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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연안부두 피난 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후 두번째의 일이다.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 벨리니 - 방황하는 은빛 달이여

장전 2016. 3. 28. 09:07



그해 봄 / 도종환


그해 봄은 더디게 왔다
나는 지쳐 쓰러져 있었고
병든 몸을 끌고 내다보는 창밖으로 ...

개나리꽃이 느릿느릿 피었다. 생각해보면
꽃 피는 걸 바라보며 십 년 이십 년
그렇게 흐른 세월만 같다
봄비가 내리다 그치고 춘분이 지나고
들불에 그을린 논둑 위로
건조한 바람이 며칠씩 머물다 가고
삼월이 가고 사월이 와도
봄은 쉬이 오지 않았다
돌아갈 길은 점점 아득하고
꽃 피는 걸 기다리며 나는 지쳐 있었다.
나이 사십의 그해 봄

- 시집『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문학동네,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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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지우 시인의 ‘꽃피는, 삼천리금수강산’이란 시에 보면 온갖 꽃들이 온갖 곳에서 다 피고 있다. 진달래는 ‘파주 연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고, 백목련은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고, 철쭉은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고, 라일락은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고, 안개풀꽃은 ‘망월동 무덤 무덤에’ 피고, 수국은 ‘순천 송광사 명부전 그늘에’ 피고, 그 뭣이냐 칸나는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고, 아무튼 그 밖의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핀 무궁화까지 총망라하여 숨 가쁘게 다 핀다.


요긴하게 꼭 피어야할 곳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서 이제 곧 삼천리금수강산을 이룰 것이다. 그 가운데 ‘미아리 점집 고갯길에’ 헤프게 핀 개나리와 수유리 묵은 동네 돌축대 아래로 길게 늘어진 개나리는 내가 서울로 올라오기 전 해마다 보았던 것과 영락없이 같은 꽃이었다. 사람 떠나고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초가 곁에 엉망진창으로 피어있던 꽃도 개나리였고, 내 나이 열다섯 즈음 대구 방천 뚝방에 도회로 줄행랑 친 계집아이처럼 눈부시게 피었던 꽃도 노란 개나리였다.


..


내게도 개나리 피는 걸 보며 흐른 세월이 늘 환하진 않았다.


권순진



**


지금은 메워서 광주 시청이 들어섰다. 어려서 내가 살던 계림동 경양방죽이다.

봄이면 방죽 길 따라 천방지축으로 개나리가 피였다.

겨울이면 때로는 얼음 지치던 아이가 얼음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철따라 개나리는 피였다.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고 발만 구르고 있던 때 맨몸으로 얼음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던

아이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도 개나리는 피었다.


결국 구하지 못하고 얼음 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를 보며 통곡하던 엄니의 모습을 보면서도

철이 돌아오면 개나리는 모질게도 태연하게 생명을 이어갔다.



다음 해  개나리가 처녀 귀신처럼 머리를 풀어제치고 길 따라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날

죽은 아이를 위한 진혼제가 열렸다.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었다

굿이 휘모리로 돌아설 즈음 나는 방죽에서 웃고 서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미소띤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마터면 나는 아이 따라 방죽으로 들어갈뻔 했다. 곁에 동생이 없었더라면 ..





이후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방죽가에 개나리를 모두 파내고 진달래를 심고 싶엇다

울부짖던 아이의 부모님의 모습이 핏빛으로

물든 응어리진 한을 외면하고 피는 도도한 노란빛의 개나리가 싫었다.



초등학교 3학년을 보내던 어느 봄날 나는  무지하게 아팟다.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여서 더 서러웠다.


부산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황급히 오셔서 내 곁을 지키셨다.

나는 펄펄 끓는 손으로 어머니의 손을 잡고 울엇다.

마침 돈암동 신흥사에 사시던 무당 아주머니도 오셨다.

그 무당 아주머니가 나를 유심히 지켜보시더니

어머니께 무어라고 단단히 경고성 주의를 주시고는 돌아가셨다.


광주에 있던 가족 친지들이 다 모였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밖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몸을 날려 뛰쳐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결사적으로 나를 부등켜 않았다. 어머니였다

가족 몇이 발버둥 치는 내 손 발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이상하게 나는 전혀 아프지도 않았고 힘도 솟고 몸도 가벼웠다.

솜털처럼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픈 사람이 아니었다.


"어머니 문 밖에 누가 있어요" "나를 부르고 있어요"

"어머니, 어머니 절 보내주세요"


할아버지께서 황급히 오밤중에 의사를 불러오셨다,. 주사를 맞고 나는 잠이들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어머니께서 한 잠도 뭇주무시고 내 곁을 지키고 계셨다

 이때 무당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그 날 저녁 너 밖으로 나갔더라

그리고 그 부르던 사람을 따라 갔더라면 넌 죽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께서 기다리시는 부산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후

어머니와 함께 곁을 지키던 큰 누님이 나에게 일러주셨다

그때서야

나는 무당 아주머니가 어머니께 그리도 간곡하게 경고성 주의를 주셨던 내용을 알았다.


인천 연안부두 피난 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후 두번째의 일이다





집에서 가까운 서초동 몽마르트 공원 초입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꽃 길을 걸으며 난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그 무당 아주머니는 어떻게 미리 알 수가 있었을까"


지금도 불가사의하다



                   

      



Vaga luna che inargenti

벨리니 / 방황하는 은빛 달이여

Vincenzo Bellini (1801 - 1835)

Renata Tebaldi, soprano






Vaga luna che inargenti

Renata Tebaldi, sopr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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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초 벨리니는 이태리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로서

지금도 이태리의 지폐에 그의 초상이 그려져있다.


그의 예술적 영역은 어디까지나 오페라이지만

수 십 편의 가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의 가곡들은 모두 그의 오페라 작법의 테크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높은 품격을 가지고 있으며, 선율미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벨리니의 음악들은 지극히 선율적이지만

그 단순한 선율들은 그가 테크닉이 부족해서 라기보다는

그가 이미 단순함과 여백이 미덕임을 알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것이다.


이 곡은 뜨거운 열정에 괴로워 하는 남자가 밤에 아름다운 달빛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괴로운 사랑을 달과 함께 나눈다는 내용이다.



Vaga luna, che inargenti
Queste rive e questi fiori
Ed inspiri agli elementi Il linguaggio dell’amor;
Testimonio or sei tu sola Del mio fervido desir,
Ed a lei che m’innamora
Conta i palpiti e i sospir.
Dille pur che lontananza Il mio duol non può lenir,
Che se nutro una speranza,
Ella è sol sì,
Ella è sol nell’avvenir.
Dille pur che giorno e sera
Conto l’ore del dolor,
Che una speme lusinghiera Mi conforta nell’amor.

예쁜 달은 은빛으로 물들인다
달은 이 해안과 꽃들을 은빛으로 물들인다
그리고 사물들에게 사랑의 언어를 불어넣어 준다;
나의 타오르는 욕망에 대하여 지금 너에게만 말한다,
그리고 너에게 말한다 내가 사랑에 빠졌다고
심장의 박동과 한숨을 세어보라.
그리고나서 그녀에게 말하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슬픔은 진정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내가 희망을 먹고 산다고,
그녀가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렇다,
그녀가 나의 미래에서 유일한 사람이라고.
또한 그녀에게 말하라 밤낮으로
내가 슬픔의 시간을 세고 있다고,
그녀의 사랑에 대한 희망이 나를 달래주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