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48일 동안 지낸 총리직을 사직하며

장전 2015. 9. 23. 22:16

발상의 전환 (8)
48일 동안 지낸 총리직을 사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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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군의 장례는 6월의 민주항쟁의 끝자리 메김을 뜻 한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일정은 대통령 선거다.공명정대한 선거, 뒷말이 없는 깨끗한 선거가 내각의 임무다.벌써 일기 시작한 선거 중립내각에 대한 논의기 제기되고 있을때 나는 이미 총리에게 보고를 드렸다. 이번이 그 기회인 것 같다고.....

7.12일 밤 이 총리는 총리공관 집무실로 당신의 두 아들과 나를 불렀다.
“그동안 고민하고 숙고한 사표를 내기로 했다. 너희들 생각과 윤군의 생각을 듣고 싶다.”
“저희들은 아버지 결정에 찬성입니다.몸도 편치 않으시고 이만하면 어느정도 마무리도 하시고, 일부 신문에서 중립내각에 알맞은 총리라고 하지만 또 늦어지면 기회가 없지요.”
“저도 그동안 총리께서 항상 사표 제출을 얘기하실 때 기회가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번이 기회인 듯 싶습니다.과감하게 제출하시지요.”
“그래 내 생각도 그렇다.정국이 꼬이고 복잡 할 때 사직이라면 비난도 있을것이다.책임도 없는 총리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서 이총리는 다섯 장관의 사표에 자신의 사직원을 들고 청와대로 향했다. 이미 몇 번이고 박영수 비서실장에 사직의 뜻을 전해 달라고 했기에 대통령도 이미 총리 사표 제출을 알게 되었을것으로 판단했다.청와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총리께서 그렇게 당뇨가 심하신지 몰랐습니다.우리 장인 이기동 어른신도 당뇨병으로 무척 고생을 하시더군요.”
“아! 제가 총리 맡으라는 말씀을 할 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지병인 당뇨가 심하다고..그래서 다른 사람 고르라고 말입니다.”
“겸손하셔서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그 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특히 ‘서리’도 못 떼어드려 죄송합니다. 워낙 정국이 긴박해서....고생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48일간의 총리직을 사직하고 삼청동 공관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루가 한달같고 한 달이 10년 같다는 세월이었다고 회고하는 이 총리의 마음은 이만한 상황에서 사직을 한다는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고 빽을써서 공직을 맡아 본적이 없이 그저 추대하고 일방적으로 지상 발령으로 어쩔 수 없이 공직에 오른 이한기 총리의 심경은 훌가분 하고 착잡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유고시 승계서열 제 일 순위인 국무총리를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이번 만은 너무나도 긴박한 상황에서 직을 맡아 노심초사 했다.우선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갈림 길에서 “발상의 전환”만을 바랐지만 그 바람이 늦게나마 있었기에 이렇게 훌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는 일단을 피력 했다.

나 또한 총리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돤 측근으로 내가 그렇게 싫허한 용납되지 않은 정권에서 총리를 보좌하는 마음은 항상 무거웠다. 일제 때 친일 행각을 벌인 이완용을 생각하고 수 많은 친일 행위자를 격멸했던 내가 부도덕인 정권의 말로에 잘못 된 방향으로 일조를 한 사람으로 역사에 평가 된다면 이는 치욕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처음에 총리를 돕느다는게 망서려 졌고 조심조심 했으며 어느하나 건의를 할 때도 국가와 미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아픔에 있는 민주인사의 고통을 생각하며 행동하려 노력했다. 그 예로 총리께서 결단을 내려 대화로 해결한 명동성당 농성사건은 내가 천주교 신자로서의 안목을 보였지만 또다시 군이 이땅에 계엄군이 되어 출동한다면 이는 씻을 수 없는 오욕의 역사라는 오월 광주를 생각해서 도저히 묵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이 총리와 나는 그때의 정국을 보는 의견이 일치했다.아니 흐르는 물결이 순수한 역사의 흐름이 그 방향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반역의 역사를 봐온 입장에서 또 다시 민족의 슬픔을 안고 가고 싶지 않았다.후임 총리가 김정렬 총리로 발표되면서 다시 한번 놀라고 있었다. “이한기 총리가 총리직에 있을때, 대통령 명령을 어긴 총리였다”는 전두환 대통령의 후일 담에 총리와 나는 오히려 통쾌한 심정이었다.만약 ‘대통령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면 명동성당과 군 출동 문제가 어찌 방향을 잡을지 예칙 불허가 아닌가? 이런 명령이라면 백번 듣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다.비록 대통령 한사람 명령을 거부해 기분이 언짢았다 해도 역사적으로 민족과 국가라는 과제에 힘을 보텐다면 당연한게 아닐까?’하는 생각이었다.

6월에 벌어졌던 저항운동은 한국근현대사에 대내외적 모순이 어떤 사회보다 격심하여 이에 저항하는 민족 민중운동이 끊이지 않았다.지난 역사를 보면 1894년 갑오농민혁명과 1919년 삼일운동, 1960년 4월 혁명들이 불꽃처럼 일어 났다가 미완의 혁명으로 안타까운 역사였지만 광주 민주항쟁과 6월민주 항쟁은 어느 정도 민중의 욕구를 성취한 측면이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쉽게 잃어버린 혁명의 불길이 쉽게 식어버린 민족성의 근성이 남아 있음을 간과할 수 없는 우리의 맹점이 아닐까? 그에 대한 애환은 우리가 아닌 연합군으로 맞은 반쪽 해방의 설움과 위정자들의 안보 정권에 안주한 말만‘국가와 민족,그리고 자신’이라는 구호는 결국 ‘자신들 그리고 국가와 미족’이라는 반 민족적 행위가 아닐까.

이 총리는 간단한 짐을 꾸려 삼청동을 떠나오면서 “나는 생각보다 많은 날을 근무했다.비록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짧은, 달로는 석달이지만 일로는 48일 총리였지만 여한이 없다. 총리를 오래한다고 역사에 남겠느냐? 재직중에 국가와 민족이라는 과제 앞에 어떻게 직무를 수행했는가가 중요 할 것이다.대통령은 서리를 못 떼어 줘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하나도 미련이 없다.”라는 회고담을 피력했다.이제 책이나 보고 잠이나 푹 자겠다는 작은 소망도 말했다. 위정자는 분명 투철한 역사인식을 갖고 근무해야 한다는 말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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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내가 본 이 땅의 역사는 참으로 질곡의 역사였다.당파 싸움으로 위정자는 그저 호의호식하고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안일한 생각에 사로 잡혀 나라를 잃고 35년이나 외놈의 지배하에 식민지가 되었던 때에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바쳐 애국하는 독립군을 내리치던 세력들도 있었다.친일하여 잘 살던 어리석은 관리와 친일 분자들은 일본이 적어도 200년은 더 조선을 지배 할 것이고 지배를 받는게 당연하다고 여긴 민족의 반역자들도 있었다. 나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1941년 7월,마지막 일제가 발버둥치던 그때 세상을 나와 반쪽해방의 감격을 어린 눈으로 보았다. 곧바로 3년의 군정에 일그러진 원한의 3.8선으로 분단은 고착되고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세우고 이어진 한국전쟁은 열 살의 어린 내가슴에 끝없이 죽임과 죽음이 이어져 가는 처절한 한국 전쟁 전후의 모습을 보았다.

분단으로 이산가족과 좌우 이데올로기에 의한 민족갈등의 골이 깊어만 가는 남북의 적대적 행위는 안보정권 유지를 위해 혈안이 되었다. 맑게 밝게 자라나야 하는 청소년기에 부정부패의 온상과 함께 찾아온 군사문화의 지배는 정도를 버리는 총칼로 힘으로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부 도덕한 윤리가 횡횡하는 세상을 낳고 말았다.그런 세월은 무려 35년이란 세월을 지배하였으니 일제의 35년과 맞먹는 기나긴 세월이었다.거기에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정책에 한반도는 언제나 불안을 감내하고 살아왔으며 민중은 반항과 투쟁을 당연한 삶의 방편으로 여기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국군으로 근무하면서 함께 살아갈 같은 동포인 북한과 주적관계로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가슴아픈 시절과 멍사도 모르고 전쟁과 평화라는 호기심에 참전했던 월남에도 우리와 같은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나라라는 사실을 현지에 가서 보고 알면서 남루한 후회를 하고 돌아왔다.전쟁은 지구상 어디에도 있어서는 안되는 평화의 적인데도 전쟁을 어린애 병정 놀이쯤으로 아는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은 어찌하면 전쟁의 승리로 무기를 팔아 착취할수 있는가를 엿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참전한 월남은 미국의 세계막강의 군사력과 무기를 앞세워 자신들의 동남아 기지를 구축하려 했으나 끈질긴 민족적인 월남인들은 스스로 외세를 물리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며 살고 있다.

월남이 비록 사회주의로 통일이 되었지만 우리와 수교를 믿고 어찌하면 더 잘살 수 있을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월남은 이제 평화의 바탕위에 인민들이 안심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부러웠다.그에 비하면 한국의 현실은 그동안 군사문화의 전시효과적 하면 된다는 강압속에 자율이 규제당하고 정도의 길을 걷지 못하고 과도기적 정치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사실에 남북의 갈등과 남남갈등까지 이어진 형극이다.

그러나 앞에서 술회한 내눈으로 본 역사와 내가 경험했던 역사의 순간들의 얘기에서 험난한 정국이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민중은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길거리로 나서 혁명적으로 목숨을 잃으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명제 앞에 분연히 일어서곤했다. 4.19가 그렇고 오월 광주 민주항쟁이 그렇고 6월 민주항쟁이 그것이었다. 오욕의 역사속에서도 나라는 발전하여 어느 정도 살게 되었지만 빈부의 격차와 부정과 모순에 당당히 항거하는 모습은 이땅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코 부도덕한 5공의 정권 말기에 운명적으로 정부에 참여한 이 총리와 나의 얘기를 솔직하게 써 보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나라 민주화와 역사의 큰 줄기에 매달려 있었기에 어느때는 나라가 위태롭고 민족의 앞날이 걱정되어 과감한 진언을 해서 때로는 그 진언이 관철되고 있을때 보람을 느끼곤 했다. 일개 측근 보좌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겠느냐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총리와 나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대 과제에 숙고하여 의견을 올리고 묻곤하였다. 결과가 좋으니 모두가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도 6월항쟁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6.29로 인해 민주화가 일부 진전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6.15 남북 선언이 주는 남북의 역사적 의미와는 견줄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한국에서 6.29를 속이구라고 칭한다 해도 우리의 혜안이 부족하고 단결이 부족해서 다하지 못한 결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통령의 명령이 부당해 명령에 따르지 않았거나 대통령의 의지와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해 불편한 관계가 되더라도 그 일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보탬이 되었다면 당연히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리라.

역사속에 잊혀져 가려는 16년 전의 6월 항쟁의 그 때 그 날에 있었던 작은 역사 이야기는 내일의 역사에 하나의 참고로 되었으면 좋겠다. 지난 6.26일에는 16년 전 87년 유월 항쟁의 그 때에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선 인사들이 다시모여 그 때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보도였다.그렇다.아직도 못다한 유월 항쟁의 정신 그리고 육이구 선언의 좋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미진한 민주화의 실천을 위한 노력이 계속된다면 그 또한 발전의 방향이 될 것이다.

혹자는 집권 여당의 하는 짓은 모두가 국가와 민족에 반하는 정권적 행위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즉 무도한 5공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6월 항쟁때에 정부 내각의 책임자인 이 총리의 역할과 또한 나의 보좌 역할이 다소 나마 민주화에 일조를 했다면 그것으로 그때의 마음 아픔을 달랠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는 오늘도 강물처럼 흐른다.흐르는 역사속에 진실 찾기를 나서고 싶다.그리고 더 나은 국가와 민족 앞에 봉사하는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나설 것이다.한반도 평화를 위한 일도 우리가 나서서 할 일이다. (2003.6.29)
< 연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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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6월항쟁당시(6.29선언) 87.5. 26- 7.13일 총리 측근보좌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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