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한 변화가 있었던 혼돈의 시기였다. 혹세무민의 세도정치와 이로 인한 삼정의 문란 등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져 홍경래의 난, 진주민란 등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많은 유민들이 발생하였다. 또한 서양의 진출로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를 거쳐 병자수호조약(1876)에 의한 개항으로 이어졌다.
허약한 왕실은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외척의 변태적인 세도정치와 구미열강들의 횡포에 속수무책일 뿐이었다.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었던 석전 이최선(1825~1883)! 그는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위태로운 국가의 안녕과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해소하기 위해 1862년 그의 나이 38세 때에 『삼정책』을 지어 “기강의 해이와 염치의 상실은 삼정의 폐단보다 더욱 심하다”고 역설하였으나 담양부사에 의해 기각되어 조정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삼정책』을 본 노사 기정진 선생은 그의 경륜이 주도면밀하고 재능이 우수하여 세상에 쓰일만 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어떻든 그는 삼정책에서 ‘기강과 염치의 재정립’을 문제해결의 근본적 접근방법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기강이 위에서 세워지면 형벌과 상이 시행되어 모두 공적으로 빛나고, 염치가 아래에서 숭상되면 명분과 의리가 지켜져 온갖 방도가 모이게 된다’고 하면서 ‘오늘날 기강을 버리고 삼정을 구하려 하면 왜곡된 습관을 끝내 혁신할 수 없고, 염치를 버리고 삼정을 바로 잡으려 하면 탐욕에 찌든 습속을 결국 척결할 수 없다’고 역설하였다.
무능력한 왕실과 부패된 국정운영의 상황 속에서 혁신의 문제가 민족적인 과제로 대두되고 그 실천이 모색되는 시점에서 그는 재야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최선의 문제해결방법을 제시하였지만 시대는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피폐한 민중의 현실을 석전은 현장에서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평세월의 흥겨운 노래는 가을언덕의 과부의 곡성으로 변했다. 민중은 한 푼도 포탈하지 않았는데도 상납은 해마다 쌓이고, 아전들은 수만금의 뇌물을 받았는데도 법령은 두어 달을 죄수로 가둔다. 포를 거두어 군번을 대신하고 한갓 쓸모없는 장부를 끼고 다니며, 사망한 자, 유리걸식한 자, 어린 아이를 군적에 올리니 한 몸의 군역이 혹 서너 번에 이르고 한 이름으로 대역함이 혹 예닐곱 번에 이른다. 피로와 병에 시달려 의지할 곳 없는 사람, 아들 없는 사람, 홀아비, 과부가 되어도 이를 하소연할 곳이 없고, 하늘에 무죄를 호소하려 해도 길이 없다. 살아서 헤어져 죽어 이별하고, 자신을 팔고 자식을 파니, 울부짖는 소리가 우레와 같아 화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올바른 인재의 선발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석전 또한 수차례 과거시험을 치루면서 매관매직의 아픔을 겪었기에 그는 과거 시험을 엄격히 하여 언로를 개방하고 성학(성학)에 힘쓰며 이렇게 되면 마음으로 이치를 밝히게 됨을 역설하였다. 그가 남겼던 글을 보자.
청춘에 시부를 짓다가 흰머리에 경전을 궁구하니, 죽을 때는 학생이라고만 쓴다. 관직에 등용되기 전부터 극에 달해 농사의 어려움을 알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고을 원님이 된 뒤에는 욕심이 격동하니 어찌 농부의 고충을 돌아보겠는가. 이런 사람을 목민관의 지위에 앉혀두면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홀로 시행하지 못하니 인재를 기다려 시행해야 한다. 천하는 한 사람이 독재할 수 없고 천하의 정치는 한 사람이 운영할 수 없다. 삼정은 인재를 얻으면 걱정거리가 될 수 없다. 진실로 그 인재가 아니라면 하나의 일도 운영할 수 없거늘, 하물며 삼정 같은 폐단이야 어떻겠는가?
노사선생과 이최선 등 그의 제자들을 모신 장성 진원면에 소재한 고산서원 전경
이처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석전 이최선은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예로 담양 창평 장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여 과거시험장에 드나들었고 문장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15세 되던 해에 부친 이규형과 절친한 친구로 장성에 있던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1798~1879) 선생의 문하로 들어 가 제자의 예를 갖춰 40여년을 정성껏 섬겼다.
그는 스승의 문하에서 예법과 경전을 탐구하여 학문적 역량을 축적하였으며 특히 스승의 저술인 『외필』이 학계에 소개되어 유림들이 의혹을 제기하자 『독외필』을 지어 스승의 학설을 명확히 변호함으로서 노사학파의 탁월한 제자로 추존받기도 하였다.
석전의 스승 노사 기정진은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의 성리학은 감각이 가능한 기(氣 : 모든 현상과 존재의 바탕이되는 재료)에 치중하는 입장이 아니라 감각을 넘어서는 리(理 : 모든 현상과 존재의 원인이 되는 원리원칙)에 치중하여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따라서 그의 설이학은 주리(主理) 또는 유리(唯理)라고까지 표현되었다.
노사는 율곡에 있어 기의 작용이 기 스스로에 의해 일어난다는 ‘기자이설’을 거부하고 모든 기의 작용은 이로부터 명령받은 것임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사의 입장이 율곡을 배척한 것이라며 노사집을 훼판하자는 주장이 나오자 석전이 독외필을 지어 스승을 변론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의 사상적 측면을 엿볼 수 있는데 그 핵심은 “인간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인간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고 말한 공자의 학설을 “도가 진실로 인간을 넓히는 것은 아니지만, 도 자체에 넓힐 수 있는 묘용이 내재되어 있으므로 인간이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에 그 묘용이 없다면 인간이 무엇에 근거하여 넓힐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평소 그가 노사에게서 배울 때 ‘이(理)는 능동적인 힘은 없지만 필연적인 묘용은 내재한다’(理無能然之力而有必然之妙)라는 열두 글자를 명백하고 정확하여 깨트릴 수 없는 논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노사의 제자가 594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이최선이 스승을 변론하는 글을 지었으니 그의 의리정신이 남다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멋진 사제관계의 돈독한 정은 이최선이 의병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할 때 노사가 전해 준 시 한 수에 잘 나타나고 있다.
金城秋色入離歌(금성추색입이가) 금성의 가을빛 이별노래 드리우고
持贈長鞭奈老何(지증장편내노하) 긴 채찍 주려하나 늙음을 어이하리
宗姓宜爲編戶倡(종성의위편호창) 종성이니 마땅히 의병을 주창하리
橫經孰與揮戈多(횡경숙여휘과다) 경을 빗기는 것과 창을 휘두르는 것이 어느 것이 더한지
但看日月麗黃道(단간일월려황도) 해와 달이 황도에 걸려 있음을 볼뿐이니
焉有男兒臥綠蓑(언유남아와록사) 남아가 어이 푸른 도롱이 입고 누워만 있으니
客裏若逢賓雁翮(객이약봉빈안핵) 객중에 날아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爲傳漢水精無波(위전한수정무파) 한수가 잠잠해 파도 없다 전해주오.
이에 이최선은 무사히 돌아올 것을 바라는 스승 기정진에게 답하는 시를 적어 올렸다.
仗劒西風一放歌(위전한수정무파) 스산한 서풍에 칼을 잡고 크게 노래하니
蒼黃時事奈如何(창황시사내여하) 창황은 국사를 맞이하여 어찌하리오
臨危成敗非吾度(임위성패비오도) 위기에 처해 성패여부를 내 헤아릴 바 아니오
快死南兒問幾多(쾌사남아문기다) 쾌히 죽은 의기남아 얼마나 되었던지
是日方承催血詔(시일방승최혈조) 이날에사 비로소 창의조서 받자옵고
晩天容易脫漁蓑(만천용이탈어사) 만년에사 겨우 도롱이를 벗었네
師門贈別慇懃意(사문증별은근의) 스승께서 별지에 보내주신 은근한 뜻
歸泊江都誓一波(귀박강도서일파) 강화에 나아가 배를 댈 것을 흰 물결두고 서약하네
석전은 병인양요를 당해 척양척사의 정신으로 의병활동을 주도했다.
그는 도내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구암땅으로 모은 뒤 싸움에 임하고자 하는 사람을 맹첩에 서명하게 하고 곧장 서울로 달려갔으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서양인들이 도망친 뒤였다. 석전은 성이 수복되었다는 보고에 기쁘기도 하였지만 후일 또 다른 침략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 당시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인재들 얻는 일과 독서를 하는 일에 힘써 백성의 마음에 광명과 화합을 심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하였다.
어떻든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35세에 사마시에서 ‘일시(一詩)’과목에 2등으로 합격하여 증광진사가 되었다. 그 이후 40세에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복시에서는 문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응시를 포기하였다. 그러다 1874년 그는 50세의 나이로 왕세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열린 증광회시에 응시했다가 낙방의 쓴 고배를 마시게 된다. 그
는 한강을 건너면서 차고 있던 은도와 옥거울을 강에 던지면서 ‘다시는 이 강을 건너지 않겠노라’고 강의 신에게 맹세했다고 한다. 국가경영에의 의지가 남달리 강했던 그였지만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실력있는 인재를 몰라보는 시대에 분노하고 좌절했던 것이다.
석전 이최선이 지은 문일정
고향으로 돌아 온 석전은 벽에다 ‘지팡이 짚고 산을 나서지 않을 것이며, 붓은 서울로 띄우는 편지를 쓰지 않으리라’는 최치원의 시와 ‘푸른 이끼 낀 황량한 돌밭 띠풀집에서, 여생을 밥이나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라네’라 읊었던 두보의 시를 붙여놓고 1861년 마을 입구에 문일정을 지어 지인들과 시를 읊조리며 세상을 마쳤다.
문일정이라는 정자의 명칭은 석전이 정자를 짓고 이름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스승 노사 기정진이 견일정(見一亭)과 문일정 가운데 문일정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노사가 쓴 문일정기문에 보면 ‘원래 이 정자를 지은 뜻은 사방 풍경을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학문 높은 벗을 맞아 예전에 듣지 못했던 학문을 듣고자 했기 때문이다’며 노사는 문일정으로 이름지었던 것이다. 현재 문일정에는 민태호의 제액과 기정진의 창건기문이 남아 있다.
이렇게 정자를 짓고 시문을 논하며 살던 그는 1883년 어느 날 병에 걸려 눕게 된다. 절친한 친구가 비감어린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며 위로를 하니 그는 웃으면서 “남아는 죽음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이 여기나니, 어찌 아녀자 같은 모습을 하겠는가?”라고 말하고 평상시처럼 담소를 나누다가 112월 23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실천적인 의식과 행동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아들인 청고 이승학(1857~1928)은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다가 장성의병을 이끌던 그의 스승 기우만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으며 그의 손자인 성균관 박사를 지낸 옥산 이광수(1873~1953)는 이기, 윤주찬, 민형식 등과 함께 을사오적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사형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최선의 실천론은 3대에 걸쳐 구국의병활동으로 이어져 오늘에까지도 우리들의 본이 되고 있다.
우리도 한번 쯤 문일정에 들러 나보다 더 낳은 이의 가르침을 들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