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신영복 교수.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2년에 암투병 끝에 세상 떠난 신영복 선생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 전달한 지식인

 

깊은 성찰 담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큰 반향
‘우리시대의 스승’ 찬사… 삶 자체가 드라마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즐겁게 만들어라”

 

 

“책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생각하면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다.”

 

지난해 4월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라는 부제를 단 그의 마지막 저서 <담론>에서 그렇게 얘기했던 신영복 교수가 2년여의 암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랫동안 인간과 생명, 평화와 공존의 참 의미를 전달해 온 교육자이자 저술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강의를 들으며 삶의 좌표를 가다듬었고 많은 독자들이 그의 책을 읽으며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전달받았다. 그는 또한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진 글씨와 그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부박한 일상 속에서 생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는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서화작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7월 만해문예대상을 받은 그를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는 그렇게 기렸다.

 

 

하지만 그의 삶은 기구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출생해 1959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에 진학한 그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서클의 구심점이자 지도자로 활동했다. 숙명여대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강의하던 1968년 27살 나이에 그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사형수가 됐고 20여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됐다.

 

2008년 7월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통일혁명당에 가입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통혁당은 정식으로 결성되지도 않았다. 서울시당 준비모임이 꾸려져 있었다는 얘기를 나중에야 들었다. 나는 학생운동 차원에서 대학선배가 주도한 모임에 적극 참여했는데, 그 선배 삼촌이 북한에도 갔다 온 모양이었다. 당시 <청맥>이란 잡지에 진보적 소장학자들이 글을 많이 썼는데,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학생운동 차원이었다.”

 

 

재판 때 검사는 초등학교 꼬마 6명을 위해 지어준 노래가사 속의 “우리는 주먹 쥐고 힘차게 자란다”의 ‘주먹 쥐고’조차 “국가 변란을 노리는 폭력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폭력의 준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몰아세웠다고 그는 말했다.

 

20여년의 기나긴 감옥생활이 그에겐 사회학과 역사학, 인간학을 제대로 배우게 해 준 진짜 대학이 됐다.

 

 

무기수로 감형된 뒤 1988년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한 그가 평범할 수 없었던 체험과 깊은 성찰을 특유의 문장에 담아내 출간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또 다른 신영복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교도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내던져진 충격 속에서 어떻게든 당시 생각을 기록해 두면 언젠가 잃어버린 세월을 기억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긴 글은 물론이고 짧은 글조차 통제된 집필 도구와 장소, 시간 등으로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이번 달엔 이런 얘기를 한번 써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한 달 내내 그걸 생각하면서 거의 완벽한 문장 형태를 머릿속으로 미리 정리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그렇게 해서 좁은 엽서 한 장에 빽빽이 적힌 글들로 채워졌다. 우리 사회의 사유의 폭과 깊이를 한 차원 높였다는 평을 받으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심도 있는 담론들의 등장은 이른바 ‘87년 체제’가 만들어낸 세상변화를 실감하게 만든 하나의 징표였다.

 

사면복권을 거쳐 2006년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까지 대학원 강의를 하면서 <담론> 출간하기까지 25년간 그의 삶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진 10여권 저서와 명강의로 풍성하게 채워졌다. ‘우리시대의 스승’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의 삶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다. 2008년 50만부가 넘게 팔린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출간 20돌 기념판을 냈을 때 그는 이렇게 자평했다.

 

 

“가끔 독자들을 만나 들은 얘긴데, 힘든 상황을 겪은 분들이 내 글에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일부에선 신영복의 이력에 비해 사색의 전투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를 했고 또 한켠에선 엄청난 전투성이 있다고도 했다. 여러 층위의 반응들이다. 대체로 인문학적 가치, 인간적 고뇌, 인간적인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이 그런 호응을 불렀다는 평이 많다.”

 

2015년 펴낸 <담론>에서는 사형수가 됐을 때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고 썼다.

 

 

“겨울 독방에서 만나는 햇볕은 (…)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었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다.”

 

 

그것이 그가 ‘죽지 않은 이유’였다면,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깨달음과 공부였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요,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형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성찰이며, 그것을 토대로 현실을 바꾸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실천이라고 했다. 세계인식은 왜 필요한가?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실천적 주체가 사람이다.” 그에게 공부의 궁극적 목적은 한마디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인 중심부”가 아니라 “변방(변방성)”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공부의 시작은 “우리를 가두고 있는 완고한 인식들을 망치로 깨뜨리는 것”이며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행”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 끝은 ‘가슴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신 교수는 강조한다. “우리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톨레랑스)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이어질 것이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해 논의할 것이다.” 이 ‘관계’야말로 신 교수의 인문학 특강 주제요 <담론>의 핵심주제였고 만년의 화두였다.

 

 

그는 “관계 없이 인식 없다”며 관계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존재는 고립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비로소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정체성이란 내부의 어떤 것이 아니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적극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형성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객관적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관계의 조직은 존재를 생성으로 탄생시키는 창조적 실천이다.”

 

 

<논어>의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를 흔히 알려진대로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하다”로 읽지 않고 이렇게 고쳐 읽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이 공자의 화동(和同) 담론에 대한 독특한 해석은 한반도 통일론에도 적용됐다. 신 교수는 정치적 통일(統一)이 아니라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을 통해 남과 북이 폭넓게 소통하고 함께 변화하는 화화(和化)로서의 통일(通一)이 돼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은 한민족만의 과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문명사적 과제”라고 했다.

 

 

이런 화동 개념과 연관시켜 톨레랑스(관용)의 한계도 지적했다. “우리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공존하자”는 톨레랑스는 근대사회 최고 수준의 가치지만, 그것이 자기 변화로 이어지지 않으면 ‘은폐된 패권논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관용과 톨레랑스는 결국 타자를 바깥에 세워 두는 것이다. 타자가 언젠가 동화되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강자의 여유이기는 하지만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탈주와 노마디즘은 아니다.”

 

가을에 나뭇가지 끝에 하나 남겨 둔 ‘씨 과일’을 가리키는 ‘석과불식’(碩果不食)에서 그는 최고의 인문학적 가치를 찾아냈다.

 

 

“씨 과일은 새봄의 새싹으로 돋아나고, 다시 자라서 나무가 되고, 이윽고 숲이 되는 장구한 세월을 보여준다. 한 알의 외로운 석과가 산야를 덮는 거대한 숲으로 나아가는 그림은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차다. 역경을 희망으로 바꾸어내는 지혜이며 교훈이다.”

 

나무가 뼈대를 드러내며 잎을 떨어뜨려 뿌리를 따뜻하게 덮는 이 석과불식의 요체를 그는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곧 뿌리라는 것인데, 바로 신 교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87년 체제’가 무너지고 ‘보수반동’의 시대가 다시 시작된 2008년 인터뷰 때 그는 말했다. “20년 전 6·29 선언 이후의 민주화가 불완전하고 불철저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사회변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운동의 구심, 지도부를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 진보적 정당들까지 등장했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를 키워 온 민주, 변혁 역량을 아우를 수 있는 탄탄한 구심체를 꾸리는 일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를 ‘불철저한 민주화’ ‘뿌리 깊고 완고한 보수적 구조’ ‘국제금융자본의 진입과 수탈’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인조반정 이후 지금까지 서인-노론으로 이어진 정치적 지배그룹의 교체가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권도 언론과 자본, 법조, 사회문화적 토대 등을 장악한 강력한 보수 권력집단으로부터 사실상 배제되고 소외당했다고 봤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 지배 엘리트 재생산 구조가 절대적으로 미국 의존적인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패권질서에 우리 사회가 올인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이진순 교수와의 인터뷰

 

 

(
▶‘담론’ 펴낸 신영복 “소소한 기쁨이 때론 큰 아픔을 견디게 해줘요”)에서는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말했다.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신영복의 그림 사색 보기
▶“모두에게 큰 스승이자 등대” 신영복 교수 별세 소식에 SNS 추모 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