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렀던 흔적들

바깥 세상에 온기를…

장전 2008. 1. 3. 06:28
[문화비전]
초동일(初冬日), 바깥 세상에 온기를…
 
날 추워지면 작은 온기에도 감사 
          떨고있을 사람위한 배려 필요할때
 
문태준 시인

 

 

 

공기가 차가워졌다. 며칠 사이에 이렇게 바뀌었다. 서리가 내린 들판은 은빛으로 빛난다. 아침을 걸어가면 발자국 소리는 돌멩이처럼 단단하다. 오늘 아침에는 빈 가지에 앉은 작은 새를 보았다. 새는 쪼그라든, 빠알간 열매를 쪼고 있었다. 그 열매가 고들고들한 고두밥 같은지 연신 목을 뒤로 젖히며 열매를 쪼고 있었다. 그작은 새를 오래 올려다보았다. 잎사귀를 주워서 그 추운 풍경을 가려주고 싶었다.

이제 겨울로 들어서나 보다. 냉기가 돈다. 며칠 전 밤에 광화문 지하도를 지날 때 한 사람이 종이박스를 주워와 바닥에 깔고 벽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종이박스로 위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추운 바깥이다. 북쪽에는 살얼음이 언다고 한다. 시인 백석이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고 적은‘초동일(初冬日)’이다. 이렇게 날이 차가워지면 짚단을 가득 쌓아 놓은 짚가리가 생각난다. 그곳이 왜 양지로 기억되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들판을 다 데리고 갈 듯 바람이 거세지면 물코를 흘리는 아이들이 찾아가던 그곳. 짚가리 속에 들어앉아 고치 속 누에처럼 보내던 비좁은 시간들.

방구들이 식어 몸을 오들오들 떨던 새벽도 있었다. 그러면 우리의 아버지들은 새벽잠을 깨 다시 아궁이에 불을 넣어 주었는데, 고향이 시골인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아버지가 한 분씩 가슴 속에 아직 살아 계실 것이다. 아무튼 바깥이 추워지면 몸을 눕힐 만한 작은 온기를 소유하는 일의 행복에 대해 새삼 생각하게 된다.

가을은 여럿의 빛깔이어서 인심이 바깥을 좇게 되지만, 겨울은 추운 바람벽과 외롭고 야윈 흰빛이어서 안쪽을 돌아보게 된다. 늦가을부터 새벽에 홀로 고요히 앉아 있게 되지만, 홀로 앉아 자기 마음의 근기(根機)를 돌아보는 일의 맛은 추워지는 이 무렵부터가 제격이다.

초동일에 나는 두 가지를 생각한다. 하나는 현칙 스님이고, 하나는 화성(化成)이다. 이 둘을 바탕 삼아 마음의 근기에 대해 생각한다. 현칙 스님의 생전 일화가 있다. 노구의 현칙 스님은 얼음판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발목을 다쳤고 운신이 어려웠다. 겨우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 요강에 오줌을 눌 수 있었는데, 스님이 정작 고민했던 것은 뒤를 해결하는 문제였다. 방 안에 냄새를 피울 일이 걱정이 되었다. 해서 스님은 그날로 곡기를 끊었다. 지팡이를 짚어가며 바깥에서 뒤를 해결할 수 있을 때에야 현칙 스님은 다시 밥상을 받았다. 스스로를 단속해 마음의 그릇이 청정했다.

화성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비유이다. 사람들이 보물을 찾으러 오백 유순(由旬)이나 되는 먼 길을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몹시 피곤하고 공포심이 생겨 지금껏 온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이때 부처는 지친 일행을 위해 저곳에 쉴 곳이 있다며 가짜 도성을 만들어냈다. 부처가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 화성을 만들어 냈듯이 우리도 우리의 추운 바깥에게 화성을 만들어 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그것이 다른 생명의 고통을 연민하는 비심(悲心)이다. 우리는 멀고도 먼 길을 가는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이 작은 새와 노숙하는 마음과 더불어 동근(同根)이듯이.

나무는 단풍이 들기 시작할 때부터 다가올 겨울을 미리 준비한다고 한다. 해서 우리가 새로운 계절을 살 때 오늘 이 아침은 내일을 부르는 아침이요, 이 하루는 아슬아슬한 살얼음을 밟아 가듯 걸어가야 할 하루이다. 하늘은 눈을 준비하고 땅은 얼음을 준비하고 있다. 초동일 이 아침에 마음의 근기와 그 안팎의 온기에 대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