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장전 2015. 9. 23. 22:13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의외로 이때의 일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서, 세월이 정말 많이 흘러갔음을 느끼게 된다.
가령 이한열 군의 죽음이 6월대항쟁의 원동력이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본다. 미안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이한열 군이 6월 항쟁의 한 축이 된 것은 사실이나 그가 죽은 것은 6.29 선언이 나온 뒤인 7월 5일이었다. 7월 9일, 이한열 군의 영결식에는 정말 백만 명 쯤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모였었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그리고 80년대 독재정권과의 마무리처럼 보였다. 문익환 목사님이 그동안 죽어간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외쳐부르셨다.

사실 5공 시절 내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권양 성고문 사건이었다. 1986년 여름에 터져나온 이 사건은 정말 쓰레기들과 내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 5공은 철저히 언론을 통제하여 이 사건을 사회면 탑에도 올리지 못하게 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작은 제목을 달고 사회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형적인 편집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정부의 주둥이가 되어서, "성고문은 없었다. 성마저 도구로 삼는 운동권" 등의 파렴치한 날조극을 벌였던 신문도 있었다. 뭐, 어느 신문인지 지목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그러나 사회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86년 5.3 인천투쟁이 실패하고, 권양 성고문 사건도 국민의 분노를 폭발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던 중 고문·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월 15일 중앙일보에 2단 기사로 연행조사받던 대학생이 조사 중 쇼크사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다음날 동아일보에는 박종철이 고문을 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보도지침이 내려왔지만, 이미 이 사건을 외신들이 주목하면서 언론이 통제 범위를 벗어나버렸다. 1월 18일 동아일보는 1면 톱으로 기사를 확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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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3일 자정에 연행되었던 박종철 군은 10시간에 걸친 물고문 끝에 죽음에 이르고 만 것이다. 16일 증거 은폐를 위해 박종철 군은 화장되었다. 이때 경찰은 부검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검찰의 강력한 저지로 결국 부검을 했고, 그 결과가 공개되면서 경찰의 사기극이 들통나게 된다. 경찰은 코메디에나 나올 말로 국민을 속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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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을 탁 쳤더니, 억하고 죽었다"는 것이 경찰의 발표였다. 1월 19일 경찰은 여론에 밀려 물고문을 시인했다. 말단 경찰들만 책임을 졌다. 1월 20일, 26일 서울대에서는 계속 시위가 있었으나 엄동설한 아래 경찰의 탄압만 거세었을 뿐, 시민들의 반응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2월 7일 국민추도대회가 벌어졌다. 하지만 때가 좋지 않았다. 아직 대학가는 방학 중이었다. 그리고 성고문에 물고문까지 거침없이 해치우는 군사정권의 살벌함에 시민들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후 3월 3일에 있었던 민주화 대행진의 행사도 운동권만의 소용돌이에 그치고 말았다.

5공 정권은 국민들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봉쇄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였다.

자신의 임기 안에는 개헌은 없다는 확고부동한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또한 김영삼, 김대중의 신당 창당 움직임도 제동을 걸었다. 김대중은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은 여러차례 대화를 요청했으나 전두환과 민정당은 매몰차게 거절했다. 당시 정부여당은 민주당을 빨갱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늘 재미를 본 색깔론을 또 써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면서 군사정권의 철옹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이 사건의 진상이 폭로되었다. 5.18 항쟁 희생자 추도회 석상에서 한국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이 "박종철 고문 사건의 진상이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5월 22일 검찰은 정의구현사제단의 발표가 사실임을 입증했다. 5월 23일 재야인사 134명은 박종철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6월 10일 규탄대회를 열기로 했다. 민주당도 저자세를 버리고 대여 공격에 나섰다. 5월 25일 민주당은 정권퇴진을 주장했다.

5월 26일 전두환은 개각을 단행했다. 여기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뿐만 아니라 4월 19일에 일어난 범양상선 회장 박건석의 자살로 인해 불거진 5공 정치비자금 의혹도 한몫을 했다. 그러나 이런 개각으로 들끓기 시작한 민심을 잡을 수는 없었다.

민주당은 6월 10일로 정해져있는 민정당의 전당대회를 취소하라고 요구했으나 정부는 귀를 막았다. 사실 정부는 이 점에 대해 별로 우려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문화공보부 정책홍보실에서 언론인들을 만나 6.10 전망에 대해 들은 내용을 살펴보자.

민정당 전당 대회 개최일인 6월 10일 재야단체에서 개최하려는 타종, 경종 행사 등은 대규모 행사가 되지 않을 것이다. - 코리아 타임즈 모 부장
이제 박종철 군 사건이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6.10 대회는 잘 넘길 수 있을 것이다. - 연합통신 모 간부
6.10 규탄 대회가 별일없이 끝날 것이다. 통민당(민주당) 의원들이 단식하는 척하며 구내 매점에서 음료와 간식을 들고 있더라 - 코리아해럴드 모 부장
6월 10일의 추모 행사는 3.3 때와 마찬가지 양상으로 생각되며 물리적 충돌이 적을 것이나 재야에 의한 체면치레용 농성 등이 예상된다. - 한국일보 모 간부


이런 판단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재야와 학생들도 상당수 좌절감 속에 6월 10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행히도 나도 그런 비관적인 전망을 가진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런데 사태는 또 뜻밖의 변수를 불러왔다.

6월 9일 연대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 하나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되었다. 더 이상 희생은 안 된다는 시민들의 각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한열은 시위 기간 내내 회복을 염원하던 사람들의 기도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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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 민정당은 예정대로 전당대회를 열었고,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당대 최고 인기 코메디언이었던 김병조가 이때 사회를 맡아 "민정당은 국민에게 정을 주는 정당이고 통민당은 국민에게 고통을 주는 당"이라는 망언을 했다가, 자기 유행어처럼 지구를 떠나버리게 되는 사태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환호하던 노태우와 민정당의 체육관 밖에서는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6월 10일 국민대회에는 전국 22개 도시의 40만 시민(경찰 발표는 24만명)이 참여했던 것이다. 이날 이미 상당수의 시민들이 시위 학생들을 편들기 시작했다. 너무 많은 시위대 때문에 경찰은 시위 진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그날 KBS 9시 뉴스에는 노태우의 선출 과정만 27분이 나왔다. 49분의 뉴스 시간 중 절반 이상을 노태우에 몰아준 것이다. 시위 장면도 경찰의 무차별 최루탄 난사 등은 전혀 나오지 않고, 학생과 경찰의 대치 장면과 화염병 투척 등의 자극적인 화면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일보는 6월 12일자 신문에서 6.10 불법집회에 대한 정부 발표문을 1면 톱으로 실었다. 당시 4대 일간지 중 유일하게 그따위 발표문을 1면 톱으로 실은 신문이었다.

6월 10일 시위대 일부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명동성당은 경찰에 의해 철통같이 포위되었다. 경찰은 명동 성당에 진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겠다고 했으나, 성당 측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끝내 진입하지 못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은 명동 성당에 갇힌 농성자들을 위해 명동으로 시위를 나섰다. 성당 담장 너머로 김밥이나 음료수를 던져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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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농성은 6월 15일에 끝났다. 6월 15일까지 구속된 사람들만 220명에 달했다.

6월 10일로 돌아가자. 나는 그날 시위에 나가지 않고 학내에 남아있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보여서 나가지는 않았지만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자 하나둘 시위에 나갔던 친구들이 돌아왔다. 아, 그들의 얼굴은 희망에 빛나고 있었다.

"됐어! 해냈어!"

나를 본 친구의 첫마디는 이랬다. 다음날 나는 명동으로 나가 보았다. 명동에서 서울역까지 채워진 시위대들고 어깨를 걸고 같이 뛰어볼 수 있었다. 경찰이 쫓아오면 흩어져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서울역 앞의 고가를 가득 채우고 앉아있던 학생들에게 직격 최루탄을 쏘아대던 경찰들을 잊을 수가 없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더 분노하여 경찰들에게 욕을 했다.

"또 학생들을 죽일 참이냐!"

학내에서도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복학생들이 데모에 나선 것이다. 대개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들은 데모를 거의하지 않는 것이 분위기였는데, 예비군복을 입고 시위에 나선 복학생들의 수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까지는 한번도 시위 루트로 사용되지 않던 엉뚱한 장소가 시위대들에게 이용되었다. 우리는 노고산을 넘어서 신촌 로터리로 나가 오히려 경찰들을 포위하기도 했다.

6월 18일은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부산에서도 30만 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무력화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6월 19일 이한기 총리는 법과 질서를 위해 정부가 비상한 각오를 할 수 있다는 협박문을 발표했다.

6월 18-19일의 격렬한 시위 과정에서 경찰관 한 명이 순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정부는 지방 중소도시의 치안은 포기하고 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의 대도시 시위 진압에만 집중했다. 이 때문에 도심 지역이 유령화되고 신촌, 동대문, 서울역 등의 부도심에서만 격렬한 시위가 계속 되었다.

6월 24일 전두환은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와 전격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양측의 견해는 이미 합의점을 도출할 수 없는 단계였다. 민주당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다.

6월 25일 전두환은 김대중의 가택연금조치를 해제했다.

6월 26일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 읍 등 총 270여개 지역에서 1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제 세월이 지나서 돌이켜 보면 이 무렵, 미국 상원에서 "대한 민주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든가, 시거 미국무부 차관보가 군인의 개입을 반대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알 수 있지만, 당시는 이런 점을 알지 못했다.

다만 세상이 변한 것을 알려준 것은 조선일보의 논점이 변한 것에서 읽을 수 있었다고 할까?

6월 29일 아침에 나는 오늘도 몸 좀 풀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등교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때 가판에 있던 신문을 보고 기겁하고 말았다.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많은 학생들이 며칠만에 귀향들을 했다. 7월 1일 전두환의 특별담화가 나와 6.29 선언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을 목격해야 눈을 감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끈질기게 생명의 줄을 놓지 않았던 이한열 군이 7월 5일 새벽에 숨을 거뒀다.

7월 7일 부검 결과 이한열 군의 머리 속에서 최루탄 뇌관 파편을 찾아냈다. 7월 9일 이한열 군의 장례식에는 서울 백만, 광주 50만, 부산 30만명의 추도 집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