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불신의 왕국]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정치적으로 두 쪽이 나 있다. 나는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한 직후에 비교적 진보적인 사람들이 모이는 한 컨퍼런스에서 그들의 정신적 공황상태를 볼 수 있었다. 미국적 가치의 기반이 무녀지고 있다는 그들의 우려는 진지한 것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지배하는 Keynote Speech를 마이에미에서 들으며 미국에 지식인에게 드리워진 참담한 무력감의 현장을 지켜 보았다.
우리나라도 탄핵 이후에 나라가 정치적으로 두 쪽이 나 있다.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분열이다. 그리고 한쪽이 더 처절하게 몰리고 있는 중이다. 촛불의 승리자들은 그 기쁨을 자제할 줄 모른다. 태극기의 패배자들은 그 분노와 좌절감를 극복할줄 모르고 있다.
우리의 현실이 미국보다 심각한 것은 그 정서적 정치적 갈등의 와중에도 미국의 사회제도는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다는 것이다. 우리처럼법치를 의심하지 않고, 의회의 기업이나 사회가 권력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또한 미국의 국력은 외부의 영향으로 나라가 위태로와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다. 그들은 다음 선거에서 다시 승부를 겨눌 수 있다고 믿고 있고 우리의 정치적 소수는 다음 선거에 대한 희망마저 암울하다. 정치적 소수의 선택을 담아줄 정당구조가 뿌리째 흔들리고 불신 받고 있다.
우리는 그미국과 같은 뿌리 깊은 사회적 자본을 갖고 있지 않다. 기업은 정부를 두려워하고, 법치의 전제인 사법부나 공권력이 법과 인권의 규범에 따라 작동한다는 믿음도 적다. 언론, 특히 방송은 정권에 의해 착착 접수되어도 국민은 그것을 당연시 여긴다. 미국에서는 교사 노조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애들에게 마음대로 세뇌시킨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즉 정치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힘이 그렇게 크지 않다. 우리는 권력이 모든 것을 장악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런 절대권력을 부채질하고 있다. 자유를 위해 피를 제대로 흘리지 않은 국가의 업보일지도 모른다.
이 불신과 분열의 시대에 우리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할 것인가? 그리고 헌법 질서에 의해 선택된 권력을 부인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하고 비판할 것인가?
미국에서 신뢰를 전공한 철학자이자 저자인 Martha Nussbaum은 학생들이 트럼프를 찍은 사람들은 불신하고 배척하는 현상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견해를 달리 할수 있어야하고, 비록 아주 강하게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마저도 그래도 존중하고 신뢰하여만 한다. 이는 그들마저 당신처럼 좋은 뜻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 내 폐부에 예리한 칼처럼 찔러 들어온다. 나도 한국의 갈등의 일부 아닌가? 이 저자도 책을 쓰면서 자신도 불신의 문제의 일부라는 자성을 했다.
나에게 이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돌을 던진다. 나는 페북에서 무시하던 그들의 돌팔매 질을 되돌려 주기 시작하고 있다. 그만큼 내가 불안하게 느끼고 짜증을 내고 있다는 현상이다. 나도 가끔 내가 왜 이 갈등의 한 복판에 서게 되었는지 자문한다.
나는 정말 비정치적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정치가 아니라 논리를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을 지적하다가 어느새 정치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어 가고 있다. 정치인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권력이 목표가 아니라는 변명을 믿어주는 사람도 적다. 한국은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빨아 들이는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정치적 견해를 사회에 실현하려면 정치권력이 필요한게 하닌가하는 무력감과 회의감에 빠진다.
나는 아래 글을 읽으면서 내가 Nussbaum과 같은 여유가 없는 이유를 묻고 있다.
그것은 이 사회의 지성에 대한, 제도에 대한 믿음의 차이다. 국회, 언론, 사법부, 그리고 국민의 집단지성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희망을 봐야 한다. 신뢰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이 사회와 이 국민들이 찟어지게 가난하고, 북한의 전쟁의 위협을 딛고, 세계 중심에 한번도 서 본적이 없는 변방의 역사에서 지금 세상의 주류의 일부가 된 역사의 저력에 대해 우리는 긍정의 힘을 믿어야 한다. 오늘도 내용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내게 침묵을 강요하는 돌맹이를 던지는 철부지들을 보면서 낙담하가다고 우리 역사에 대한 신뢰의 다짐을 하게 하는 아래 글을 읽는다.
서로를 개념없고 개돼지라고 하는 순간 우리는 역사의 패배자가 될 것이다. 나도 그런 거친 언어에 익숙해 가곤 한다. 그 때마다 페북을 접을까도 생각한다. 나의 마음의 평화는 많이 깨어져 있다.
적어도 역사가 평온한 괘도를 이탈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세월호 사태부터 내 마음에 평안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사회적 갈등을 갈무리 못하는 우리의 정치제제의 극단적 무능을 보았고, 경제를 논리와 이성이 아니라 구호와 정치적 선동으로 이끌어 가는 세력들을 보았다. 이들에 편성해서 학자들이 사실을 왜곡하고 선동질에 앞장서는 거짓과 그 거짓이 권력을 가져다 주는 반지성을 내가 속한 학계에서 너무나도 분명하게 보았다.
노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가 아니라 권력의 뒤에서 자신의 노력의 정당한 대가보다 더 큰 것을 달라는 도덕적 타락을 보기 시작했다. 그 타락이 소수의 기득권에서 온 국민으로 확대되어 가는 사회의 타락이 정도를 더해가고 있는 현실을 나는 보고 있다.
그것이 나를 분노하게 하고 있고, 분노는 불안과 마음의 평화의 상실을 동반한다.
우리는 서로 존중하고 다시금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권의 우매함과 무능을 국민간의 갈등이 아니라 한 정권의 무능과 우매함으로 가두어 둘 수 있을까?
비가 와서 우중충한 일요일 저녁에 드는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는 이 실존적 질문이 하늘의 비구름만큼이나 시커먼 빛깔로 내 마음을 덮고 있다.
신뢰가 유실되는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공포가 아니라 희망이라는 이 글을 읽으면서도 희망을 부르지 못하는 나는 가끔은 나이가 들어도 울고 싶은 저녁이 있다. 아래 글을 읽고나니 오늘이 그런 날이다.
"You need to be able to disagree, even strongly, with people and still respect and even trust them. This means thinking them people of good will who are trying, as you are, to solve probl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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