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편 5절 대한제국기 의병항쟁과 순천 <목차> 1. 白樂九 義兵의 봉기와 전남 동부지역 2. 5적암살과 전남 동부지역 3. 1907~9년 순천지역의 의병활동과 새로운 모색
大韓帝國의 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義兵이 일어났다. 의병은 1894년 후반 경북 安東에서 시작된 이래 약 20년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특히, 일본의 침략과 내정간섭이 강화될수록 의병항쟁도 거세어졌다. 이를테면, 1895년의 明成皇后弑害事件(10.7)과 斷髮令(12.30), 그리고 1896년의 衣冠制度의 개정(1.11)과 俄館播遷(2.11) 시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이러한 사건이 곧 제1차 의병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1904~5년을 전후하여 의병항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1904년의 韓日議政書(2.23.)와 韓日協約(8.22.), 그리고 1905년의 을사륵약(11.18.) 등과 같은 일제의 정치적 침탈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흔히 제2차 의병이라 한다. 1907년 후반이후 약 2년여 동안 의병투쟁은 가장 격렬하여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1907년 들어 일제는 高宗의 强制退位(7.19.)와 韓日新協約(7.24.) 그리고 韓國軍의 解散(8.1.) 등을 단행하여 한국의 주권을 유린하였다. 이무렵에 경제적 침탈이 가중되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한국민의 대일감정이 악화됨으로써 의병에 투신한 사람들은 날로 증가하였다. 바로 이 시기가 제3차 의병에 해당된다. 1907년부터 약 5년간 일본 군경과 교전한 의병의 숫자는 14만여 명이나 되었으며, ꡔ朝鮮暴徒討伐誌ꡕ(ꡔ독립운동사자료집ꡕ3, 1971), pp.827~9 참조. 1907년 7월부터 이듬해 11월 사이에 14,566명의 의병이 일제의 총칼에 의해 살륙당하였다. ꡔ暴徒에 관한 編冊ꡕ (정부기록보존소, 문서번호 88-19, 필름번호 88-606),p.1121. 당시 의병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싸웠으며, 그리고 의병의 피해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제3차 의병 당시 전라도 의병의 활동이 가장 왕성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찍이 朴殷植에 의해 언급된 바 있는데, 아래의 기록이 그것이다.
대개 각도의 의병을 말하건대 전라도가 가장 많았으나, 지금은 능히 그 상세함을 알 수 없다. 이에 훗날을 기대하노라(ꡔ韓國獨立運動之血史ꡕ, ꡔ朴殷植全書ꡕ 상, 1975, p.24).
各 道別로 활동의 多少를 논할 때 전라도가 가장 많았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므로 후일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였는지는 이미 입증되고 있다. 즉, 1908년 일본군경과의 交戰回數와 交戰義兵數에서 전라도는 각각 25%와 24.7%를, 1909년에는 각각 46.6%와 59.9%를 차지하였다. ꡔ韓國獨立運動史ꡕ 1(국사편찬위원회,1965),pp.294~6. 하지만, 1910년 8월 하순에 한국이 일제에 강점당하면서 의병의 활동도 위축되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국내의 의병들은 만주나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이 글에서는 대한제국기의 의병, 특히 그 중에서도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1. 白樂九 義兵의 봉기와 전남 동부지역 1) 전남지역의 제1차 의병 제1차 의병은 대체로 명성황후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전라도의 경우에는 다소 늦어졌는데, 그것은 불과 1년여 전에 동학농민혁명의 후유증때문이었다. 그런데 제1차 의병은 長城과 羅州의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다. 장성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松沙 奇宇萬(1846~1916)이 핵심인물이었다. 그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蘆沙 奇正鎭(1798~1879)의 손자이자 제자였다. 장성의병은 주로 기정진의 문인들이 적극 가담하였는데, 奇三衍 · 高光洵 · 金翼中 · 鄭義林 · 李承鶴 · 奇宰 · 朴源永 · 奇宇益 · 金良燮 등이 그들이다. ꡔ全羅南道誌ꡕ 7, 1993, pp.55~9.
장성의병은 개화파의 득세와 高宗이 환궁하지 않은 점 등을 倡義의 명분으로 내세워 1895년 음력 1월경에 봉기하였다. 비록 단발령은 철회되었지만, 국가의 자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된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우만 등은 장성향교를 본거지삼아 의병을 모았다. 이들은 200여 명의 대오를 편성한 후 나주로 향하였다. 나주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을 막아낸 천연의 요새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장성의병은 나주의병과 연합하여 北上 · 勤王하려는 것이었다. 나주향교에 도착한 기우만 등은 개화파 參書官 安宗洙를 처단한 나주의병과 향후의 계획을 논의하였다. 또한 이들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유명한 金千鎰의 사당에 祭祀를 지냈으며, 고종에게 의병봉기를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장성의병은 나주의병을 주도하는 吏族들과 주도권 문제로 갈등을 빚었던 것 같다. 신분상의 차이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장성의병은 나주에서 광주향교로 移陣하여 북상할 채비를 갖추었다. 바로 이때 선유사 申箕善이 광주에 내려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장성의병은 국왕의 해산조칙을 지닌 선유사의 지시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이들은 대부분 명분을 중시하고 근왕적 성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장성의병은 비록 창의의 의지를 굽혔지만, 전남에서 가장 먼저 창의한 의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한편, 나주의병은 양반 유생과 이족들이 힘을 합하여 의진을 결성하였다. 나주의병에 관해서는 졸고, 「1896年 羅州義兵의 結成과 活動」(ꡔ李基白紀念 韓國史學論叢ꡕ 下, 일조각, 1994)을 참고하기 바람. 나주향교의 東齋에 집합한 이들은 의병장에 前 注書 李鶴相을 추대하였는데, 100여 명으로 대오를 편성하였다. 의진의 결성을 주도한 양반 유생은 의병장 이학상, 중군장 李承壽, 참모 羅秉斗, 군량관 李源緖, 서기 林鴻圭, 통문을 지은 李炳壽 등이었다. 그리고 향리 중에 주도적인 인물은 鄭錫珍 · 金蒼均 · 金晳鉉 · 朴根郁 · 金在煥 · 金錫均 · 朴化實 · 張佶翰 · 昇甲杓 등이었다. 당시 양반 유생들은 대체로 義陣代表․文簿作成․參謀․軍糧을 담당하거나 일반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이에 비하여 이족들은 左翼將과 右翼將을 비롯한 軍務를 맡았는데, 대부분 군사적인 임무를 띠었다. 따라서 향리들이 의병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椽吏廳에 창의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나주향교에서 연리청으로 창의소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는 참서관 安宗洙를 처단한 후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즉, 김창균 장길한 승갑표 등의 향리들이 안종수와 순검 2명을 처단하고, 稅務視察官 朴準成․稅務主事 卜正采 등 6명을 가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부관찰사에 해당하는 참서관 안종수는 ꡔ農政新編ꡕ의 저자로서 개화파 관료였다. 이광린, 「安宗洙와 農政新編」(ꡔ韓國開化史硏究ꡕ, 일조각, 1969 ; 1985), pp.220~233. 그는 순검을 동원하여 나주읍민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버렸는가 하면, 불법적인 수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그가 나주읍민의 원성을 사게 되었으며, 향리들과도 갈등이 컸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나주향리들에게 피살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나주의병의 주도권은 양반 유생에서 이족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한편, 나주의병 역시 국왕에게 상소하여 起義의 목적이 勤王에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울러 일본세력의 驅逐과 개화정책의 반대, 그리고 국왕의 還宮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다시 말해, 나주의병은 反開化․反侵略的 勤王義兵을 지향한 것이다. 그런 때문에 이들은 국왕의 해산 명령에 바로 순응하는 한계를 보이기도 하였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전남지역의 제1차 의병은 장성과 나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찾아지지 않는다. 아마도 제1차 의병이 너무 빨리 해산된데다 무력항쟁으로 확산되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국가에서는 단발령을 철회하여 의병의 명분을 없애고, 고종의 해산조칙을 소지한 선유사를 파견하여 의병의 봉기를 막음으로써 제1차 의병은 자연히 소멸되었다.
2) 백낙구 의병의 활동 1905년 11월의 을사륵약을 전후하여 의병이 재차 일어났다. 한국인들은 을사륵약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됨으로써 국권을 상실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의병을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더욱 활기를 띠었다. 전남지역의 제2차 의병은 崔益鉉 · 李大克 · 白樂九 · 梁漢奎 · 梁會一 등이 주도하였다. 면암 최익현은 호남지역 의병의 활성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1906년 6월, 최익현은 전 낙안군수 林炳瓚과 함께 태인의 武城書院에서 수백 명의 문인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儒生軍을 이끌고 정읍과 곡성 등지를 돌며 군량과 무기를 모았다. 의병을 일으킨지 일주일만에 그는 순창에서 체포되었다. 최익현 의병이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유생과 같다는 지적도 있지만, 창의를 호소하는 그의 글은 전남 지역 의병의 봉기를 크게 자극하였다. 즉, 백낙구 · 고광순 · 李恒善 · 姜在天 · 奇宇日 · 기우만 · 양회일 등이 각각 광양 · 창평 · 구례 · 장성 · 곡성 · 능주 등에서 의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익현의 의병봉기는 호남의 의병기운을 일깨웠을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을 고조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홍영기, 「호남의병일백년」 35회(무등일보 1995년 6월21일자).
특히, 백낙구의 의병봉기는 순천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그는 전주의 鄕吏 집안으로 짐작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그는 농민군을 뒤쫓는 招討官으로 활동하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主事에 임명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국제 정세와 썩어빠진 정치의 난맥상에 실망하고서 곧 사직하고 말았다. 얼마후 그는 악성 눈병에 걸려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 이후, 그는 광양의 白雲山中에 깊숙히 은거하여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무렵, 그는 을사륵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였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서 의병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06년 1월, 그는 기우만이 주도하는 谷城의 道東祠 擧義에 참여하였으나, 워낙 호응이 적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장 태인을 향해 출발하였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최익현의 패전과 서울로의 압송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도 그는 아쉬운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광양에 돌아온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다. 70노구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직접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하였다. 우선 그는 장성의 기우만, 창평의 고광순 등과 연락하며 창의날짜와 장소를 물색하였다. 이들은 의병의 패인이 훈련의 미숙과 무기의 열세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깊은 산중에서 일정기간 훈련을 하기 위해 지리산 골짜기에 위치한 中大寺에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이 절은 구례군 토지면에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06년 10월경, 백낙구는 자신이 은거해오던 광양의 백운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을 의병으로 끌어들였다. 약 2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백낙구는 약속한 날짜에 구례의 중대사로 향하였다. 이때가 1906년 11월 5일이었다. 한편, 백낙구의 의병봉기에는 진주의 失職한 郡吏들이 적극 가담하였다. 백낙구는, 1906년 10월에 단행된 관제개혁으로 쫓겨난 이들을 설득하여 의병대열에 합류시킨 것이다. 그런데 연락이 잘못되어 고광순과 기우만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오지 않았다. 이에 광양으로 되돌아간 그는 11월 7일에 광양 郡衙를 점령하여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大韓每日申報 1906년 11월 14일자 「光陽匪擾」.
이어 순천을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날이 환히 밝아오자 취소하고서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의 약속장소에 다시 집결하기로 하였다. 백낙구 역시 李承祖 · 李道順 · 李芝相 · 權昌祿 · 安致命(致中) · 金奉九 등 6명과 함께 구례를 들이치다가 구례군수 宋大鎭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곧바로 順天分派所로 압송되었으며, 후일 광주로 이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가운데 安致命과 金奉九는 순천에서 탈옥하여 화를 면하였다. 위의 신문 1906년 12월5일자 「五賊取招」와 1907년 1월10일자 참조. 나머지 의병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백낙구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대체로 지방제도의 개혁에 불만이 많았던 전직 郡吏들이었던 것 같다. 아래의 인용문이 그러한 사정을 전해준다.
최의 잔당은 끊임없이 민심을 선동 도발하고 있었는데, 동년(1906) 11월4일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최익현을 따르는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 이항선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前 郡吏 등과 통모하여 구례군 중대사에 모여 총원 50여 명(총기 10여 정)으로써 다음날 5일에 거사, 구례로부터 광양군을 통과하여 7일 순천에 이르렀는데 ··· ···(ꡔ전남폭도사ꡕ, pp. 21~2)
백낙구 등이 실직한 관리들을 끌어들여 의병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상황을 알 수 있다. 실직 관리들은 대체로 진주출신들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6년 11월14일자 「광양비요」와 萬歲報 11월15일자 「광양비요」 참조. 이들은 진주에서 폭동을 도모하려다 백낙구와 만나게 되어 의병에 투신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순천에서 광주로 압송된 백낙구는 訊問을 받았다. 신문과정에서 그는 의병에 투신한 감회를 솔직하게 피력하였다.
“슬프다. 오늘날 소위 大韓國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의 을미년에는 일본공사 三浦가 수차 마음대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니 萬國이 이를 듣고 失色하였으며, 팔도가 원수같이 애통해한 이래 12년이 흘렀다. 위로는 復讐의 거의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伊藤博文이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늑멸하고서 자칭 統監이라 한다. 그 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宗社와 삼천리의 강토와 이천만의 동포가 이웃나라의 賊臣 伊藤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등박문을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하였다더라(大韓每日申報 1906년 12월7일자 「敗將口供」 ; 현대문으로 고침).
앞을 보지도 못한 장애인이었지만, 백낙구는 오로지 한국의 장래만을 걱정하였다. 그는, 한국이 누구의 나라인데 伊藤博文이 자칭 통감이라 하며, 삼천리 강산과 2천만 동포를 빼앗아 가느냐고 강력히 성토하였다. 요컨대, 그는 성리학적 명분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근왕의병보다는 保國義兵을 지향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당시 백낙구는 순천에서 활동중인 일본인들을 먼저 내쫓으려다가 붙잡히고 말았다. 구한국관보 1907년 4월23일자 참조. 결국, 그는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에 완도군 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純宗의 特赦로 풀려났다. 위의 책 1907년 5월6일자 및 12월3일자 참조.
고금도에서 돌아온 그는 全州의 의병들과 합류하여 전북 泰仁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의병들은 백낙구를 부축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였다. 이에 그는 “그대들은 떠나시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오”라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백낙구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순간, 일본군의 총에서 불이 뿜었다. 의병장 백낙구는 태인에서 장렬히 전사한 것이다. 이 때가 1907년 섣달이었다. 백낙구의 활동에 대하여 황현은 ꡔ梅泉野錄ꡕ에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하여 전투할 때에는 언제나 교자를 타고 일병을 추격하였다. 그리고 패할 때도 교자를 타고 도주하다가 세 번이나 체포되었는데,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라고 썼다. 의병장 백낙구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써 투쟁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양 사람들은 백낙구의 발발한 기운을 못잊어 하였다고 한다. 요컨대, 백낙구는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맹인 의병장이었다. 그의 감투정신과 반일투쟁은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확산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이상과 같이 제2차 의병은 성리학적 명분이나 근왕을 지향하였다기 보다는 국권수호투쟁, 즉 反侵略的 · 保國的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따라서 이들은 상소나 시위형태의 활동을 지양한 대신에 무력투쟁으로 선회하였다. 하지만, 아직은 장기항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도 없지 않았다.
2. 5적암살과 전남 동부지역 1) 기산도의 의열투쟁 을사륵약이 체결되자, 일반 국민들은 이제 일제의 망국노가 되었다고 슬퍼하였다. 당시의 격앙된 상황은 황성신문 1905년 11월20일자에 실린 張志淵의 「是日也放聲大哭」이란 논설에 잘 나타나 있다. 장지연은 그의 논설에서 매국노들이 4천년 강토와 500년 종사를 일제에 넘겨주었으며, 2천만 동포를 모두 일본의 노예로 전락시켰다고 애�아 하였다. 매국노란 당시 을사륵약의 체결에 동의한 이른바 을사5적을 말한다. 즉, 李完用을 비롯한 李根澤 · 朴齊純 · 李址鎔 · 權重顯 등이 그들이다. 바로 이들이야말로 개인의 영달과 사리사욕을 위해 국가와 민족을 일제에 팔아먹은 매국노였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를 팔아먹은 5적을 2천만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5적암살은 대체로 전남인들이 주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5적중에 군부대신 이근택이 가장 먼저 습격을 당하였다. 1906년 2월 16일 밤, 그는 奇山度 등의 칼에 무려 열세 곳이나 난자당하였다. 황성신문 1906년 2월19일자 「軍大被刺顚末」. 그를 단죄한 기산도는 전남 장성출신으로 창평의 의병장 高光洵의 사위이며, 장성의 의병장 기우만과 기삼연의 가까운 친족이었다. 이근택은 「五賊의 우두머리」로 불리울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또한 그는 주한일본군 사령관 長谷川好道와 결의형제를 맺었으며, 伊藤博文의 양아들로 행세하였다. 더욱이 그는 마치 일본인이나 된 것처럼 일본 신발에 일본차를 타고 다니며 거들먹거렸다. 이러한 그에게 군대와 경찰이 붙여져서 엄중히 경호하였다. 따라서 기산도 등이 5적을 처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산도 등은 이근택을 응징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좀처럼 틈이 보이지 않자, 이들은 이근택의 집으로 직접 쳐들어가기로 하였다. 당시 이근택의 집은 물샐틈없이 경비되고 있었다. 예컨대, 이근택의 침실 주위에는 군인 6명과 순검 4명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일제의 헌병대와 순사분파소와도 비상선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기산도 등의 일행은 감쪽같이 거사를 결행하였던 것이다. 이근택이 애첩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을 때, 이들은 소리없이 침실에 들어가 칼을 휘둘렀다. 기산도 등의 칼놀림에 이근택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밖으로 새었다. 마침 침실 곁을 지나던 家僕 金鍾協이 그 소리를 듣고 침실에 뛰어들었다가 기산도 등이 휘두른 칼에 네 곳이나 찔려 쓰러졌다. 이날의 거사에 참여한 사람은 기산도와 具完喜, 李世鎭 등이었다. 훗날 기산도는 다른 의열투쟁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구완희와 이세진은 무사히 피신하였다. 당시 기산도는, “五賊을 살해하려는 사람이 어찌 나 혼자이겠는가? 탄로된 것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그는 나주출신의 朴宗燮 등 11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는데, 2년반의 징역형에 처해졌다. 당시 재판장은 이완용의 이복형 李允用이었다. 얼마 후 석방된 기산도는 義兵戰線에 뛰어들었다. 유생에서 계몽운동으로, 의열투쟁에서 다시 의병항쟁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이는 모두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고뇌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그는 고향인 전남으로 돌아와 의병투쟁에 나섰다가 다리에 부상을 당하였다. 1910년대 중반에 그는 고흥군 도화면에 내려와 서당을 개설하여 제자를 양성하다 3 · 1운동을 맞았다. 그후 그는 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하여 진남포까지 갔다가 끝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뚫지 못하였다. 고흥에 되돌아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던 그는 다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동지를 배신하지 않으려고 스스로 혀를 잘라 버렸다. 5년후에 풀려난 그는 여기저기 전전하다 1928년에 장흥의 어느 사랑방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流離丐乞之士 奇山度之墓」라고 쓴 나무 비를 세워달라고 유언하고서 조용히 운명하였다. 그의 몸과 마음을 오직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에 바친 것이다.
2) 나철의 의열투쟁 을사5적을 비롯한 친일파에 대한 경호는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5적의 경호는 삼엄하기 짝이 없었다. 예컨대, 5적이 행차할 때에는 경호병력이 사방을 에워쌓다. 즉, 일본 순사가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으며, 副官 2명은 말을 타고서 뒤를 맡았다. 좌우에는 헌병과 순검들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다녔다. 이들의 행차에 줄잡아 6~7명씩의 호위병력이 붙어다닌 것이다. 하지만 을사5적을 처단하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1907년 3월 25일 아침 8시에 군부대신 권중현(을사륵약체결시 농상공부대신)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入闕하는 중이었다. 서울의 寺洞 입구(현 종로구 인사동)를 지날 무렵, 별안간 왠 청년 한 명이 인력거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 역적아 네 죄를 아느냐”라고 외쳤다. 동시에 그는 권중현의 어깨를 붙잡고서 품속의 육혈포를 꺼내어 쏘려는 순간, 총이 주머니에 걸려 멈칫거렸다. 이때 다른 청년 한 명이 재빨리 나서며 권중현의 가슴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으나 연달아 빗나갔다. 이 청년은 곧바로 체포되어 경무청에 압송되고 말았다. 매국노 권중현의 피격소식은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이 사건은 몇몇 사람의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아래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당수의 전현직 관료가 가담하여 친일정권의 전복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이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한 주도인물은 대부분 전남 출신들이었다. 예를 들면, 낙안출신의(현 벌교읍) 羅寅永(羅喆)과 강진출신의 吳基鎬 등이다. 이들은 힘과 용기를 지닌 의병을 불러모아 5적의 처단과 친일정부의 전복하고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계획이었다. 박환, 「羅喆의 人物과 活動」, ꡔ東亞硏究ꡕ 17, 1989.
나인영과 오기호는 사실 의열투쟁과는 거리가 먼 개화파 관료들이었다. 하지만, 부국강병을 도모하였던 이들의 꿈은 을사륵약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적 야욕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들은 일제의 구축에 앞서 을사륵약의 체결에 앞장선 매국노를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나인영 등은 그들을 처단할 무장력이나 조직이 없었다. 무장력을 갖추려는 과정에서 이들은 朴大夏를 추천받았다. 의병에 투신한 박대하는 마침 서울에 올라와 의병항쟁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찾고 있었다. 나인영은 박대하의 “의병은 불 속에라도 뛰어들 자신이 있다”는 말에 감동되었다. 그는 박대하에게 의병의 조직과 무장력을 동원하여 5적을 처단하자고 설득하였다. 박대하 역시 침체일로에 있던 의병항쟁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도 5적의 처단이 효과적이라는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들은 민영환의 門人이었던 李鴻來, 충주의 李容彩 등과 함께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들어갔다. 나인영과 오기호가 중심이 되어 모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金東弼 박대하 이홍래 이용채 등은 전라 · 경상도에서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구입을 맡았고, 남원출신의 金寅植은 거사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였다. 이들을 후원한 사람으로는 學部協辦 閔衡植 · 前 郡守 鄭寅國 · 崔翼軫 · 李光秀 등이었다. 당시 이들이 5적암살단을 조직하는 과정에 대하여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27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전라도 낙안군 유생 나인영과 강진군 유생 오기호가 소위 5대신을 암살하고 정부를 전복하여 신정부를 수립할 계책으로 同謀할 때에 의병에 투입하였던 금산군 박대하, 前 總巡 李鴻來, 대구 金東弼, 충주 李容彩 등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相謀하였는데 거병하는 것은 천하를 어지럽히므로 유해무익하니 차라리 5대신을 암살하자고 의결··· ····
위의 인용문에 보이듯이, 나인영 등이 의병계열과 접촉하여 의열투쟁에 나서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의열투쟁은 계몽운동계과 의병계가 연합하여 추진하되, 각 계열의 장점을 살려 준비된 것이다. 당시 나인영 등은 약 200여 명을 확보하여 1907년 2월에 自新會라는 비밀단체를 결성하였다. 5적을 처단하기 위한 조직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自新會의 취지나 5적암살의 정당성을 홍보할 문서를 작성하였다. 나인영 자신은 愛國歌와 同盟書 · 斬奸狀, 李沂가 자신회의 趣旨書와 自現狀, 尹柱瓚과 이광수가 정부와 통감부 · 일본군 사령부 · 각국 영사관 등에 발송할 공함과 내외국민에 보낼 포고문을 각각 지었다. 이 글에서 매국노 처단의 大義와 독립의 보존을 위하여 애국의 血性으로 나섰음을 밝혔다. 나인영 등은 의병출신의 행동대를 객주가에 분산 투숙시켜 기회를 엿보았으나, 좀처럼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마지막 수단으로 이들은 정예의 요원들을 만들어 5적의 출근길에 저격하기로 결정하였다. 1907년 3월 25일에 거사하기로 하였는데, 이미 네번째의 시도였다. 오기호 등은 참정 박제순, 김동필 등은 내부대신 이지용, 이홍래 등은 군부대신 권중현, 박대하 등은 학부대신 이완용, 徐泰雲 등은 법부대신 이하영, 이용채 등은 이근택을 각각 맡기로 하였다. 각 조는 3~4명으로 이루어진 결사대로서 각자 지정된 장소에서 저격할 계획이었다. 예컨대, 박제순 조는 광화문 해태상, 이완용 조는 돈의문, 이하영 조는 소의문, 권중현 조는 사동 입구에서 각각 대기하였다. 그런데 6개조 가운데 이홍래가 주도한 권중현 조만이 저격을 시도하였을 뿐 나머지 조는 모두 실패하였다. 삼엄한 경호와 준비부족이라 할 수 있다. 군부대신 권중현을 저격한 강상원이 체포되었으나, 그는 “죽고 사는 것은 처분에 맡기겠다”며 의연하게 행동하였다. 그 역시 의병정신으로 당당하게 맞섰던 것이다. 강상원이 체포된 후 일제군경은 연루자의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에 나인영 오기호 등은 스스로 주모자임을 밝히고 행동대는 죄가 없으니 모두 석방하라고 주장하였다. 나인영 등은 ‘국적을 제거하는 것이 모살미수죄에 해당하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항변하며 연루자 30여 명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이 가운데 나인영(낙안) · 오기호(강진) · 이기(구례) · 윤주찬(강진) · 이광수(담양) · 李承大(담양) · 崔東植(순천) · 徐廷禧(광주) · 李完秀(담양) · 車正午(담양) · 李承唐(담양) 등은 전남출신이었으며, 김인식(남원) · 姜相元(금산) · 黃文叔(진산) · 黃聖周(금산) · 李京辰(진산) · 李鍾學(금산) · 崔相五(진산) 등은 전북출신이었다. 전라도인들이 을사5적의 처단을 주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5~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아 珍島 · 智島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907년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이후 나인영과 오기호 등은 대종교를 창시하여 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으며, 서정희 등은 광주지역 3 · 1운동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하 농민운동의 중심인물로 성장하였다. 다시 말해 이들이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한편, 1909년 12월 총리대신 이완용을 저격한 이른바 이재명사건에도 화순출신의 梁漢黙이 관련되었다. 그는 3 · 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일한 전남인이었다. 이처럼 전라도 사람들이 매국노를 처단하려는 세 차례의 의열투쟁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2. 1907~9년 순천지역의 의병활동과 새로운 모색 1)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근거지 다소 주춤하던 의병항쟁이 되살아난 시기는 1907년 후반이었다. 이를 흔히 제3차 의병이라 한다. 1907년 7~8월 사이에 고종의 강제퇴위 · 한일신협약 · 군대해산 등과 같은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 터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으며, 전라도의 경우에는 더욱 거세었다. 사실, 1 · 2차 의병 단계에서 전라도 의병은 변변한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3차 의병은 단연 전라도 의병들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기삼연의 호남창의회맹소가 3차 의병의 불을 당기자, 전라도 각지의 의병들이 앞뒤를 다투며 일제와 투쟁한 것이다. 3차 의병이 크게 확산됨으로써 한반도는 전쟁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전국 방방곡곡의 산과 들이 모두 의병의 싸움터로 변한 것이다. 3차 의병이 활성화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해산군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예컨대, 서울에서는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계기로 해산군인들이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지방의 의병들과 합류하였다. 원주의 진위대에 소속된 特務正校 閔肯鎬 역시 해산군인 수백 명을 이끌고 의병에 나서 강원도의 가장 대표적인 의병부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으며, 강화 진위대의 군인들도 副校 池洪允을 중심으로 의병부대를 형성하여 경기도와 황해도를 무대로 눈부신 활동을 보였다. 전라도의 경우에도 鄭元集 · 秋琪曄 · 鄭哲和와 같은 해산군인들이 유배지를 탈출하여 의병에 합류, 두각을 나타내었다. 한편, 일반 민중들도 일제의 정치 · 경제적 침탈의 참상을 직접 겪거나 보았던 관계로 자발적으로 의병에 참여하였으며, 의병에 가담하지 않은 주민들도 의병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이로써 3차 의병은 전투역량을 크게 강화하여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각 지방의 의병들이 힘을 합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펼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데 3차 의병의 중심지는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단연 전라도였다. 1908~9년 사이에 전라도에서는 대소의 의병장들이 크게 일어났다. 3차 의병을 주도한 의병장으로는 1차 의병이래 계속 항쟁의 의지를 꺾지 않고 지켜온 의병장 기삼연 · 고광순 등도 있으며, 다양한 계층에서 새로운 의병장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金準 · 聿 형제, 金東臣, 全海山, 沈南一, 安圭洪, 李錫庸, 文泰瑞, 林昌模, 黃俊聖, 黃炳學, 梁振汝 · 相基 부자, 金元範 · 元國 형제 등이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의병장들이 적게는 10여 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도의 산과 강을 누비며 일제의 침략에 맞써 피어린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가을부터 고양되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까지 일제의 군경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처음에는 광주와 나주, 장성 등지에서 주로 대부대 단위로 활동하였다. 그후 일본군과의 잦은 전투를 치르면서 각 지역으로 흩어져 소규모 단위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남 동부지역으로도 자연스럽게 의병의 불길이 확산되었다. 특히, 순천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이 거세어졌다. 그것은, 의병의 활동에 유리한 깊은 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즉, 순천의 曹溪山을 비롯하여 광양의 白雲山, 구례의 智異山 등 높고 깊은 산이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서 의병활동의 입지적 조건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일찍부터 의병의 활동 무대로 널리 이름났었다. 지리산은 전남 · 전북 · 경남 지방에 걸쳐 있었으므로 자연히 세 지역의 의병들이 몰려들었다. 예컨대, 1907년에 남원의 양한규와 운봉의 박봉양 의병부대는 지리산을 배경으로 장기항전을 모색하였다. 또한 광양의병 수십명이 섬진강을 건너 지리산으로 들어간 것도 바로 이때였다. 지리산을 본격적인 유격기지로 활용한 의병장은 高光洵과 金東臣 등이었다. 무등일보 1995년 9월 27일자와 10월 11일자 「호남의병일백년」 참조. 고광순은 「蓄銳之計」의 일환으로 1907년 9월에 지리산에 찾아들었다. 그는, 지리산의 피아골이 장기항전을 대비하기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피아골은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으로 화개, 서쪽으로 구례, 북쪽으로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잡고 있는데다 사격에 능한 포수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어서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에 의병장 고광순은 피아골의 연곡사에 근거지를 구축하고서 砲手를 대대적으로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일제의 군경에 손색없는 전투역량을 축적할 계획이었다. 그는 「不遠復(머지않아 회복한다)」이란 세 글자를 쓴 軍旗를 세우고서 장기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지리산이 점차 의병의 기지로 변하자, 일제도 가만있지 않았다. 1907년 10월 17일, 일제는 연곡사의 고광순 의병부대를 섬멸하기 위하여 진해만의 重砲小隊, 광주의 1개 중대, 진주의 경찰 등 압도적인 병력과 우수한 무기를 동원하였다. 의병은 이들과 치열한 접전 끝에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하였다. 의병장 고광순과 副將 高濟亮 등 약 30명이 순국하였다. 일제의 군경은 연곡사 안팍을 모두 불사르고 물러갔다. 다시는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되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지리산은 여전히 의병의 기지로 이용되었다. 의병장 김동신이 주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충남 회덕 출신으로 전남북의 접경지대에서 활동하였다. 졸고, ꡔ大韓帝國時代 湖南義兵 硏究ꡕ(서강대 박사학위논문, 1993. 2) 제4장 참조. 그는 지리산 문수골의 문수암을 주로 이용하며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인적이 없는 곳에 산채를 지어 군량과 무기를 비축해서 영구적인 의병기지를 만들 생각이었다. 지리산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의병에 투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식기와 식량, 화약 등을 지원해주었다. 이에 일제는 산속 깊숙이 쳐들어와 의병진압을 구실삼아 千年古刹과 수많은 민가를 불태웠다. 당시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의 雲鳥樓에 살고 柳氏一家는, 불길이 여러날 하늘을 뒤덮어 그 정황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한편, 조계산은 순천에서 활동하는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되었다. 일제측은, 松廣寺와 仙巖寺가 자리한 조계산에는 의병의 출몰이 잦으며, 지형적인 조건에 의하여 의병을 진압하기 어렵다고 파악할 정도였다. ꡔ한국독립운동사ꡕ 9(국사편찬위원회, 1980), p.213. 조계산을 의병의 근거지로 이용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보성출신의 안규홍, 순천출신의 강진원과 조규하 등을 들 수 있다. 안규홍은 흔히 안담살이라 불려졌는데, 전남 동부지역을 휩쓴 전설적인 의병장이었다. 안규홍 의병에 대해서는 졸고, ꡔ대한제국시대 호남의병 연구ꡕ 제6장과 강길원, 「澹山 安圭洪의 抗日鬪爭」(ꡔ孫寶基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ꡕ, 지식산업사, 1988) 참조.
안규홍은 처음에 자신의 동료들을 데리고 순천에서 활동중인 姜龍彦 의병부대에 투신하였다. ꡔ전남폭도사ꡕ, p.137. 그가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형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분이 낮은 관계로 양반 유생의 의병 가담이나 재정적인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강원도 출신의 해산군인이 이끄는 강용언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나의 학위논문, pp.134~5. 당시 강용언은 순천의 조계산을 중심으로 활동중이었다. 선암사 뒷산인 조계산 정상부근에는 香爐菴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 강용언 의병부대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ꡔ暴徒에 관한 編冊ꡕ(정부기록보존소 소장, 문서번호 88-24, 1908), pp.862~5.
그러면 이들이 조계산에 위치한 향로암을 주요 근거지로 이용한 사실을 아래의 인용문을 통해 알아보자.
(1908년) 3월28일 오전7시 當署를 출발하여 정오에 쌍암면 선암사(당서로부터 5리)에 도착하였다. 同寺에서 舊曆 1월5,6일부터(양력 2월5,6일)경부터 비도를 은닉하고 있다는 내용을 포로의 진술에 의거하여 취조한 바, 비도 10여 명이 지난 양력 2월 24일 동사의 향로암에 來泊, 다음날 출발하였다가 재차 3월 15일경부터 항료암에 와서 날로 출입 (중략) 그들은 주지를 협박하여 신고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함. 향로암은 당시 주지가 절을 비웠는데, 본사로부터 험준한 길을 올라 약 1리의 조계산 중간에 있는데, 절벽에 의지한 천연의 요새로 주위에 인공의 성벽이 둘러진 조그만 절이다. 요해처로서 한눈에 아래를 내려다 보면 2리여를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으며, 山頂에 음료수가 나오고 연료 또한 풍부함, 비도의 隱家로써 가장 좋은 장소이다.(ꡔ폭도에 관한 편책ꡕ 88-24, 1908, pp.862~4).
안규홍과 강용언 등은 지형적으로 유리한 곳에 위치한 사찰을 그들의 근거지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측은, 이들이 선암사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향로암을 숙영지로 사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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