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나의 스승, 나의 은인. 석호필 박사를 말한다

장전 2007. 12. 17. 09:06
<민족대표34인, 석호필> 추천인터뷰 이삼열 유네스코 사무총장
[이삼열] 나의 스승, 나의 은인. 석호필 박사를 말한다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추천사

나의 스승, 나의 은인. 석호필 박사를 말한다


이삼열 유네스코 사무총장

<민족대표 34인 석호필>은 이장락 전 서울대 수의대 교수가 1962년 스코필드의 73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집필한 ‘우리의 벗, 스코필드’와 1980년 그의 10주기를 기념해 펴낸 ‘길이 우리의 벗이어라, 스코필드’를 모아서 정리한 전기다.
1919년 3.1운동 당시 목숨을 걸고 제암리 학살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고 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과 어윤희 등의 독립열사를 직접 만나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석호필 박사.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출국되고 나서도 한국을 그리워 하다 결국은 다시 돌아와 1970년 타계할 때까지 살았다. 
이처럼 수많은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것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본보기가 되어 많은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이삼열 유네스코 사무총장도 석호필 박사로 인해 인생의 방향을 다시 잡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삼열 총장이 본 석호필 박사는 어떤 분이었을까? 





박사는 젊은 인재들을 올바르게 양성하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수의대 강좌 이외의 나머지 시간에는 대학생, 고등학생들을 만나 영어성경을 가르치면서 정신적 지도를 많이 하셨다. 이렇게 시작된 스코필드 박사와의 인연은 영어 공부에 그치지 않고 철학, 종교, 정치 사회문제에 대한 토론과 봉사활동으로 이어졌다. 항상 가난한 학생들을 돕고 직업소년학교, 야학 등을 찾아 다니며 격려금을 나눠주던 박사의 모습은 우리를 크게 감화시켰다. 박사는 철학문제와 이성적 사고에만 경도되어 있던 나에게 사회봉사와 나눔의 실천을 가르쳐주셨다.
– ‘나의 은인이자 스승인 스코필드 박사’ 추천사 중에서

 

c_DSC_0047.JPG석호필 박사와의 첫 만남은 어떠셨는지, 어떤 인연을 맺으셨는지 궁금합니다.

1958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스코필드 박사께서 외부 특별강사로 초빙돼 오셨었어요. 그 분을 민족대표 34인이라고 소개를 하는데 저로선 금시초문이었죠.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을 위해 봉사한 이야기 등을 들려 주셨는데 그 날 강연을 듣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지요. 언제 한 번 찾아 뵙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지나고 서울대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호필 박사도 당시 서울대 수의대학에 교환교수로 와계셨었는데 다행히도 우연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영어로 성경을 공부하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석호필 박사와 자주 뵐 수 있었는데 철학과 종교에 관한 여러 문제를 이야기하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68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약 10년 간 귀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스터디 그룹을 통해 지금의 아내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닌 셈이지요.


총장님께서 가까이에서 보신 석호필 박사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성격이 무척 부드럽고 온화한 분이었습니다. 반면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셨어요. 제가 만났을 때는 일흔이 다 된 연세이셨는데도 대통령 앞에서도 직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유머가 굉장히 많으셨어요. 제가 통역을 해 드리느라 박사님과 함께 강연을 다닌 적이 많았는데 청중을 사로잡는 유머와 기지가 대단하셨지요. 국제법학자로 유명한 이한기 교수가 들려준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한기 교수가 서울대에서 석호필 박사와 처음 만나서 통성명을 하는데 전공이 국제법이라고 하니까 석호필 박사가 그렇게 대단한 분인 줄 몰랐다며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하더랍니다. 이유를 물으니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법을 어떻게 공부합니까? 대단하십니다.’라고 했답니다. 사실 당시 국제법이라는 것이 명문화 되어있는 것도 아닌데다 강대국 위주로 돌아가지 않았겠습니까? 그 짧은 대화가 강렬했던지 후에 이한기 교수도 후학들을 가르칠 때 꼭 그 일화를 언급했다고 하더군요. ‘국제법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더욱 어려운 것이다.’


 

총장님의 지난 삶을 되돌아 봤을 때 석호필 박사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사실 저는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석호필 박사도 식민지 조선에 선교활동을 하러 올만큼 신앙심이 매우 투철하신 분이었지만 그 분의 신앙은 사회 참여적인 신앙이었지요. 저 또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석호필 박사님을 통해 예수의 정신이 내세에 있지 않고 현세에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현실 속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천국으로 갈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천국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죠. 관념적인 철학 속에 빠져 있던 저를 현실적인 신앙으로 이끌어내신 셈이죠. 결국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유신 반대 데모 등 정치사회운동을 하다가 외국에서 14년간이나 망명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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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호필 박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이삼열 총장님은 없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총장님이 독일에 계실 때 석호필 박사님이 한국에서 돌아가셨다던데 굉장히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제 아내는 저보다 좀더 늦게까지 한국에 남아서 거의 선생님의 임종까지 지켜보았습니다. 마지막이 조금 쓸쓸했다고 하더군요.  죽어서도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시던 분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석호필 박사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는 일반인들이 많습니다. 석호필이란 이름도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미국 드라마의 주인공의 애칭으로 더 유명해졌을 정도니까요.

저희 세대 때, 그러니까 70년대만해도 유명하셨어요. 3.1운동이 외국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도 석호필 박사의 공헌이 컸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하기 힘든 일을 외국인이 목숨을 걸고 한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정신과 사명감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특히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청소년들이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색의향기 가족들에게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통일 뒤 우리에게 남겨질 과제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과거를 들여다 보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책은 1910년부터 60년대 말까지의 우리 민족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적인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의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 민족은 때로 자화자찬에 휩쓸리거나 자학적인 평가를 내릴 때도 많은데 양쪽 다 아닙니다. 장점을 보면서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석호필 박사는 오랜 시간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하면서 애정을 가지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주신 아주 중요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유네스크의 이념 또한 세계 평화와 발전에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정리, 사진 | 홍유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