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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민영휘]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장전 2006. 4. 7. 20:29
민영휘 ( 閔泳徽, 1852∼1935 )
       가렴주구로 이룬 조선 최고의 재산가
 
1877년 문과 급제후 주일공사, 평안감사, 독판 내무부사 등 역임
 
탐관오리의 대표, 조선 최고의 재산가
 
민영휘의 원래 이름은 민영준(閔泳駿)이다. 1852년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여흥 민씨 세도가의 한 사람이었던 판돈녕부사 민두호(閔斗鎬)의 아들이다. 18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하여 주일공사, 평안감사, 강화유수, 독판 내무부사 등 관력이 화려하였다. 그는 민당(閔黨)의 거두로서 으뜸가는 탐관오리였고 임오군란 때는 난군의 습격으로 가옥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갑신정변 때는 청병을 불러들여 일본당을 구축하고 민영환, 민영익, 민응식, 민형식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 갑신정변 후 민영익이 상하이(上海)에 가서 돌아오지 않자 1880년대 후반기 그를 대신하여 원세개와 깊이 결탁하여 궁정에서 전권을 행사하였다. 그는 갑오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에 토벌을 요청하였다가, 청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삼청동 별저에서 칩거하던중 개화파 정권에 의해 전남 영광의 추자도로 유배되었다.
 
그 후 민영휘는 유배지에서 탈출, 평양으로 잠행하여 청군 부대에 은신하고 있다가 중국으로 도망하였고, 이듬해 일본측의 농간으로 대원군측의 이준용과 교환조건 형식으로 대사령을 받아 귀국하였다. 이 후 정치적 야심을 버리고 한거하였으며, 대한천일은행 설립에 관계하기도 했다. 1906년에는 휘문(徽文) 의숙을 세웠으며 1910년 '합병'시 자작을 수여받았다. 사실 그는 민비의 친족으로서는 촌수가 먼 편이어서 세도를 부릴 지위에 있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민씨 척족의 거두로서 집권하였다는 것은 그의 비범한 재간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민영익을 따라 다니다가 그 총명함으로 민비의 눈에 들어 결정적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민씨 척족의 거두자리에 올라선 민영준은 외척의 권위를 남용하여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족(閔族)에 3도둑이 있는데, 경성에는 민영주(閔泳柱)요, 관동에는 민두호(閔斗鎬), 영남에는 민형식(閔炯植)이라 했다.
 
민두호는 바로 민영준의 아버지로서 일명 민쇠갈구리(閔鐵鉤)라 불렸으며 민영주는 그의 종부(從父)였다. 민두호는 젊었을 때 살림이 곤란하여 수원에서 자리장사를 하였다는데, 아들 민영준이 출세한 뒤로 그 아들보다 더 심하게 돈긁기에 전념하여 쇠갈구리라는 별명을 듣기에 이른 것이다. 민영준 또한 재물에 눈이 밝아 단박에 조선 갑부가 되었다. 갑오 이전 이미 조선 갑부로 중국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물론 그 돈은 전국 부민의 재산을 박탈해서 모은 것인데, 평안감사 수년에 민영준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고종에게 헌납하였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갑오 을미년간에 추수한 곡식이 13만 석 정도였다니까 매년 수입을 10만석으로만 잡아도 년간 50만 원씩, 그것을 갑오 이후 2, 30년 간 계속했으니 총 1000만 원 정도에 이르는 것이다. 여기서 한 푼도 자선이나 보시, 공익 사업에는 쓰지 않았으니 고스란히 남은 돈만 해도 5, 600만 원 내외는 될 것이고, 그 밖에 각종 부동산과 상하이 회풍(匯豊) 은행에 예치해 놓았다는 몇 백만 원의 은행저축 등을 모두 합치면 정확한 정도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일제 시기에도 조선에서 제일 가는 부자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1930년대 일시적으로 총 재산이 4000만 원을 넘었다고 하니, 당시인들이 일본의 재산가 스미모토(住友), 미쯔비시(三菱), 미쓰이(三井)에는 못 미친다 해도 제2류는 된다고들 수군거렸다 한다. 이런 그의 재산은 도대체 어디에 쓰여졌는가. 회사에 투자한 것도, 뜻 있는 사업에 의연(義捐)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수전노(守錢奴)처럼 끌어안고만 있다가 사후에 첩실 소생 아들간에 재산 싸움만 일으켰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야는 그것을 반대하여 자결한 이가 여러 명이었고 유생들도 매일 소청(疏廳)에 모여 조약 반대 상소에 한창이었다. 당시 민영휘가 가장 관직이 높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소수(疏首)로 삼고자 이름만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그 이름을 빌려주는 것조차 거부하였다. 마침내 민영환을 소수로 삼았고 민영환은 그날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조약 반대의 뜻을 표했다. 민영휘가 갑오 이전 전권할 당시 백성의 재산을 탈취한 것이 전후 거만금이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빼앗긴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어 혹은 재판소에 고소하고 혹은 그의 집에 뛰어들어 칼을 어루만지면서 돌려 달라고 하였다.
 
또한 각 신문은 그의 죄상을 날마다 게재하여 퍼뜨리니, 민영휘는 이를 근심하여 변호사에게 많은 뇌물을 주고 빼앗긴 사람의 소송을 맡지 말도록 하였고, 또한 신문사에 애걸하여 그의 악행을 숨겨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문사에서는 숨겨 달라고 했다는 말까지 게재하니, 민영휘는 어찌할 수 없어서 가족을 이끌고 모두 상하이에 들어가려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수전노로부터 버림받는 아들
 
그에게는 불행히도 정실 부인의 자손은 없고 형식(衡植)이 적손 양자였으며, 첩소생으로 대식(大植), 천식(天植), 규식(圭植)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적장자 민형식은 민가의 전통을 깨고 궁한 사람을 돕고 기의(氣義)를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민형식이야말로 자기 집의 많은 재산을 능히 올바르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민영휘가 그를 믿지 못하여 철저히 금지하였으므로 단돈 한푼도 얻어 쓰지 못했고 부자지간에 거의 천륜을 끊고 사는 정도였다.
 
민형식이 1907년 나인영, 오기호 등의 을사오적 암살계획에 자금을 대게 되었다. 민형식은 최익진(崔翼軫:호위국 향관餉官)에게서 나인영 등의 모의를 알고 지폐 1천 4백환을 제공했다. 그러나 형식은 돈이 없었기 때문에 그 처로 하여금 언니에게 빌어오게 해서 익진에게 제공하였는데 그 언니는 바로 이완용의 며느리였다. 나중에 이완용이 며느리를 꾸짖으며 "너는 시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돈을 빌려주었느냐" 라고 했다 하니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고 한다.
 
민형식의 재판날 영휘는 사람을 보내, 형식이 원래 부귀하게 자라 고초를 참아내지 못할 것이니 애매하게 질문하여 죄를 면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일본경관에게도 부탁하였다. 일본경관이 최익진에게 "너는 일찌기 형식에게 돈을 꾼 일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익진이 '형식과 대질하게 해달라' 한 후 큰 소리로 말하기를 "민형식, 내 말을 듣거라. 대장부 마음이 당연히 청천백일 같아야 하거늘 이 일로 누구를 속이려하는가. 우리 모두 죽으려 하는데 무엇이 막겠는가" 라고 하였다.
 
 형식이 옳다고 말하였다. 심문을 받을 때 형식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나라의 적신을 토벌하면 의로움이 그 안에 있다. 내가 어찌 피하겠는가' 하고 사실대로 답하니 법관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 하였다고 전한다(鄭喬, {大韓季年史}).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학부협판에 이르렀고 일찍부터 문학하는 선비들을 좋아해서 이기(李沂), 정교(鄭喬) 등과 어울렸으며 최익진으로 인해 해도에 귀향간 후에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민형식은 일제 시기에도 재정난에 처한 조선일보에 자금을 대었다가 채무를 갚지 못하고 파산선고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즉, 1932년 당시 조선일보 사장 유진태(兪鎭泰)가 자금사정을 호소하자 형식은 자기가 중간에 나서서 1만 8000원의 약속어음을 발행, 돈을 꾸어 주었다. 그러나 그 돈을 약속한 날에 갚지 못하여 결국 법원으로부터 파산선고를 받았다. 그 아들 민병주와 며느리 이길남까지도 함께였다.
 
채권자들은 이들을 법원에 고소하면 백만장자 민영휘가 그깟 얼마 안 되는 돈쯤 당장 변제해 주리라 믿고 소송하였으나 민영휘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그아들, 손자, 손부를 법정에 세웠다고 한다. 그렇게 지키려한 재산도 그 사후에는 다만 많은 첩실 소생 아들들간의 재산 분쟁의 씨가 되고 말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민형식은 그에 비하면 아버지 민영휘만큼은 재산은 없으나 돈을 의로운 데 쓸려고 무던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친일파로 입신하는 데 쓰인 자금들
 
반면 민영휘의 서장자 민규식은 적장자 민형식과는 달리 허랑방탕하고 사악하였으며 날로 노는 비용이 천금에 이르렀으나 민영휘는 그것을 문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민영휘가 가장 신용하여 재산증식의 모든 실권을 그가 쥐고 있었고 민씨왕국 재산의 수호자로 자처하였다.
 
그는 일제 시기에는 동일은행(전 한일은행) 두취(頭取)를 지냈고, 깍쟁이, 안달뱅이 소리를 들어가며 재산관리에 철저한 독재자였으면서도 자기 집은 인사동에 아방궁을 짓고 교외에 또 별저를 지어살며 호의호식하였다. 민대식은 1935년 민영휘 사후에 아버지의 유산 중 노른자위 재산을 모두 다 차지하고서도 아버지의 장례는 너무 초라하게 치러 세인의 지탄을 받았다.
 
백만장자의 집에 장례비가 모자라서인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장례비 절약분 2만 원을 경성부에 기부하여 사회사업에 보태어 쓰라고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하필 장례비를 절약해야만 기부금을 낼 처지도 아니었겠지만, 아무 명목 없이 일제에 돈을 바치기는 뭐하고 마침 아버지 장례비 절약을 핑계로 일제에 아부할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경성부(京城府) 사회사업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로 2년 후인 1937년 '군용기 경기도호 헌납기성회'의 집행위원으로서 박흥식*, 원덕상, 한상룡* 등과 함께 군용기 4대 헌납 계획에 참여하였던 걸 보면, 그 사회사업의 내용 또한 가히 짐작할 만하다.
 
둘째 아들 민천식은 일찍이 사망하였고 그 미망인과 민영휘의 장녀가 재산상속분을 모아 법인을 조직, 영보빌딩을 경영하였다. 셋째 민규식은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참여하였다. 그는 일제 말기 김연수, 박흥식과 함께 조선임전보국단에 기금 20만 원을 제공한 조선인 3인 중 1인이었다. 민영휘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재산은 결국 그 아들들이 친일파로 입신하는 자금으로 쓰였던 것이다.
 
■ 서영희(서울대 강사·한국사)
 
참고문헌
{半島時論}, 1917. 7.
{別乾坤}, 1932. 5, 1933. 6.
{三千里}, 1936. 8.
{批判}, 1938. 10.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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