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독도문제 이론·자료 축적에 평생

장전 2007. 12. 17. 09:12
독도문제 이론·자료 축적에 평생
2007/04/17 1824

감정적 접근 배제 국제사회 설득 진력
외규장각 서책 반환문제 본격 부각시켜
사재 털어 연구원 세우고 장서 공개도


지난 11일 송현 백충현 교수의 급서 소식은 그의 지도 아래 국제법을 공부하였던 제자들은 물론, 평소 선생을 아끼던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2년 반 전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할 때만 하여도 청년같이 활기찬 모습을 지녀, 주위에서는 이제 강의와 학교행정의 의무로부터 벗어난 송현 선생이 한국 사회의 국제법적 과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답을 줄 것을 내심 기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차에 홀연 타계 소식을 접하니 세상사의 허망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송현 선생은 서울 법대에서 수학하고 1968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근 40 성상 가까이 국제법 연구자로서 일업정진을 하였다. 광복 후 한국의 1세대 국제법학자인 이한기 교수의 지도 아래 공부를 시작한 그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겪어온 학자로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국제법적 도전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하여 평생 진력하였다.

1974년 문세광 사건을 계기로 국내 최초로 범죄인 인도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의 스승이었던 이한기 교수의 필생의 학문적 관심이었던 독도 문제에 대한 연구 성과를 한 차원 높이는 일에 진력하였다. 독도문제에 대한 우리의 민족감정적 접근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설득하는 데 필요한 학문적 축적을 묵묵히 진행하였다.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일본 땅 구석구석은 물론 교황청을 비롯한 유럽의 수많은 고문서관을 방문하였다. 그러면서도 선생은 독도에 관한 논문을 섣불리 발표하려 하지 않았다. 설익은 공개가 국익에 도움이 될 리 없다는 확신 아래 그는 문제가 터질 때마다 뒤에서 조용히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이론적 대응책을 조언하였다.

강화도 외규장각 서책 반환을 국제법적 문제로 본격적으로 부각시킨 이가 그였으며, 일제의 조선 병탄 과정에서의 각종 강박조약의 체결절차상 숨겨져 있던 법적 하자를 발굴한 이도 선생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늘 사학계와의 협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원본자료의 발굴과 정확한 역사해석을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최서면 선생과의 세대를 뛰어넘은 각별한 친분은 특히 유명하다.

선생은 자신의 학문에만 정진한 학자가 아니었다. 1984년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사재를 털어 서울국제법연구원을 설립하고, 이곳에서 학자들이라면 목숨 다음으로 아끼는 자신의 모든 장서를 공개하였다. 국제법에 관한 한 그의 장서는 당시 국내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동안 수많은 후학들이 그의 책만 가지고도 석박사 학위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선생은 단지 학자로서만의 일생을 살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법과대학장, 평의원회 의장, 교무처장 등 수많은 행정직을 맡아 대학 운영에 헌신하였다. 대한국제법학회 회장, 국제인권법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는가 하면, 한국인 최초로 유엔 아프가니스탄 특별보고관(사무차장급)으로 임명되어 포연이 난무하던 현장을 누비기도 하였다.

송현 선생의 타계로 그가 수행하던 역할을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누가 맡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평생 바삐 일만 하다 돌아간 선생께서 저승에서마나 편히 쉬시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정인섭/서울대 법대 교수, 사진 서울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