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확 사계절을 행정관료로 꽃피운 끝없는 생명력의 화신 1959 부흥부 장관 1973, 79 제 9대 10대 국회의원 1978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79 국무총리 1981 국정자문위원 1986 삼성물산 회장 1988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 1993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신현확 (申鉉碻 1920∼ ) 에 대해 경북 일대에서 신동으로 알려졌던 신현확은 1938년 봄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를 졸업 경성제대 시절에 그는 탁구를 잘하여 일본에 까지 학교 대표로 원정한 적도 있었다. 또한 그는 재학 시절 일본 고등문관시험(이하 고문시험) 도 함께 준비중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부친의 강력한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36년 동안 한국인이 일제 식민지 착취 기관인 조선 총독부나 일본 정부기관 그리고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가 된다는 사실은 직접 간접으로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지원하고 대다수 식민지민중을 억압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일제 기관의 관리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반민족행위 였고 용서 받을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였다고 단언할수 있다 고문 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다른 조선인 관리보다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는 다시말해 더욱 밀접히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에 관여할수 있는 계기가 확보 되는 셈이다. 대다수 식민지 민중이 지극히 곤란한 생황을 했던데 반하여 고문 합격자들은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보장 받으며 일제의 하수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당시 1930년대 초 자작농의 평균 수입은 544원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하는 평양 시민의 90%가 1천원 이하였던데에 비해 조선인 최고관리인 도지사의 연봉은 무려 5.350원 이나 되었고 고문 합격후 일정기간 수습을 거쳐야 하는 조선인 시보에게도 1년에 1100원 이내의 많은 금액이 지급되었다. 또한 고등 문관은 합격자 전원에게 관리 임용을 보장하는 임용시험이 아니라 고등문관에 나아갈수 있는 자격 시험에 불과 했고 고등문관인 주임관으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일제 당국자의 심사와 선발을 거쳐야 했다. 그러므로 일제 당국자에게 친일의 성향을 웬만큼 인정 받지 않는 한 고등문관으로 임용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고문의 3과 가운데서 당시 일본인들은 관존민비 사상이나 가치관 때문에 행정과에 합격하는 것을 제일 명예롭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조선 응시자들 역시 행정과 시험에 합격하여 일제의 관리가 되는 것을 영예로 생각 하였다. 이는 이 시험에 응시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생각없는 사람들이었는지를 그대로 나타내는 사실이라 하겠다. 어쨌든 어려서부터 경북지방에서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신현확은 1943년 경성제대 시절에 일본 고문 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부친의 소망을 풀어 주었다 또한 그는 한국인 고문 합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본토 동경 중앙관서의 하나인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총독부에 방침에 따라 현해탄을 건너간 그의 8.15 해방 당시 직책은 군수성 군수 관리관 이었다 말그래로 전시체제하 일본군의 중요한 군수 물자를 관리하는 자리였다 이는 신현확이 그만큼 일제의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으로 고통 받고 있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눈감아 버린 그의 행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수 있다. 3.15 부정 선거 관련 사실을 발뺌하기에 바빴던 부흥부 장관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서 3년을 보낸 신현확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4,5개월쯤 전에 휴직하여 휴양을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그는 장택상을 중심으로 모인 칠곡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낙동회란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져 나갔다. 그러던 중 장택상의 권유에 의해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취임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관료로서 첫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상공부의 과장으로 출발한 신현확의 그후 관운은 날로 빛을 더했다. 1954년 전기국장으로 승진하고 광무국장을 두루 맡아 상공부 내에서 실력자 국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장 시절 그는 경무대로 여러차례 불려가 직접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세부적인 정책 사항들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 시대 관리의 행정업무 경력에 대한 평가와 실무처리 능력이 인정되어 1957년 부흥부 차관겸 외자청장 서리를 맡게 되었고 1959년 3월 에는 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흥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부흥부는 지금의 경제기획원의 전신으로 장기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국가 경제를 재건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주로 대미원조자금을 동원하는 것에 업무를 집중하였다. 당시 미국의 팽창 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원조는 동북아 지역에 대미 종속국가를 만드는 일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소위 원조 경제로 얘기 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 원조는 새로운 종속 국가를 형성해 나가는 지름길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는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어 자립할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채 파행성이 점차 심화 되었다. 한편 4.19 직후 신현확은 국무위원 일괄 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부흥부 장관으로 일한지 꼭 11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그러고는 3.15 부정 선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곧 구속되었다. 5.16 군사 정부가 1962년 펴낸 방대한 분량의 <한국혁명 재판사> 제 2집 에는 그와 관련된 사건을 부정 선거 원흉 국무위원 사건 이라고 명명 하고 있다. 당시 검찰측은 신현확을 포함하여 부정 선거 관련 국무위원 8명에 대한 공소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하여 전국 공무원을 총동원 구사할 목적으로 각 도마다 기관장회의 또는 행정 협의회를 조직 강화하여 운영케 하고 중앙 각지청간에 국장급 17명으로 구성되는 지방행정사무 연락조정협의회를 개최도록 합의하여 매월 3일에 동 회를 개최하고 또한 최인규가 고안한 친목회의 조직에 공명합의한 후 최인규로 하여금 내무부 행정기구를 통하여 공및 시.읍.면 단외로 이를 조직 운영케 하여 전국 공무원의 일반 유권자에 대한 선거 운동을 적극 권유하고 둘째 자유당 입후보자의 95% 내지 99%의 득표율이 예상되자 피고인등은 득표수를 적정 소멸 조절할 것을 상호 공모하고 최인규에게 일임하여 전국 각 도지사 및 경찰국장에게 이승만 80% 이기붕70% 내지 80%로 적정 소멸 조치할 것을 치인규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이러한 검찰측 공소사실에 대해 훗날 신현확은 회고를 통해 부인 하고 있다.나중에 사형 집행당한 최인규 내무와 곽영주 경무관 같은 사람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우리 같은 일반 국무위원들은 부정 선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국무위원으로서의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나 할까...... 재판 받는 과정에서 비로서 정말 그랬군아 하고 알게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이야 어디 그렇게 생각해 줍니까......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말아 달라.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다시 장관이 된다면...) 지금껏 해오던 일을 똑같이 해 나가겠다.이러한 그의 회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히 되짚어 보아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한나라의 장관직에 있는 사람이 그 정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도 없이 단지 정책 기술자(?)의 입장에서만 자신의 친정 행위를 평가 할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성격에 대한 그의 인식이 그 정도라면 거슬러 올라가 일제 시대의 그의 행위 자체도 개인적 판단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가리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는 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안정을 빙자한 개발독재의 선두주자.신현확은 4.19 혁명이후 2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후 김성곤의 쌍용 그룹과 함께 사업에 손댄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신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73년에 김성곤의 추천으로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한 신현확은 1975년말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됨으로써 경제 정책의 총수이나 확대론자로 지목되는 남덕우와 경제장관회의에서 국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1978년 12월 드디어 신현확은 이승만 독재 정권 시절 부흥부 장관의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겸 부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다시 유신 정권과의 결탁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었다. 흔히 신현확을 안정론자라고들한다. 즉 1970년대 한국 경제를 성장 발전시켰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서 벗어나 내수시장 확대 긴축 금융정책 등을 통하여 인플레를 억제시키자는 것이 이 안정론의 본래적 내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한 축은 농민을 볼모로 하는 농업희생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품귀현상이 빚어지는 고추 차 콩 쇠고기 등을 무제한 수입하겠다는 정책인 것이었다. 긴축 안정 정책을 위해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더라도 1970년대 성장 정책의 그늘에서 지내왔던 농민을 배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더억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안정론의 또 다른 한 축은 대기업 즉 재벌 위주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출이 부진한 기업체는 그 품목을 내수 시장에 판매할수 있게 하여 기업의 활로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기업의 여심 규모를 재벌 위주로 확정하게 되어 중소기업에서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재벌 위주 정책의 배경에는 이전의 쌍용 그룹 계열 기업체인 동해 전력의 사장겸험이 숨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신현확은 안정을 빙자한 개발독재의 선두 주자라 할수 있다. 과도 정권의 과도한(?) 총리12.12 군부 쿠테타로 정승화파에 대한 수청을 성공시킨 전두환의 신군부는 곧바로 내각 개편에 개입하고 자기 파벌을 중심으로 군내부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지만 당장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군부의 재등장을 원하지 않고 민주주의적인 제도와 절차의 확대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실세를 장악한 채 자신들의 권력을 제도화 할수 있는 있는 길을 암암리에 모색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행정부의 실세로는 신현확이 등장했다. 유신 헌법에 따라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하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최규하 총리가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나흘뒤인 12월 10일 신현확은 예상대로 신임 대통령 최규하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 되었다. 10.26 사태 후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이 일국의 재상인 국무총리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위기에 처한 국가의 부름을 회피할수 없었다. 라는 자기 합리화의 표현을 썼다. 최규하의 대통령 승계와 더불어 부총리에서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긴 신현확은 제 1 국화국 이래 역대 정권에서 거듭 중용되어 온 관록과 경북권의 인맥으로 구성된 정.재.관 관계의 핵심 엘리트들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10.26에서 5.17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대통령 이었던 최규하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정치 정세에 대한 의사 표현을 함으로써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면서 신현확은 민주화를 실종시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 하였다. 즉 신현확은 1980년 1월 이후 잇달은 신당설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무엇 보다도 중요하게는 정부 주도 헌법 개정론을 앞세워 국회와 정면으로 충돌한 장본인이었고 이원적 집정부제의 적극적인 주창자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현확은 최규하 과도 정부내의 민간인 강경파로서 기본적인 정치 노선에 있어서 신군부 세력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는 일본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현확이 유신은 필요했던것 이라고 중장한 데서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 사후 급속히 진전되는 한국의 민주화를 어떻게 보면 좋을까 라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신혁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치 사회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한창 구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신 체제는 국방력의 충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어떻든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정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방력의 충실과 경제 성장의 단계에 응하여 박 대통령 서거라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민주화는 진전되었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금후도 적극적으로 민주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까지의 것을 단숨에 바꿔 버린다는 것은 현실 파괴이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따럿 종전의 것을 잘 분석하여 계속 할것은 계속 하고 개선 할 것은 개선한다는 유연한 태도로 일보 전진할 생각이다. 또한 3월 11일 아주 및 미주 지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여 행산 치사에서 신현확은 안보 우선 경제 우선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 정치 민주화 일정에 쏠리고 있는 전국민적인 관심의 초점을 바꾸려고 기도 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없던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보 문제가 작년에 비해서 금년에 조금이라도 호전되었느냐 하면 오히려 위험성은 더 커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고 또 경제가 작년보다도 국제 경제 정세를 위시해서 국내 사정도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국내에 정치 변혁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이 지금 겹쳐져 있습니다 이러함 어렵움을 당했을때 우리가 어디에다 최대의 중점을 두느냐는 것을 정부로서는 한번 생각해 보어야 된다고 믿습니다. 지금 정부는 최대 중점을 안보에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경제에 두고 있습니다. 셋째는 정치 변혁내지 발전에 두고 있습니다. ... ... 정치는 우리 국내에서 우리 사람끼리 모여서 논의 해서 어떻게든 해나갈수 있는 문제입니다. 안보는 그렇지 못합니다. 경제도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총력을 기울여도 될까말까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안보와 경제 이것이 최대의 문제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범위 안에서 우리가 가능한 힘을 모아서 빨리 정치 부분도 발전을 시킨다는 식으로 중점을 잡는 것이 불가피 하다고 생각 합니다. 이상의 발언은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으며 낡은 유신 체제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는 마당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를 지닌 사람의 발언으로 볼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민의를 외면하고 낡은 유신 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나선 신현확의 발언에 대해 야권 일반이 과도 체제 지도자가 도도히 흐르는 민주주의 물결을 역류시키려 든다 며 일제히 성토하고 나선것은 물론이었다. 공화당 조차 신현확의 발언데 반발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신현확은 자신의 발언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서 문제된 발언을 공개하고 나섰다. 이처럼 신현확은 유신 독재체제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국민의 압력에 밀려 유신 헌법을 철폐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지 않을수 없게된 상황에서도 새로운 억압적 체제의 수립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역사의 대세로 받아들여졌던 독재 철폐와 민주화의 진척은 불투명하게 되었으며 더욱 오리무중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정치상황을 빗대어 안개 정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민주화의 전망이 날로 어두워져가는 가운데 정국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정국의 불안과 정부의 의중을 의심케 한 또하나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것이 바로 신현확 총리의 외신 인터뷰 였는데 그는 뉴욕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개헌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 wu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신현확의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행보로 인해 당시 민주화 진영은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과 더불어 신현확의 퇴진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저녁 이화여대에서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은 제 1회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다음날인 17일 오푸 경찰의 기습으로 중단될때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 회장단은 5월 22일 까지 비상계엄 해제 연내 정권 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 5월 20일까지 전두환 퇴진등과 더불어 신현확의 퇴진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민주화 세력외에도 공화당과 유정회까지도 조속한 계엄해제와 문제가 되고 있는 전두환 신현확으로 대변되는 극우 강경세력의 인사 조치를 요구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5월 20일 부터 열릴 예정인 국회에서 계엄해제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져 있었으며 종교계 언론계 학계 등에서도 잇달아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이 나오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때 5월 20일 이후가 되면 극소수 극우 강경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들이 하나로 연합할 가능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이로써 신군부 세력은 명분상으로도 완전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5월 20일 국회가 열리게 되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및 신현확에 대한 인책 요구가 강력해질 것은 필연적으로 내다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강경파는 5월 17일 토요일 자정을 기해서 계엄 확대를 단행 하기에 이른다 경찰이 이화여대를 급습하기 직전인 19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국지휘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각급 학교 휴교조치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 하기로 결정됐다. 회의를 마치고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회성 계엄 사령관은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들의 결의를 보고했고 신현확은 주영복과 이희성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신군부의 압력을 받아들인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비상계엄안을 의결하였고. 당일 자정을 기해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날 비상국무회의는 완전무장한 정복 군인들이 복도에까지 도열한 삼엄한 분위기 아래서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결정이 군부의 일방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만 볼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난 1988년 청문회에서 압력 여부를 묻는 질문에 신현확 총리가 5.17 계엄확대 조치는 필요한 조치였다.고 강변 한데서도 볼수 있듯이 행정부 내 강경파들도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행정부 내 강경 인사들의 정상에는 신현확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도 정권의 과도한 총리 였다고 할까 이러한 신현확의 사고와 정치 행각은결과적으로는 5공 독재의 등장을 도운것이 되었다. 결국 과도 정부의 시간 끌기 로 말이암아 1979년 연내에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80년 상반기의 선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 5월 피를 뒤집어 쓰고 신군부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자 최규하-신현확의 과도정부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10년 가까운 유신 독재 탓에 척박할 대로 척박해진 이땅에 민주화의 길을 닦아 놓고 명예스럽게 퇴진하지 못한데 대해서 신현확은 커다란 책임을 저야 마땅할 것이다.불행한 역사의 앞줄에 서있었던 산증인.나의 인생이 화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그럴지 모르나 태풍 같은 격변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태풍의 눈에 휩쓸려 들어가 고역을 겪곤 했지요 자유당 정부 수립후 관계에 들어간지 5년만에 장관이 되었을때 4.19가 일어나 징역을 갔었습니다. 3년 가까운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살고 나오니 박 대통령이 다시 나와 일해달라 라고 청을 해 관계에 다시 몸을 담게 되었는데 공화당 말기 그 혼란의 와중에서 또 고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이 터질 때 마다 그 현장에는 내가 있었으니......위의 말들은 화려한 인생 역정에 대한 신현확 자신의 평가다. 그런데 그의 이런 말들에는 문제가 있다. 역사를 보는 눈이 그렇고 마치 자신이 역사의 피해자인 것처럼 고역을 당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가 고역만 겪었다는 그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진보의 시기요 발전의 시기였다. 8.15 해방 4.19 혁명이 그랬고 1980년 서울의 봄이 그 발전과 진보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마다 그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방으로 돌리지 못하소 스스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 역사는 분명히 혼란의 모습으로만 비춰지진 않았을 것이며 그 자신이 고역만 치렀다고 이야기 할수 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그를 고역을 치르게 한것 중에서 대부분은 그 스스로가 택한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때 앞의 이야기 처럼 그는 우직한 성품만을 지니지는 않았다. 신현확의 처세술과 관련하여 몇가지 언급할것이 있다. 그가 일본 본토 군수성에서 전시물자를 관리하던 군수관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8.15 해방을 두달남짓 남겨 두고 그는 동연 귀국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당시 일본 지방에서 가만히 전황을 보니 일본은 곧 망할게 틀림없었지요. 마침 한 열흘 한국으로 출장할 일이 생겨 현해탄을 건넜지요. 그길로 나는 몽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에 돌아가질 않고 아버님을 모시고 대구에 눌러 앉아 버렸습니다. 라고 회고한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일제 관리 출신들의 치세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80년 안개 정국이라 불렸던 시절 그는 총리로 임명되자마자 유신 정권과 함께 생사 고락을 같이 했던 공화당을 탈퇴해 버리는 발빠른 행보를 보여주어 정치인들조차 놀라게 했다. 이러한 그의 치세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때 8.15 해방이후 한때 자숙하는 그의 모습도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한 방편이었다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 한편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이후 총리직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지속하는 가운데도 그의 집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각계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경북 출신의 후배들로 알려진다. 워낙 그의 위상이랄까 영향력이 예사스럽지 않은 까닭일까 그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그럴싸하게 장안에 퍼져나가곤 했다. T.K 마피아 대부란 지칭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을 보여 준다. 그는 박동진 외무장관를 유임시켰으며 문태갑을 비서실장에 황선필을 공보비서관으로 발탁해서 썼다. 이러한 연유로서 그를 일컬어 경북고 20회 동기 동창인 김준성 전 총리 정수창 전대한상의 회장과 더불어 경북고 인맥 삼웅이라고 불리어 진다. 일제 시대 이승만 독재 박정희 유신 독재 전두환 독재의 사계절에 걸쳐 두루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했던 신현확 그리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TK 마피아 대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신현확 그는 왜곡된 우리 역사의 단편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 인물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변혁의 시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갚아야 할 빚인 것이다. |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메모 :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아! 조선일보 기사 - "대역범인 이봉창… 천황폐하 무사환궁" (0) | 2006.04.07 |
---|---|
[스크랩] [민영휘]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0) | 2006.04.07 |
[스크랩] 중국역사상 10대 거부(巨富) (0) | 2006.04.07 |
[스크랩] 독도는 조선 땅, 대마도도 조선 땅? (0) | 2006.04.06 |
[스크랩] 살가도, 슬프지만 따뜻한 흑백 다큐사진 (0) | 2006.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