봉과 더불어 창평(昌平) 저산(猪山) 분암(墳庵)에서 창의의 기치를 세웠다. 이때 광훈 광수 광채 그리고 윤영기(尹永淇) 박기덕(朴基德) 등이 종사하여 모의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각기 부서를 정하였는데, 고광순이 주장(主將), 고제량이 부장(副將)이 되고 나머지는 참모가 되었다. 이들은 부서를 정하고 토적격왜(討賊擊倭)의 전술전략을 작성하여 각처의 의진과 연락하여 함께 의병거사를 계획하였다. 이때 남원(南原)의 양한규(梁漢奎)로부터 남원합동작전의 연락을 받고 고광순의 의진은 곧 행군을 개시하였다. 2월에 남원으로 진격하였으나 도착하기 전에 양한규 등의 의병이 이미 실패하였기 때문에 일시 남원성 포위전을 벌이다가 퇴각하였다. 4월 25일(음 3월 13일)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병력을 증강하던 중 능주(綾州, 지금의 和順郡 綾州面)의 사림들의 협력을 얻어서 윤영기(尹永淇) 등과 함께 화순읍으로 진격하여 점령하고, 일본군에 협력하는 자들의 가옥을 모두 불태워 관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26일 다시 동복(同福, 지금의 和順郡 同福面)으로 진군하였는데 광주부(光州府)에서 파견된 관군들과 도마치(圖馬峙)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는 일시 흩어졌다. 이에 광주 부근의 의병장들은 혹은 군사를 산중으로 숨기고 혹은 기회를 보아 진격하며 수시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8월경부터 고광순은 고제량 윤영기 신덕균(申德均(淳)) 등이 다시 창평 제심리(昌平 齊心里)를 중심으로 집합 연락하여 대규모의 거사를 계획하였다. 9월 11일(음 8월 4일) 고광순은 도독(都督)이 되어서 박성덕(朴聖德)과 고제량을 도총(都總) 및 선봉으로 삼고, 신덕균(申德均) 윤영기 등을 참모로 삼아서 천지신명께 제사 드리고 맹서하여 신의 도움을 기원하였다. 이튿날 행군하여 동복 땅을 지나 곡성군 구룡산(谷城郡 九龍山) 아래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기에서 참모 신덕균의 제의에 의해 먼저 적국인(敵國人)이 많이 있기로 알려진 동복읍을 토벌하고 나가기로 하였다. 9월 14일 새벽에 회군(回軍)하여 동복읍으로 들어가서 도포사 박화중(都暑士 朴化中)의 총격을 신호로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 읍내를 점령하고 적들을 해산시킨 다음 다시 남원 곡성 등지를 지나며 격문을 각지로 보내어 민심과 사기를 고무시켰다. 1907년 9월 17일(음 8월 10일)지리산 화개동(智異山 花開洞)으로 들어가 유진(留陣)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켰다. 이때 동복 순천(順天) 곡성 광양(光陽) 구례 등지에서 군사로 참가한 자가 1천을 헤아렸다. 훈련 도중에도 윤영기 신덕균 등은 다시 나가서 광주 진위대의 해산병 등을 수습하여 많은 군사들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동년 10월 11일(음 9월 11일) 적의 기습을 만나 고광순을 비롯하여 고제량 등 10여명이 불행하게도 화개동 연곡사(燕谷寺)에서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155 18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245 246 248 249 250 402 403 404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522 635 636 637 685 68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281 282 283 28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568 834면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