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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사람과의 관계는 ?

장전 2009. 1. 19. 12:56

돼지와 인간

아버지는 당뇨병이었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아버님께서는 아침마다 인슐린 주사를 맞으셨는데, 인슐린이 담긴 약병에는 ‘porcine insulin’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난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였기에 사전을 찾아 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porcine’은 ‘돼지의’, ‘돼지 같은’이란 의미였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돼지의 인슐린을 맞고 있었던 거다.

 

 

 

삼겹살 덕분에 지금은 돼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지만, 그 시절 난 돼지에 대해 강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에, 잠깐 동안이었지만 아버지를 멀리하려 했던 기억이 난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사람 인슐린의 DNA 서열이 밝혀졌고, 그것과 동일한 서열을 갖는 인슐린을 만들어내게 되면서 돼지 인슐린을 맞는 일은 없어졌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돼지 인슐린을 사람에게 쓰는데 큰 부작용이 없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대체 돼지는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아버지들의 아버지>는 ‘최초의 인간’의 정체를 발견한 고생물학자가 살해당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여기에 의문을 품은 잡지사의 미녀기자가 전직 기자와 더불어 이 사건을 파헤치는데, 그들이 알아낸 실체적 진실은 ‘이브’가 돼지였다는 것. 즉 영장류와 돼지가 같은 구덩이에 빠졌다가 첫 인간을 낳았지만, 돼지가 인간의 조상이라는 걸 역겨워한 학계에서 돼지 부분을 지우고 그냥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만 주장해 왔다는 게 이 소설의 요지다. 갑자기 진화론을 반대하시는 어떤 분의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된 거라는데, 동물원에 가보세요. 사람으로 되는 원숭이가 한 마리라도 있나.”  돼지와 원숭이를 같은 우리에 놓아 둔다면, 어쩌면 인간 비슷한 생물체가 한 마리쯤은 태어날지 모르겠다.

 

돼지와 사람의 밀접한 관계는 기생충에서도 확인된다. 모든 동물은 자신만의 고유한 회충을 갖는다. 사람은 사람 회충, 개는 개 회충, 고래는 고래 회충 이런 식이다. 그런데 사람이 고래 회충알을 먹으면 알이 부화되어 유충이 위를 물어뜯을지언정 사람 안에서는 절대 성충으로 자라지 않으며, 사람에서 성충이 되어 알을 낳는 건 오로지 사람 회충알 뿐이다. 돼지 회충은 예외일까? 이에 궁금증을 가진 일본의 형제 기생충학자가 있었다. 형은 사람 회충 50알을, 동생은 돼지 회충 50알을 각각 먹었는데, 형이 회충 감염으로 인한 각종 증상에 시달린 반면 동생은 시종 멀쩡했다. 이들은 이 실험을 근거로 “돼지 회충알은 사람에게 감염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버클리(Buckley JJC)란 사람이 돼지 회충의 유충을 빵에 싸서 돼지 두 마리와 나눠 먹기도 했다. 이때 돼지는 두 마리 다 돼지 회충에 걸린 반면 버클리 자신은 전혀 감염되지 않아 그 주장이 맞는다는 걸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사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타가타(Takata I )라는 일본 학자가 돼지 회충의 알을 사람한테 먹여서 감염시키는 실험에 성공한 걸 필두로 비슷한 사례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앤더슨(Anderson TJC)은 DNA 서열을 근거로 북미지역의 회충 감염자 9명이 돼지 회충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 바 있다. 또, 네이섬(Nejsum P)이라는 학자는 덴마크 학술지에 실린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덴마크에서 회충에 걸린 사람은 죄다 회충 유행지에 다녀온 사람이었는데, 비보그 주(덴마크 지명)를 조사해 봤더니 지난번에 회충에 걸린 사람은 돼지에게서 감염이 옮아간 것이었다. 우리 같은 선진국서는 이렇게 돼지에서 사람으로 회충이 전파될 수 있으니 돼지똥과 접촉하는 걸 조심해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

 

과연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여기에 대해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기생충학계는 “회충의 유행지에서 돼지회충과 사람회충의 교차감염이 일어나고 있다”는 크롬턴(Crompton DW) 박사의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고, 우리나라 역시 사람에서 나온 회충의 일부가 돼지회충이라는 게 밝혀진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돼지를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중국의 펭(Peng W)이라는 학자는 돼지에게 사람회충의 알을 감염시켜 봤는데, 47마리의 돼지 중 단 한 마리에서만 감염이 이루어졌단다. 그는 이 실험을 토대로 “둘 사이에 교차감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매우 낮은 수준일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연구윤리기준의 강화로 인해 이제 돼지회충을 사람에게 먹이는 실험을 할 수는 없지만, 펭의 실험결과로 추측하건대 사람이 돼지회충에 걸리는 건 극히 드문 경우가 아닐까 싶다. 돼지회충알을 50개나 먹었던 일본 학자에서 아무런 증상이 없었던 이유도 거기 있으리라.

 

 

드물지만 교차감염이 일어나고, 형태학적으로 구별이 안 가는데다, DNA 서열도 아주 비슷한 돼지회충과 사람회충, 이 둘의 조상이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추론일 거다. 그렇다면 최초의 숙주는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회충이 돼지로 간 것일까, 아니면 돼지회충이 사람으로 간 것일까? 사람들은 원래 나쁜 건 다 돼지 탓을 하기 마련, 클릭스(Kliks MM)란 학자가 이에 대해 명쾌하게 답했다.

 


“원래 돼지회충이 있었는데, 신석기인가 구석기시대인가 사람이 돼지를 기르게 되면서 돼지회충이 사람에게 전파된 거다. 멧돼지를 봐. 전부 돼지회충에 걸려 있잖아? 이건 돼지를 사육하기 전부터 돼지회충이 있었다는 얘기야.”

 

인간이 돼지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대략 9,000년 전이라고 한다. 실제로 25,000년 전 유적을 보면 사람들이 멧돼지를 사냥하러 다니는 벽화가 있으니, 그 이전에는 돼지를 기르지 않았던 게 확실해 보인다. 만일 멧돼지가 회충의 기원이 되는 숙주라면, 그래서 돼지를 기르면서 돼지회충이 사람에게 넘어온 것이라면 9천년 이전의 화석에선 회충알이 발견되어선 안 된다.

 

 

하지만 클릭스에게는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프랑스의 브르고뉴란 곳에서 옛 동굴이 발굴되었는데, 거기서 사람회충의 알이 발견된 것. 벽화 몇 점이 남아 있는 그 동굴은 대략 3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고, 돼지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실은 명백하다. 사람이 원래 회충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다 돼지를 키우게 됐다. 먹성이 좋은 그 돼지는 사람의 변을 먹었을 테고, 사람과 비슷한 환경을 가진 돼지의 장에서 회충 알이 부화되어 성충으로 자랐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돼지회충과 사람회충은 각각 다른 종으로 독립한 것이었다. 돼지를 기르지 않았던 아프리카 누비아 유적의 미라에서도 회충알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돼지회충을 전파한 이가 인간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래, 돼지와 사람이 밀접한 관계가 있고, 돼지에게 회충을 전파한 게 사람이라고 치자. 그게 뭐 어쨌다고? 이런 밀접한 관계 덕분에 돼지가 인간에게 장기를 이식할 가장 좋은 모델로 꼽힌다는 거다. 인공장기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용화가 요원하고, 다른 사람의 장기는 언제나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한지라, 현재 가장 실용성 있는 모델은 여러 모로 인간과 비슷한 돼지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돼지와 장기이식’으로 검색을 해보면 꽤 많은 기사가 뜨는데, 더 타임스 기사에 의하면 앞으로 10년 이내에 돼지 장기가 인간에게 이식될 수 있단다. 꼭 돼지가 우리와 밀접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올지도 모를 그 시대를 대비해서라도 돼지에 대한 편견을 교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이 돼지야!”란 말이 욕으로 통용되는 추세가 계속된다면, “돼지의 심장을 가진 사람과는 사귀지 않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심히 걱정스러우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