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칼날을 세우는 동안 숫돌도 몸이 깎여 나간다. / Franz Xaver Winterhalter

장전 2018. 9. 25. 06:30


칼날을 세우는 동안 숫돌도 몸이 깎여 나간다.

부엌에서 쓰는 크고 작은 칼이 무디어지면 어머니는 할아버지께 칼을 갈아달라고 하셨고, 
그러면 할아버지는 장독대에 갖다놓은 숫돌과 나무로 만든 숫돌 받침을 가져오라고 내게 시키셨다. 
슥슥 칼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하얗게 살이 드러나는 칼날의 모습은 가뿐함과 신선함을 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검은 때를 벗고 제 빛깔을 되찾으며 드러나는 그 예리함, 
베어야 할 배추며 무며 고구마며 이런 것들의 살 속을 파고드는 부드러운 감촉, 
할아버지는 그런 것을 가져다 주셨다.
나는 낫이나 칼을 그렇게 산뜻한 물건으로 바꾸어주는 숫돌을 들어 옮기면서 
작지만 묵직한 숫돌을 늘 대단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쇠보다 단단하고 쇠를 갈아서 다시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제 용도에 맞게 쓰일 수 있게 만들어주니 
어찌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는 거기까지만 생각했지 칼이나 낫을 예리하게 벼리어주는 동안 숫돌도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쇠를 그냥 반짝반짝 빛나게 해주는 요술을 부리는 게 아니라 제 몸도 닳아 없어지면서 칼날을 세워주는 것이었다. 
무딘 연장을 날카롭게 바꾸어주는, 쇠보다 단단해 보이는 숫돌도 보이지 않게 제 몸이 깎여져 나가는 아픔을 견디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도종환의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