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스크랩] 1987년 6월 정국과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한기

장전 2015. 9. 24. 08:12

서애 류성룡(柳成龍)      잠곡 김육(金堉)          기당 이한기(李漢基)

   (1542~1607)                 (1580~1658)               (1917~1995)

 

 

 

대한민국 국무총리 이한기 박사

-1987년 5~6월의 고비에 정권의 총리아닌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 총리-

이한기 전 총리 비서관이 본 6·29선언의 막전막후(幕前幕後)

 

 

 

 

 

최고권력자에게도 할말은 했던 재상(宰相)들.

 

 

-1592년 임진왜란으로 평안도 의주까지 몰리자 피난하는 조선조정과 임금(선조)는 여차하면 백성과 강토를 버리고 중국 명(明)나라로 들어가려하는데,

 

당시 영의정 서애 류성룡선생은 결사코 "대가大駕(임금이 탄 큰 가마)가 한발자국이라도 우리땅을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단호히 선조(宣祖)임금의 명나라로 들어가려는 망명시도인 내부(內附)를 결사코 반대해 선조의 명나라로의 망명(내부)을 저지했다. 이후 임진,정유난이라는 전국(戰局)수습에 애쓰셨다.

 

 

-조선효종조 영의정 잠곡 김육(金堉)선생은 수많은 양반,지주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大同法)시행을 위해 임금에게 할말은 하고, 백성에게 피해가 가는 정책에는 단호히 안된다고 하였고,


"백성은 먹는것을 하늘로 삼는다".食以爲天

는 신념으로로 한평생 백성들의 곤궁함을 덜어주고 잘살게 하는 제반 민생정책(民生政策)의 핵심인 대동법(大同法)시행에 헌신하신 잠곡 김육(金堉)선생


-우리 현대사의 이한기 전 국무총리는 1987년 그 정국(政局)에서 어린학생들과 국민들을 보호하고, 이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법학을 전공한 학자답게 최고력자와 정권에 할말을 한 분이시다.

 

-한 집안이 어려우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한 나라가 어려우면 어진 재상(宰相)이 그립다고 하는데,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서애 류성룡, 잠곡 김육, 기당 이한기 박사와 같은 어진 재상이 더욱 그리워지고 생각난다.

 

-또한 최근 문제화되는 학교폭력사태를 보면 참스승으로서의 이한기 박사님이 더욱 생각이 난다.


 

평생 학교에 몸담았기에 손자같은 대학생 박종철군, 이한열군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軍출동으로 야기될 수많은 인명피해를 누구보다 염려하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한 이한기 박사...

 

단호히 군출동을 반대하고 민주적절차에 의거한 정국수습방안을 전두환정권에 제시...

 

 

아래글은 1987년 당시 이한기 국무총리 비서관이던 윤영전씨의 글입니다. (필자 注)

 

 

 

 

 

오늘은 좋은 날, 차는 무료'

 

 

이 문구는 87년 6월 29일 08:30분에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6·29선언을 발표하고 난 후 소공동 '가화 다방' 앞에 서툰 글자로 써서 붙여놓은 글이었다. 세상에 차를 무료로 준다니…. 다방 주인의 심정은 어떠했기에 이런 표현을 했을까?



그해 1월 14일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의 고문치사 사건의 사유를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경찰의 발표로부터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전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의 '종철이를 살려내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와 데모가 증폭되었다.



억울하게 아들의 목숨을 잃은 아버지는 종철의 영혼을 남한강에 뿌리면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하며 울부짖는 모습에 국민들은 함께 분노하고 애도에 잠겼다. 아들을 잃은 참적의 슬픔을 어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아픔이었다.


▲ 고 박종철 열사 20주기를 맞이한 지난 1월 14일 고인이 사망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 건물에 고인의 대형 걸개그림이 걸려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당시 이한기 총리서리, 6.29선언 내용 건의



이번 주에는 6월의 많은 역사 중에 마지막으로 6.29 선언이 있던 날이 있다. 역사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으로 본 역사의 현장을 기록한다. 18년 전, 유월민주항쟁에서 얻어낸, 6.29가 사실상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었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며 차기 대통령 후보가 발표했었다. 일명 ‘속이구’ 선언이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던 항쟁이 어쩌면 혁명으로 가나 했다. 그러나 6.29선언으로 멈추고 있었다. 6.29선언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일보 전진했다는 평가도 있다.

 



6.29선언이 발표되던 날, 필자(윤영전)는 총리 공관에서 시국 수습을 위한 국무위원들과의 조찬간담회 장소에 있었다. 이(한기)총리가 소집한 조찬간담회를 진행 중이던 08:30분이었다. 5.18 광주민주항쟁 7주년 추모미사를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있었다. 미사가 끝나면서 김 신부는 중대 발표로 ‘그해 1월 서울대 박군 고문치사사건에 관련자 2명의 경찰관 외에 3명이 추가로 관여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폭로함으로써 박 군 고문치사 항의와, 4.13호헌초치로 들 끊는 정국에 기름을 부어 넣는 정국이었다.



더구나 박종철 군 고문치사를 “탁자를 탁치니 억하고 숨졌다”는 정부발표와 함께 2명의 경관이 고문에 가담했는데 이들이 구치소에서 ‘자신들 말고 또 다른 관련 경찰이 있는데 모두 덮어쓴 것은 억울하다며, 역사에 두고두고 죄인이 될 두려움에 양심고백을 했다. 특히 2명의 고문경관 가족에게 각각 1억원의 통장을 만들어 총리공관에서 전하면서 더 이상의 관련자가 없다고 은폐를 요구했다’고 털어 놓았다고 구체적으로 신부가 밝히고 있었다.



이에 정국은 벌집을 쑤신 듯 혼란에 빠지고 정권의 도덕성 문제가 대두되고 학생과 시민들과 국민들이 부도덕한 정권퇴진과 책임자 처벌 등 항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민심수습을 위한 개각’을 국무총리와 내무장관 안기부장 등 소폭이었으나 비중이 큰 개각을 단행했다. 이때 이한기 총리는 민심수습개각에 따라 5.26일 총리취임 요구를 받고 고사했으나 신문지상발령으로 취임하여 나도 측근보좌관으로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다.



민심수습을 위한 신내각은 이 총리의 첫 기자회견에서 “박 군의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정부의 도덕성 회복에 최선을 다하겠다.”면서 집무를 시작했다. 그러나 불타오르는 정국은 5월27일 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대오를 정리하고 있었다. 6월에 접어들어 각 대학마다 더욱 가열된 항의집회와 시위는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6월9일에는 연대정문에서 학생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동안, 경찰관의 직격최루탄이 이한열 학생의 가슴에 맞아 중태에 이르렀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과 4.13호언조치에 따른 학생과 국민들의 분노와 항의가 계속된 가운데 수칙을 위반한 최루직격탄을 이한열 학생가슴에 쏴, 분노가 가열되었다. 헌법재취운동본부는 6.10대회를 기점으로 민중항쟁의 기치를 높이 들어 집요한 공권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성공회를 비롯한 전국적으로 시위는 물론 자동차의 경적과 교회의 종소리를 일제히 울리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민정당은 잠실체육관에서 노태우 대표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대회를 열고 있었고 저녁 6시에는 남산 힐튼호텔에서 후보 축하리셉션을 개최하고 있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를 막았고 학생과 데모대원들은 6.10대회를 기점으로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처음 5백 명이 천명으로 불어났고 소위 넥타이부대가 낮 점심시간과 퇴근 후에 조직적으로 헌법쟁취 정권퇴진을 주장했다.

6월11일 밤9시에 총리공관으로 대통령이 전화를 했다. “나 대통령이요. 총리는 명동성당에 농성하면서 해방구를 설정하면서 정권타도 구호를 외치고 있다는데 알고 있습니까?” “엄연한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데 해방구를 설정하다니 말이 됩니까. 당장 해산시키고 보고 하세요.명령이요”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전두환)는 항상 그랬다. 자신의 지시나 말을 하고는 일방적으로 끝내는 습관으로 익숙해져 있는 전화 통화였다.



총리는 전화를 받은 뒤 대통령 명령을 받고 걱정이었다. 명동성당에서 강력한 항의농성을 하며 정권투쟁을 하고 있다는 보고는 들었으나 해방구 설정은 얘기는 처음이었다. ‘해방구’는 일종에 치외 법권적인 설정이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서 당장 처리하라는 명령은 공권력을 투입하라는 말이었다. 그가 화를 낼 수 있겠지만 이미 공권력을 남용하여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박 종철 군을 고문 치사한 행위는 무어라 말 할 수 있는가. 적반하장의 실상이었다.



나는 걱정하는 총리에게 사태수습을 위해 보고를 했다. 그간 명동농성 사태의 실상과 공권력을 투입한다고 사태해결이 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악화만 불러온다. 특히 함세웅 신부와 사제들과 수녀들, 김수환 추기경과 신도들이 공권력인 경찰이 명동성당에 진입할 때 그대로 방치하겠는가? 아마 강력한 저지와 충돌은 뻔하고 이로 인해 정부와 가톨릭은 갈등만을 유발해 350만 한국 신자와 전국 성당에서 항의기도는 뻔하다. 더구나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세계 7억의 신자들에게 한국 명동성당 사태에 기도를 올리자고 한다면 세계적으로 우리나라는 어렵게 된다고 보고했다.



가톨릭 신자인 나의 진지한 보고를 듣고 총리는 방법론을 물었다. 우선 안무혁 안기부장과 고건 내무장관의 의견을 나누시라 했다. 대통령직속인 안기부장을 쉽게 부를 수 있느냐고 했으나 비상시국에 상관없다고 했다. 양쪽에 통화한 결과는, 자신들도 명령을 받았으나 해결 대안이 없다면서 문제는 명동성당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강한 좌경세력들이 집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듭 말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공권력으로 해결은 지난해 10월 건국대 학교 내 자주대오 학생투쟁 때와 같은 결과만을 낳을 뿐이라고 말하고 내일 아침 일찍 조찬을 하면서 의견을 교환했으면 하고 건의 했다.



다음날 아침에 공관에 모인 안기부장 내무장관과의 숙의는 공권력으로 강경진압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에 공감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전두환대통령은 밤중에 자신이 명동성당에 가서 진두지휘하겠다며 마치 군대식 행동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아들이 말리고 측근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조찬을 끝내고 청사로 출근을 하는데 청와대에서 긴급안보회의가 소집되었다. 총리와 안기부장 국방 내무 국가안보가 참석한 회의는 처음부터 전두환대통령은 노했다.

 



▲ 6월항쟁 당시 고 이한열 추모식 때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군중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국무위원들, 생각해 보시오.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 ‘해방구’를 설정했다니 말이 됩니까? 법대로 하시오. 이렇게 정부가 밀리다가는 큰코다칩니다. 약하게 보이면 절대 안 됩니다. 그런데 무슨 방법이 있습니까? 이총리께서 말씀해보시요” 했다. 그동안 지시 일변도의 얘기만 했는데 왜일까? 예전에 없던 일이었다. 아마 누군가 보고를 했던 모양이다.

 

 

이총리는 교수처럼 일목요연하게 “천주교와 적대관계를 갖는 게 좋지 않습니다. 만약 공권력으로 명동성당 농성을 푼다면 더욱 꼬이는 정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총리는 무슨 방안이 있소” “네, 방안은 대화로 푸는 방법뿐입니다.” “대화요? 그럼 오늘부터 3일간 여유를 줄 테니 총리 말씀대로 대화를 해보시오. 그러나 3일안에 안되면 강경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대화를 시작했다. 함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과 추기경과도 대화가 가능한 국무위원들이 대화를 나서기로 했다. 그런데 명동농성 투쟁단은 쉽게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수차례에 걸쳐 개진한, 일단 농성을 풀고 요구를 관철하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약속한 3일이 다가오자 안기부와 내무 경찰은 초조했다. 막바지 다섯 차례 투표 끝에 겨우 해산 안이 통과되어 6.14일 아침 계성초교 버스3대와 일반버스 2대로 농성 자들을 태웠다. 총리는 경찰에 해산때 연행해가는 일이 없도록 약속하라고 했는데 결국 이곳저곳 해산시키면서 주모자를 선별 연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의 이런 수법을 이미 감지한 지도급 인사들은 버스에 타지 않고 끝까지 투쟁한다며 농성하다 개별로 명동을 떠났다.



국내언론은 물론 미국의 뉴욕타임지는 “한국의 명동성당 사태가 한 철로를 향해 마주 달리는 열차가 충돌 일보직전에 멈추었다. 한국도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었다. 대통령도 총리에 수고했다고 말했지만 그러나 그 후 더욱 가열해진 데모와 항의집회는 전국적으로 수백만 명이 동참하고 더욱 가 열찬 반정부 시위를 계속했다.


계속되는 시위는 최루탄 공격에 맛선 학생들은 화염병과 돌로 대결했다. 전국에서 차출된 경찰과 전경들이 진압에 나섰으나 경찰이 밀리고 있었다. 총리와 나는 데모대열이 휩쓸고 간 뒤에 서울시내거리를 돌아보면서 동정을 살펴보기도 했다. 국민의 민심이 동요되고 있음을 보았다.



총리는 당신이 알고지내는 대학총장과 교수 그리고 사회지도급 인사와 점심과 저녁을 함께하면서 이 난국을 타개하는 대안을 얻고자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나는 여론을 가감 없이 보고하였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국민이 원하는 대로 가야합니다. 내손으로 뽑는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화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수시로 보고하면 당신이 판단하고 총리실 간부회의에서는 거침없이 정부가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당시 국무위원 어느 누가 감히 정부가 항복해야 한다는 대안을 말하는 일은 “고향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다느냐” 하는 격이었다. 총리는 그 몫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서울 시경을 방문한 이한기 총리>



이럴 때마다 윤 비서실장은 간부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곤 했다. 그는 대통령의 측근이었기에 대통령에 불리한 정책이나 언사를 하는 각료들에 언짢아했다. 물론 총리도 대상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위난에 처해도 오직 대통령에 충성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은 총리와 나는 동감이었다. 역사를 두려워해야 하는, 그런 사명으로 자신들의 직책을 수행해야 한다. 대통령 승계서열 1위인 국무총리의 책무는 중요했다. 국무회의에 다녀오면 이총리는 늘 군 출동이 임박했다고 걱정이었다.



대통령은 “국무위원들! 뭘 걱정해요. 법대로 하시요. 내 뒤에는 군들이 모두 지원을 하고 있으니 염려 마시오.” 하면서 오히려 국무위원들을 안심시키면서 군 지지를 은근히 과시했다. 총리는 국방장관에게 군 출동의 진의를 물어보곤 했다. 군 출동의 시간 소요는 16시간 이지만 이미 출동한 군 동원은 6시간이라고 했다. (이한기)총리의 군 출동 걱정에 나는 여의도 현장에 갔었다. 무려 1개 사단규모의 병력이 와 있었다. 명목은 10월1일 국군의 날 훈련예행연습이라 하지만 보통 1개월 전에 연습인데 4개월 전이라니 군 출동이 이미 되었음을 확인했다. 수도기계화사단도 명령만 떨어지면 2시간이면 서울에 출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군은 이미 출동이 되었다. 4월부터 비상상태에 들어간 군이었다. 이런 위험한 군 출동 동향에 나는 총리에게 간곡하게 말했다. “총리님, 군 출동은 절대불가입니다. 7년 전 오월광주가 아직도 치유가 되지 않았는데 또 군이 나온다면 나라는 망합니다.” 총리도 동의해 주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반짝 계엄을 염두에 둔 듯 했다. 그러나 군이 단 하루를 출동해도 과연 그해 9월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개최하기 어렵다. 군이 나온다고 과연 정부 편에 설지도 의문이고 국민들이 가만있겠느냐고 설명했다.

 



충분히 이해하면서 “그러나 계엄을 선포하는 국무회의 부서를 하라면 어찌하나”라는 말에 나는 그랬다. “그때는 몸이 불편해서 병원에 입원해버리죠” 총리는 “병실까지 총칼 들고 찾아와 부서하라고 하면 어찌하나” “그래도 안하셔야 합니다. 만약 계엄에 서명하시면 제2의 이완용이 되십니다. 그래도 하셔야 합니까?” “그럴 순 없지, 어찌 제2의 이완용이 된단 말인가?” 이렇게 15일부터 18일까지 노심초사하셨다. 미국에서 워커가 다녀가고 이총리는 노 대표와 긴급회동을 하고 군 출동 저지에 최선을 다하시며 당신이 직접 대통령에게 직언을 해야 하나 명동성당 건도 있어 노 대표에게 총리의 뜻이라고 보고해 달라고 했다.



노 대표는 청와대를 다녀와 군 출동을 거두었다고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총리님, 대통령이 수용해 주었습니다. 이제 군 출동이 없으니 푹 주무시지요.” 총리는 나에게 “윤군! 군 출동 안하기로 했다네. 이제 잠 좀 자세” 했다. 또 한 중대한 사안이 해결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국의 시위는 더욱 가열되었다. 18일 총리 담화는 군 출동을 않기로 한 대신 민심동요가 없기를 대통령을 대신해 발표하고 있었다. 마지막 문단에 앞으로 시위를 계속하면 엄단하겠다는 문구에 국민들로부터 질책의 전화와 편지가 여러 차례 왔다. 심지어는 부도덕한 정권에서 잘 하려고 노력해봐야 욕만 먹으니 빨리 사임을 하라는 직설적 충고도 있었다.



사실 총리 직을 고사했는데도 청와대는 신문지상을 통해 일방적으로 발령을 받았다. 오랜 지병도 있었고 신경을 써야하는 위기의 정국혼란에 하루라도 사직을 하고 싶었다. 발령 받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지만 물러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기회만 있으면 사표를 제출하겠다고 하시기에 기회를 보자고 건의했다. 총리에 연연하지 않아 사심 없이 국정에 임했기에 일거일동이 진솔했다. 이제는 국민평화대행진이 있는 날이었다. 대규모 시위는 전국적이었다.



총리는 안가에서 노 대표를 다시 만나 당신께서 취합한 현실타개책인 발상의 전환을 강력하게 구상하였다. 다시 총리실 간부회의에서 솔직하게 말하고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정국을 운용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니까 6.29 선언의 내용과 같은 건의사항 이었다. 나는 현대사회연구소 정국수습해법을 받아 총리에게 보이고 소각했다. 그 내용은 6.29선언 내용보다 리얼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어차피 정치적 결단은 대통령과 당정간의 합의였다.



적어도 7월초에는 그 선언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노태우 후보는 극비리에 6.29선언의 내용을 다듬고 발표시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대부분 총리가 노심초사하면서 주장한 내용이었지만 과연 어떤 방식으로 발표를 하느냐가 중요했다. 결국 총리에게도 당정 고위층에도 극비에 붙여 전격적으로 발표했기에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니까 4월 혁명과 같은 정국을 순화 용해시키지 않으면 더 큰 혁명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고 했다. 정국을 국민들이 요구한 모두를 6.29 선언에 담았기에 반대를 할 수 없었다. 좀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면 국민에게 항복한 선언이었다. 그러나 더 깊이 보면 비밀스런 몇 개의 안이 숨어있었다. 그러니까 당초에 포함하려 했으나 뺏는데 너무도 절박한 내용이었다.



지금의 정국은 혁명사항이다. 국민의 저항과 요구는 그동안의 군사정권에 가까운 모든 것을 민주화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들이 원하는 16년 만에 내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주였다. 그리고 선거에 의한 정권창출을 양김이 경합해서 어부지이를 얻을 수도 있다는 것과 만약 단일화 하면 지는 선거이기에 단일화가 되지 않도록 언론을 조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리고도 만약지면 야당이라도 하겠다는 의지까지 보였다. 막상 선거에서 양김의 지지도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조정하는 전략은 안기부에서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 팀이 한 것이었다.



노 후보가 6.29선언을 민정당 중앙위에서 하고 아산으로 내려갔다 그날 5시쯤에 노 후보에게서 이총리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그때 총리공관 정원에서 외교사절들과 정례 다과회를 열고 있었기에 그 회가 끝난 뒤에 다시 전화를 하라했다. 다시 온 전화에 노태우 대표는“총리께서 저에게 용기를 주시어 선언의 결단을 했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아 결단 선언 잘 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노 후보는 총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 선언이 있던 날 시내 가화다방에 붙은 글, “오늘은 좋은 날, 차는 공짜”라고 써 붙이고 손님을 대접했다.



얼마나 반갑고 기뻤으면 그런 글귀가 나왔을까? 아마도 그 날 선언으로 데모가 일순간 사라졌고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을 자부심을 느꼈으리라. 그렇게 강력한 정권이 국민에 항복했다는 승리의 마음이어서 이지 아닐까? 실재로 총리와 나는 하루가 한달 같고 한달이 1년 같은 괴롭고 고통스런 나날이었지만 좋은 결과에 만족했다. 이제는 잠이라도 제대로 잘 수 있는 여유가 있기에 기쁘기만 했다.



총리는 서서히 자신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헌법에 의한 공정한 대통령 선출이었다. 그러려면 중립적인 인사가 선거관리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언론에서 현 총리도 중립이라 했지만 사퇴결심을 했다. 7월5일 한달 여 혼수상태에 빠진 이한열군이 운명했다. 대학교수였던 이총리는 몹시 괴로워했다.



 

 

총리조문이 어렵고 손재식 문교장관 조문도 어려웠다. 7월 9일 이한열군의 장례식은 신촌 발인에서부터 시청 앞 노제에는 100만 명의 시민들과 학생들이 추모대열에 합류했다. 경찰의 보고는 한 1.2십만이라는 보고에 나는 직접 현장을 찾아 100만이 넘은 추모의 물결이라고 보고했다. 최루탄에 운명한 한열 군의 장례 일에는 최루탄 사용을 금한다고 했다.



시청 앞에서 거리제가 끝나고 광주로 향한 이한열 군을 보내고 허전했던 군중들은 드디어 조선일보 앞 광화문 군중이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고 있었다. 수만 명이 종합청사와 청와대를 향해 오니 광화문 네거리 저지선은 약속을 어기고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발사했다. 밀고 밀던 군중들은 시내를 누비고 대학로에서 자정이 넘어 종료를 하였다. 총리와 나는 새벽2시에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종료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공관에서 한숨을 붙였다.



이제 모든 게 다 끝난 것 같았다. 그러나 시청 앞의 100만의 추도인파가 그날 조용히 항의 시위만을 했던 결과는 아무래도 6,29선언이 있었기에 시민들의 분노가 삭여진 게 아니었을까? 만약 6.29 국민에 대한 항복 선언이 없었다면 추모인파들이 그대로 조용하게 추모만을 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총리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지난 격동의 48일을 뒤돌아본다. 모든 게 꿈만 같다고 했다.


7월12일 저녁이었다. 광주출신 이한열 군의 장례가 끝나면서 정리한 사표를 5명의 장관 사표와 함께 책상위에 올렸다. 그리고 두 아들과 나를 불렀다. “자! 이제 사표를 제출한다. 너희들 생각을 말해봐라.” 두 아들은 아버님의 결심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했다.

 

나도 총리님이 그렇게 내고 싶어 하신 사표제출은 지금이 제일 자연스러운 순간입니다. 하고 말했다. 48일간의 풍랑의 항해 끝에 마치 목적지에 안착 한 듯, 편안한 마음이었다. 오랜 지병을 앓으면서도 주사를 맞으며 주어진 국사에 충실하게 임했던 총리였다.



지상 발령을 받고 총리는 나에게 그리 길지 않을 총리 직을 수행하는데 함께 했으면 하시었다. 사실 나는 전 정권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오월광주의 슬픔도 있고 부도덕한 정권으로 행보를 계속했던 정부에 파견근무를 하며 몸담았지만 실은 걱정이었다. 혹 민주화의 방향으로 가지 않고 군부독제의 굴래 안에 허덕이면 어쩌나 은근히 고민이었다. 그렇게 논의가 안 되었지만 사실은 직선제가 아닌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해 전두환 20년 집권시나리오에 집착해 4.13호헌조치를 단행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정국에서도 명동성당의 대화해결과 군 출동 저지와 국민이 원하는 6.29 선언이 나와 총리와 나는 우려와 걱정을 씻어준 것이었다. 총리역시, 고비 고비 어려운 순간에도 바른 역사의 길로 과감하게 길을 갔다는데 자부심을 느낀 것이었다. 만약 계엄령으로 제2의 역사에 준엄한 심판을 받을 인물이 되었다면 자신의 생애는 물론 후손들에게 한없이 죄스런 선대가 될 터이다.

만약 일국의 재상이 국가의 위기에 대통령의 명령에 그저 복종하는 방향으로만 갔다면 어찌하나, 그래도 그게 아니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총리였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7월13일 당신의 사표를 갖고 청와대를 향했다. 나도 마지막 총리를 수행했다. 대통령은 그동안 고생한 총리에게 반색을 하며 “저는 이 총리께서 당뇨병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저의 장인께서도 당뇨로 고생하신 걸 봤습니다. 서리도 떼어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계속된 그의 말에 총리는 “아! 총리 맡으라고 하실 때 지병인 당뇨가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계속 보필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이번 선언이 국민들의 뜻에 부합되어 다행입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청와대를 나와 총리공관으로 왔다.

 

 


간단한 짐을 꾸리고 바로 선수촌 아파트 우거로 돌아온 총리는 회한에 잠겼다. 국가의 어려움에 도와달라는 대통령의 요청에 언제나 고사했지만 결국은 맡게 되면서 고심했었다. 한때는 바로 사직을 하겠다고 했지만 자리가 높으면 높을수록 제약이 따름을 알았다. 그러나 인기 없는 정권에 정부에 들어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는 경우도 있지만 소신과 역사인식에 입각한 당당한 직무를 수행하면은, 역사는 꼭 기억해 주리라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진실로 권력에 직책에 욕심이 없었던 총리였다. 대통령 승계 제 1의 서열의 국무총리가 욕심과 사심이 없으면 당연히 후세에 평가를 받을 것이다.

 

대한민국 역대총리 중에 짧기로 자유당 때 이윤영 총리가 8일간이었고 이한기 총리는 두 번째로 48일간이었다. 달 수 로는 3달이었지만, 나라가 흥하나 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선 순간은 고통이었다. 총리 직을 물러나고 몇 년 후에 들리는 소문이다. 전(두환)대통령이 말했다고 한다. “자신이 집권한 8년 동안 역대 여러 총리 중, 대통령 명령을 안들은 총리가 이 총리였다”고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아무리 왕이고 대통령이라 해도 바르지 않은 명령에 ‘아니오’ 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 그저 윗사람 눈치나 보고 아랫사람과 국민은 안중에 없는 그런 자질의 재상은 국가와 민족발전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6.29선언이 다음주면 18주년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없던 6월 항쟁기간에 나는 총리를 지근에서 보좌하면서 지금까지 느낀 여러 일들에 대하여 회고해 봤다. 이미 작고하신 이 총리는 올해가 10주기이다. 10월에 89세가 된 탄생일에 조촐한 모임이라도 가져 잊혀져 가는 그때의 6월 항쟁과 6.29선언의 진실에 다시 한번 논하는 기회가 왔으면 한다.



18년이나 지나 이제 잊혀져 간, 6.29 선언의 진실은 노태우의 작품이다, 전두환의 작품이다, 또는 김복동. 박철언. 고명신. 권복경. 전재국 등 여러 인물들이 선언의 한몫을 했다고도 하고 더 큰 몫을 했다고 주장한 사실을 안다.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볼 때, 6.29선언은 우리 4천5백만 국민들의 바람이었기에 국민에 ‘항복한 선언’ 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은 추인했고 당정간의 수장인 노태우 대표와 이한기 총리는 깊게 협의하고 대통령에 건의했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많은 측근들이 도왔다. 특히 전국에서 시위와 데모로 무더웠던 여름의 6월 항쟁의 대열에 동참한 모든 국민의 승리였다. 앞으로도 그때의 열정으로 국민들이 합심하면 아무리 어려운 나라라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 6월 항쟁이요 6.29 선언이었다.



문제는 6.29선언으로 인하여 민주화의 진전을 가져 왔다는 평가도 있고 한편으로는 정권재창출이라는 고도의 ‘속이구’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바른 평가는 후 사가들이 담당할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진실 앞에 겸허해야 한다. 작은 공을 미화하거나 과오를 숨기는 일들일랑 말아야 한다. 잘못된 것은 과감하게 반성하고 겸허히 사죄하는 미덕이 아름답다. 앞으로 역사 앞에 나가야 할 기회가 오면 더 진솔한 마음과 최선을 다한 임무에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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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사)평화연대의 전 집행위원장 · 공동대표이다. 현재 통일부의 통일교육 위원이다. 수필가 · 서예가 · 평화통일 비림작가이기도하다. <에세이21> 기획위원 및 사무국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글출처:http://peacemaking.co.kr/news/news/view.phpnewsno=1490&papercode=PEACE&pubno=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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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민근아빠 박성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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