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아내는 물질을 부러워하긴 해도 그 욕구를 꾹 누르며 산다. 마주치는 아내의 눈빛이 문득 슬프다

장전 2018. 10. 24. 07:57


빈처(貧妻)/ 성선경


아내는 내내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옷장서랍 칸칸을 뒤집어 먼지를 풀풀 날리고 
나는 못 본 척 조간신문을 뒤척거리며
현진건을 생각한다 
그때도 그랬을까 슬금슬금
해거름과 함께 저녁 안개가 몰려들면 
아내는 더욱 궁상스러워지고
남편은 더욱 음흉스러워져서 
토요일 좋은 날의 한나절을
힐끔힐끔, 못 본 척 그랬을까 
그러나 다시 눈길을 돌려 아내를 보면 
변변한 옷가지 하나 마련해 주지 못한 죄책감보다 
저놈의 여편네가 왜 저래 
공휴일을 맞아 아버지의 농번기 
한철 농사일을 거들겠다고 고향 가는 길 
무슨 수선을 저리 떠나 싶어
죄책감보다 아내의 행위가 더 미워져 
망할, 빌어먹을, 나쁜, 못된, 따위의 
수식어를 옹알거리다 신문을 덮으며 고개를 돌리면 
문득 마주치는 아내의 눈빛이 슬프다 
제철마다 화려하진 못해도
한 가지씩 표나게 해 뒀더라면 
이런 날, 가을 벌판의 들꽃처럼 한들거리며 
혹은, 가을의 단풍잎처럼 화사하게 꾸미고서 
빠각빠각 구두코를 반짝이며 다녀올 수 있었을 텐데 
현진건, 생각하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지 
전당포의 옥양목 저고리라도 찾을 게 있었지 
중절모라도 삐딱하게 쓸 수 있었지 
아내는 내내 힐끔힐끔, 나는 못 본 척 
마주치는 아내의 눈빛이 문득 슬프다.

- 시선집 『돌아갈 수 없는 숲』 (문학의전당,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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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거리를 장만하려고 전당포에 잡힐 모본단 저고리를 찾는 아내를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오늘 낮에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한성은행에 다니는 T가 찾아와 자기의 처에게 줄 양산을 샀노라고 자랑하자, 아내의 눈에는 부러워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이를 본 ‘나’는 갑자기 불쾌해집니다.” 

현진건의 소설 <빈처>의 한 대목이다. 


아내는 물질을 부러워하긴 해도 그 욕구를 꾹 누르며 산다. 

수입 한 푼 없는 무명작가인 자신을 믿어주고 남루한 살림에도 표 나게 투정부리지 않는 아내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는 주인공의 심리가 잔잔하게 그려져 있는 단편소설이다. 

1921년 발표된 <빈처>는 사실주의 소설의 개척자로 현진건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준 출세작이자 자전적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대상의 품목은 달라졌겠으나 가난한 아내가 부유한 아낙에 대해 갖는 부러움은 예나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나보다. 명품 옷과 핸드백과 승용차와 아파트는 여전히 열등감을 자아내게 하는 기재들이다. ‘가을의 단풍잎처럼 화사하게 꾸미고서 빠각빠각 구두코를 반짝이며’ 나들이하고 싶지 않은 아내가 어디 있으랴. 그렇다고 맑은 가난이 탁한 부유보다 낫다는 청빈의 정신적 높이를 내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럴 때 가련한 남편의 허약한 모습은 숙맥으로서의 잠재된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사회적 가치의 대립으로 인해 초래된 갈등은 자칫 가정의 행복을 깨뜨리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는 부부갈등이 낭만적으로 해소되어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지만 현실에서는 애정만으로 가난의 아픔이 치유되기란 쉽지 않다.


시인은 현진건을 떠올리며 생의 비루함을 애틋하게 감싸고 따뜻이 어루만져 사랑으로 치환해내는 힘을 믿는다. ‘빈처’에 빗대어 슬쩍 자신의 처지를 눙치기도 하고 어르기도 하면서 각성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현실을 관용하는 솜씨가 엿보인다. 한편 빙허의 삶과 죽음에서 술을 빼지 못한다. ‘술 권하는 사회’도 있지만 술에 얽힌 일화는 수두룩하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때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다. 신문사를 그만두고서 자하문 밖 지금의 부암동에서 생계를 위해 양계를 치는데 이때 오며가며 찾아오는 문인들과 어울려 달걀요리에 병든 닭을 잡아 안주삼아 밥 삼아 술을 엄청 마셔댔다고 한다. 울적한 빙허를 달래려는 술친구들로 말미암아 닭의 개체수가 나날이 줄어 결국 양계는 실패하고 만다.


이후 지금의 선물환 방식인 미두사업에 손을 댔지만 그마저 실패 쫄딱 망한다. 낙망과 폭음에 의한 장결핵으로 1943년 4월 25일 사망하는데 그의 나이 44세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상화 시인도 세상을 뜨고 만다. 그의 호 빙허(憑-기댈 빙, 虛- 빈 허)처럼 삶의 공허함과 세상에 대한 한탄을 술로 덮어버리고 떠난 것이다. 지난 주말(10월20일) 출생지인 대구에서 빙허를 기리는 문학제와 함께 10회 현진건문학상시상식이 열렸다. 


현진건은 우리나라 근대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문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대접해서는 안 될 인물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유일한 혈육인 따님(월탄 박종화의 며느리)이 생존해 계신 게 그나마 위안이다. 문화적 역사적 가치에 대한 홀대가 어제 오늘, 빙허 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더는 문화의 폐허지대가 생겨나지 않길 바란다.


권순진


이미지: 사람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