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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 단체들...

장전 2006. 4. 7. 22:16
대한민국 광복을 위해 활동한 독립군

독립군은 1920년대 만주와 연해주에서 대한민국의 광복을 위해 활동한 부대들이다.

만주에서는 대한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의군부, 광복단, 태극단, 광한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대한 통의부, 광정단 등의 독립군 조직이, 연해주에서는 혈성단, 경비대, 신민단 등이, 미국에서는 국민 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이 거둔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군 등이 거둔 청산리 대첩이었다.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였다(1920.6).

일본군은 얕보던 독립군에게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관동 지방에 주둔 중인 부대 및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부대를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여 왔다.

이에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국민회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의 연합 부대는 일본군 대부대를 맞아 6일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었다(1920.10).

큰 타격을 받은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자기들의 식민 통치에 대한 위협이라 판단하고, 이 기회에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소탕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초토화시킨 '간도 참변(1920.10)'을 일으켰다.

이후 독립군이 소련 적색군의 배신으로 참변을 당한 '자유시참변(1921)'이 일어났고 독립군 조직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재편성되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다. 이중 특히 지청천이 인솔하는 한국 독립군의 '대전자령 전투(1933)'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와 함께 한국 독립군의 3대 대첩에 속한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한·중 연합 작전은 그 후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 중국군의 사기 저하, 한·중 양 군의 의견 대립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다. 또, 임시 정부가 직할 군단 편성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하자, 대부분의 독립군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

3·1운동이 실패하자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박양섭(朴陽燮) 등 각 단체대표와 의병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1919년 4월 15일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기관으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였다.

임원으로는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 자의부장(諮議部長) 박치익(朴治翼), 군사부장 전덕원, 총무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부장 강세헌(康世憲),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부참모장 박양섭(朴陽燮), 총참모 조병준, 참모 송상규(宋尙圭)· 강규묵(康圭默)·조응걸(趙膺杰)·이정근(李廷根),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부단장 최영호(崔永浩)·김원섭(金元燮), 서무 김일(金逸), 고문 안병찬(安秉瓚) 등이 임명되었다. 본부는 류허현에 두고, 각 현에는 지단(支團)·분단(分團) 등을 설치하였다.

국내외 모두 100여개소의 지단·지부를 설치하고, 만주지역 에는 거류동포 100호 이상을 구(區)로 하여 구관(區管)을 두고 10구에 단장을 두어 자치행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국내 총지단장은 홍제업(洪濟業), 평안북도 정우범(鄭禹範), 평안남도 안창일(安昌一), 경기도 한덕리(韓悳履) 등이었다. 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 등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맹헌규(孟憲奎)·유일우(劉一優) 등은 만주 집안현(輯安縣), 장백현(長白縣)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9월 단원 20명이 함경북도 갑산 동인면 금정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파괴하였으며, 191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조병준은 평안북도 독판(督辦)으로 공채를 모집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결사대를 조직해 평안도 신의주·의주 등에서 친일세력을 처단하였다. 3월에는 평안북도 벽동군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4월에는 영유군(永柔郡)에서 우편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5∼7월에는 평안북도 철산·삭주·강계·벽동 등지의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9월에는 의주·운산·영변 등지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남겼다. 특히 독립군 파견대장 이명서(李明瑞)는 8명의 대원을 인솔하여, 8월 15일 밤 은율군의 친일파 군수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9월 10일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독립군은 이명서를 비롯하여 6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남은 대원은 중상을 입었다. 태천(泰川) 지단에서는 유림 김인수 등이 내지분치기관임시통칙(內地分置機關臨時通則)에 의한 의용대를 조직하고, 폭약을 구입, 관공서파괴를 계획하던 중 다수의 단원이 붙잡혔다. 김병연(金秉淵)·박기연(朴基淵) 등은 장백현 일대에서 자금을 모금하고 안도(安圖)·무송현 등지와 연락하여 대대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19년 말경에는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李雄海)·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호 사용을 주장한 신우현(申禹鉉)·변창근(邊昌根) 등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대립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한족회(韓族會)·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2월 류허현에서 한족회·광한단(光韓團) 등 독립운동단체들과 회합,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1910년을 전후하여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창환(金昌煥) 등은 교포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애국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 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으며, 경학사는 1912년 부민단(扶民團)으로 발전하 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 하기 위한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부민단은 1919년 4월 유하현 (柳河縣)·퉁화현[通化縣] ·싱징현[興京縣] ·환런현[桓仁縣] ·지안현[輯安縣] 등 각 현의 지도자들과 유하현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고 산하단체로 남만주 독립운동의 총본영인 군정부(軍政府)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군정부의 명칭이 문제가 되자, 대한 민국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안정근(安定根)·김병헌(金炳憲)의 제의로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 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확대, 개편하였다.

조직은 독판제(督辦制)에 의해, 독판부(督辦府) 아래 사령부·참모부(參謀部)· 정무청(政務廳)·군무청(軍政廳) 등을 두었다. 주요 간부에는 독판부 독판 이상 룡, 부독판 여준(呂準), 정무청장 이탁(李鐸), 군무청장 양재훈(梁在薰), 참모 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池靑天), 내무사장 곽문(郭文), 법무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사장 남정섭(南庭燮), 학무사장 김형식(金衡植), 군무사장 양규열(梁圭烈)이 임명되었다.

1919년 5월 3일 신흥학교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는 한편, 치다오거우[七道 溝]· 콰이다마오쯔[快大帽子]·구산쯔[孤山子]·허둥쯔[河東子]에 분교 를 두었다.

하사관 3개월, 장교 6개월, 일반독립군 1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실 시하였으며,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2천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예 하부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 의용군이 편성되었으며, 백광운(白狂雲)의 의용군 제1중대는 그 수가 800∼900명에 이르렀다.

재정은 한족회원의 헌금을 바탕으로 평안도, 경상도 지방에서 모집한 군자금으로 유지되었으며,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일제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민족 반역자와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삼수군(三水郡)의 영성주재소, 7월 강계군의 삼강주재소와 문옥면사무소를 습격한 것을 비롯하여 1920년 5월 문상식(文相植) 등이 경북 지역에서 관공서를 폭파하였다.

1920년 8월 김동순(金東淳)·한우석 (韓愚錫) 등이 조선총독부 총감을 처단하고 일제기관을 폭파하려다가 체포되었으며, 1921년에는 만주의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를 해체시켰다.

그러나 1920년 2월 현정경·현익철 등 다수의 소장년파들이 이탈하여 광한단(光 韓團)을 조직하였으며, 1920년 10월에는 일본군 토벌작전에 의해 본부는 북만주 어무현[額穆縣]으로, 의용대는 안투현[安圖縣]으로 옮겼다. 1921년 어무현에서 조직을 재정비하고, 위원장에 이탁, 경리위원장 이진산(李震山), 총사령관 박용만(朴容萬) 등이 임명되었으나, 박용만이 조선총독부에 귀순하는 등 와해의 길을 걷다가, 1922년 2월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광한단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통합되었다.

북로군정서 [北路軍政署]

1919년 만주 왕청현(汪淸縣)에서 결성된 무장항일독립군 단체. 북간도에 있던 대종교인(大宗敎人)들 중심의 중광단(重光團)은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 개편하고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일명군정회(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창립 당시의 주요인물은 서일(徐一)·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 등으로, 이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위하여 신민회(新民會)·광복회(光復會) 계열의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9년 12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시로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었는데, 무장항일운동에 적합한 군대조직으로 이루어졌다.

북로군정서 개편 당시의 임원은 총재 서일, 총사령관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경리 계화, 길림분서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 등이었다. 군정서는 근거지를 왕청현의 서대파십리평(西大坡十里坪)일대의 약 30리에 걸친 삼림지대에 두고 그 곳에 8동의 병영을 지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시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華麟) 등 다수의 장교와 각종 교재를 공급받고, 관할지역내 주민들과 국내로부터 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6개월 과정의 속성과는 과목을 정신교육·역사·군사학·술과(術科 : 병기와 부대지휘 운용)·체조 및 규령법(叫令法) 등으로 정하고, 군사훈련에서는 구한국군대식 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실시하였다. 1920년 6월에 기초훈련이 끝난 600명중에 회색 군복을 입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들어간 학생은 300명이었다. 군정서는 군사훈련 외에 노령·간도의 각 독립운동단체와 제휴하고 북만독립운동자의 연락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에도 유의하여 소학교·야학·강습소 등을 설립하는 한편, 지방산업진흥에도 편리를 도모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소·중·대대로 하되 1소대가 50명, 2개 소대를 1개중대로, 2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병력규모는 초기에는 500여명이던 것이 1920년 8월에는 1,600명을 넘어섰으며,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의 동북만주 최강정예부대가 되었고, 운영자금은 관할지역 주민으로부터 혹은 국내에서 징수되는 모금액으로 충당해 나아갔다. 이 자금은 주로 연해주에서 구입하는 무기에 사용했는데 독립군 1인당 개인장비로는 소총 1정, 탄환 500발, 수류탄 1개, 비상식량용 조 6되, 짚신 1켤레 등이었다.

1920년 10월 일제는 재만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대규모의 출병을 했지만, 그에 앞서 8월 중국군 연길영장(延吉營長)인 맹부덕(孟富德)의 종용으로 재만독립군은 이미 산간의 안전지대로 부대이동을 개시하였다. 군정서도 장백산(長白山)으로 향해 가던 중 10월에 청산리(靑山里) 어귀인 화룡현 삼도구(三道溝)에 이르러 보병·기병·야포병·공병 등의 혼성부대인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의 1만 명과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대첩으로, 10월 20일에서 23일까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한 뒤 일군의 반격을 피하여 소만국경지대인 밀산으로 계속 이동하였다. 전투 당시 독립군부대는 임시전투편제로 둘로 나뉘었다. 즉 훈련 정도가 낮은 비전투원은 사령관 김좌진 밑에 진지와 떨어진 곳에 대기하였고, 사관훈련소를 졸업한 600여명의 정예 병력은 이범석 휘하에서 일군과 대결하였다. 그 뒤 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하여 이동해 온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10여 개 독립군부대와 통합하여 안전지대인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였으나, 1922년 공산혁명을 치른 소련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는 울분을 겪었다

어느 날 북간도에서 김좌진을 찾아 온 밀사가 있었으니 서일徐一(1881-1921) 장군이 보낸 것이다. 서일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경술국치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귀의, 국내에서 활약하다가 두만강을 건너온 의병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한 인물이었다. 김좌진과 서일, 두 장군의 만남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라는 우리 나라 근대사상 가장 큰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일 장군의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이천이었다. 열 일곱 살(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경성의 함일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21세(1902년)에 졸업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망명, 이듬해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때 나이 30세였으니 김좌진보다는 8세 위였다. 그 뒤 대종교를 포교하면서 북간도 일대에서 명망을 얻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였다. 군정부는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보내준 군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1,5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일은 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우수한 교관을 물색하던 중 김좌진 장군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두 장군의 만남은 하늘이 시킨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서일 없이 김좌진이 없고 김좌진 없이 서일이 없었기 때문이다.3.1운동이 일어나고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서일의 「군정부」란 이름이 마치 또 하나의 정부가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하여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고 동시에 임시정부 산하에 들어갔다. 북로군정서는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짝을 이루어 간도 독립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북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백취 현천묵白醉 玄天默( ? -1928), 김좌진은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 김좌진은 먼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설립하여 장교 양성에 힘썼다. 이로써 서로군정서의 신흥무관학교와 버금가는 사관양성소를 운영하여 1920년 6월 첫 졸업생을 냈던 것이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는 이미 1911년에 제1기 졸업생을 냈고 1920년 8월까지 3,500명이나 되는 졸업생을 내고 있어 단연 앞서 있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에 영입된 일본군 육사출신 지청천, 김경천 과 중국 운남육군 강무학교 출신의 이범석李範錫( 1900-1972)이 초빙되어 교관으로 활동하기까지는 사관학교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했었다.

{북로군정서 사령부의 주요간부}
총사령관 김좌진 (1889-1930) : 충남 홍성 대종교 육군무관학교
참모장 이장녕 (1881-1933) : 충남 천안 대종교 육군무관학교
참모부장 나중소 (1866-1928) : 경기 고양 대종교 육군무관학교·일본 육사
참모 정인철 ( ? )
사령관 부관 박영희 (1896-1930) : 충남 부여 신흥무관학교
연성대장 이범석 (1900-1972) : 서울 대종교 중국 운남성 육군강무학교
연성대 종군대장 이민화 (1898-1923) :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사관양성소 주요간부}
소 장 : 김좌진
교수부장 : 나중소
교 관 : 이장녕, 이범석,김규식, 최상운, 이천을, 윤창현, 전성호, 강승경, 강필립, 김관, 마츠커델, 김홍국.
학도단장 : 박영희
제1학도대장 : 최준형, 서리 오상세.

김좌진은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읊었다.

"대포 소리 울리는데
온 누리 밝아오니
청구(한국) 옛 나라에도
물색이 새로우리
산영山營 달 아래
칼을 가는 나그네
철채鐵寨 바람 앞에
말먹이며 서 있네

중천에 휘날리는 깃발
천리에 닿는 듯
동하는 군악 소리
멀리도 퍼져가네

섶에 누워 쓸개 빨며
십년을 벼르던 마음
현해탄을 건너가서
원수를 무찌르세나"


8동의 병영으로 구성된 사관양성소 건물은 울창한 수풀 속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었다. 학생은 18세 이상 30세 미만의 청년을 모집하여 6개월간 속성과정으로 가르쳐 졸업 시켰다.교육과목은 정신교육· 역사(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사와 한일 관계사)·군사학· 술과(병기 조작법과 부대지휘 운영법)· 체조· 호령법 등 다섯 과목이었고 군사훈련은 대한제국 국군이 하던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군사훈련을 위해서 두 개의 연병장이 마련되었으며 사격연습 때에는 일본군의 모형을 세워 놓고 표적으로 삼았다.김좌진 장군은 또 다음과 같은 한시를 남겼다.

"칼 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 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임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刀頭風勁關山月 劒末霜寒故國心 三千槿域倭何事 不斷腥塵一掃尋)"

이렇게 해서 1920년 6월 6일 6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이들을 각각 대대·중대·소대김좌진과 대한광복단로 편성하였다. 일개 소대는 50 명이었고 2개 소대를 합해서 1개 중대(100 명), 4개 중대가 1개 대대(400 명)가 되었다. 병사들은 노란 색 모자를 쓰고 백색 복장에 태극 휘장을 달았다. 언뜻 보아 일본군과 같았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이렇게 당당하게 군복을 입고 총을 매어보기란 나라가 망한 지 10년만의 일이요 대한제국 국군이 해산 당한 지 13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는가. 비록 낯선 이국 땅에서의 일이었지만 일제와 맞서서 싸울 것을 생각하면 감격의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처럼 북로군정서의 독립군은 사관양성소 졸업생 6백 명을 기간 요원으로 하여 총 병력 1천1백 명에 달했으며 무기는 소총 8백정, 기관총 4정, 대포 수류탄 2천 발. 우마차 20량 등에 이르렀다.

북간도 일대에는 북로군정서 이외에도 신민단·군무도독부·광복단·국민회·의군부 등 모두 6개 단체가 있었다. 그래서 이들 여러 단체를 하나로 통합하거나 연합하는 문제가 절실하였다. 이리하여 1920년 5월 3일 제1차 통일회의를 비롯하여 2차 3차 회의가 열리었고 그 결과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모든 군사단체가 하나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북간도뿐만 아니라 노령연해주의 독립군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 실로 어려운 일을 해 낸 것이었다. 통합된 독립군의 편성을 보면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을 (동도군정서東道軍政署),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을 동도도독부(東道都督府), 그리고 서상열이 이끄는 노령 연해주의 독립군을 동도파견부(東道派遣府).이라 했다. 이렇게 크게 셋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대한독립군 [大韓獨立軍]

1919년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에서 총사령관 홍범도(洪範圖), 부사령관 주건(朱建), 참모장 박경철(朴景哲)은 간도국민회의 자금으로 무기를 구입하고 400여 명의 독립군을 모집하였다. 200명으로 1개 부대를 편성하고 1919년 8월 두만강을 건너 갑산(甲山)·혜산진(惠山鎭)의 일본 병영을 습격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늦가을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江界)·만포진(滿浦鎭)을 습격하여 함락시킨 다음, 자성군(慈城郡)에서 3일간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독립군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이후 거둔 첫번째 승리였으며, 일본군의 사망자는 70명이었으나 독립군은 사상자가 없었다. 이를 계기로 1920년 5월 간도국민회의 요청으로 군사행동에 보조를 맞추어오던 최진동(崔振東)·이태범(李泰範) 등이 인솔하는 도독부군(都督府軍) 200여 명과 간도국민회의 무장부대와 합류하여 일대 군단을 편성하였다.

개편 후의 부서는 사령관에 최진동(일명 최명록), 부관 안무(安武), 연대장 홍범도 밑에 이천오(李千五)·강상모(姜尙模) ·강시범(姜時範) ·조권식(曺權植)가 지휘하는 4개 중대가 있었다. 이들은 자주 두만강을 건너 온성(穩城)·무산(茂山) 등지를 습격하였으며, 당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도 전후 8회에 걸쳐 독립군의 기습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1920년 6월 일본의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1개 부대와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전원 약 1개 연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의 독립군 근거지를 공격하였지만 독립군은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하여 일본군 150여 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1920년 7월 간도의 무장독립군 단체는 김좌진이 통솔하는 1,600명의 동도군정서와 홍범도가 통솔하는 1,600명의 동도독립군서로 재편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전력을 재정비하여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 1,200여 명, 부상 2,000여 명을 내었다. 이후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보복(간도참변))으로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600명은 노령으로 근거지를 옮겨 1920년 12월에 조직된 대한독립군단에 통합되었다.

대한청년단연합회 [大韓靑年團聯合會]

3·1운동을 계기로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그 전위대로 활동하기 위하여 조직된 청년단은 1919년 말경 국내외 300여 개에 이르렀고 이에 활발한 통합 움직임이 일어났다.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약한 조재건(趙在健)·함석은(咸錫殷)·오학수(吳學洙)·지중진(池仲振) 등은 만주로 건너가 1919년 3월 안둥현[安東縣]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뽑아 항일투쟁을 벌였으나, 7명의 간부가 구속되면서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그 해 11월 안병찬은 탈출하여 훙퉁거우[弘通溝]에서 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지응진(池應晉)·함석은 등 17명과 함께 각 지방청년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청년단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19년 12월 제1회 총회에서 총재 안병찬, 부총재 김찬성(金燦星), 기관지 주필 오능조(吳能祚)가 뽑혔으며, 59개 단체에 약 3만 명의 회원이 가입하였다. 1920년 4월에 개최된 제2회 총회에서는 약간의 임원을 교체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고 의용대원을 확보하여 의용대를 조직하고 항일혈전을 전개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주요 활동은 군자금 모금과 의용대원 모집이었으며, 협회보로 《대한청년보(大韓 靑年報)》를 간행하였다. 특히 의용대원은 평안북도 벽동(碧潼)·창성(昌城)·의주·삭주 등지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여, 1920년 2월 광제청년단원 최봉린(崔鳳麟)은 일본헌병대에서 권총을 탈취하였으며, 평양청년단장 박이준(朴履俊)과 단원 11명은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붙잡혔다. 5월에는 일본경찰의 습격을 받고 함석은이 전사하였으며, 안병찬·오능조·박도명(朴道明)·김인홍(金 仁弘)·양원모(梁元模) 등 5명이 붙잡혔다. 안병찬은 관전현(寬甸縣) 지사에 의해 석방되었으나, 상하이로 건너가 활동하였고 김찬성은 베이징으로 들어감에 따라 김승만을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1920년 6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한족회(韓族會) 등과 함께 광복군 총영에 통합되었다.

대한독립군비단 [大韓獨立軍備團]

3·1운동 이후 동·북간도를 중심으로 독립전쟁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창바이현 17도구(道溝) 이동백(李東白)의 집에서 이은향(李殷鄕)·이태걸(李泰杰)·윤덕보(尹德甫) 등이 국내의 상황을 탐사하고 무장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 창바이현에 본단과 지단을 설치하고 각 지방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임원은 단장 이은향, 부장 이태걸, 군사부장 이동백, 재무부장 윤덕보, 참모부장 김찬(金燦), 경찰부장 정삼성(鄭三星), 문사부장 김종기(金宗基), 외교부장 조훈(趙勳), 소집부장 김정익(金鼎益), 공창부장 김진무(金振武), 총무 오주환(吳 周煥)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함경남도 출신으로 함경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과 단원을 모집하였다.

7월에는 함경남도 풍산군의 주병록(朱丙祿)을 통해 풍산통신지국을 설치하였다. 함경남도 이원군에는 지국을 설치하고 지국장 김병기(金秉琦), 서기 김창렬(金昌烈), 연락통신원 박계삼(朴桂三)·이이준(李利濬) 등으로 하여금 지역상황, 조선독립에 대한 여론, 일본정부의 시정방침, 독립운동가의 주소·성명, 일본경 찰의 배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민심 등을 조사하게 하였다. 8월에는 김택률(金澤律)이 함경남북도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단원 23명과 함께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2월에는 강용수(姜龍秀)·강익현(姜益 鉉) 등이 입단했으며, 1921년에는 본부를 창바이현 8도구 독암리(獨巖里)나 푸쑹현(撫松縣) 화카이산(花開山)으로 옮겼다. 부장(副長)·경찰·군사·외교 등의 부서가 폐지되고, 총무·법무·통신·훈련·무기감수·수령·주찰(週察)·경호·통신사무국장 등이 신설되었으며, 이희삼(李熙三)이 총단장이 되었다.

7월에는 무력으로 일본 관청을 습격하고 그 관헌을 살해한다는 행동강령에 따라 중대장 이영식(李永植), 참모장 이병호(李炳浩)가 지휘하는 제1중대 28명이 평안북도와 함경남도에서 일본경찰과 교전하였다. 9월에는 제1중대 제3소대 제1분대 분대장 김병묵(金秉默)과 대원 10명이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금정포주재소를 폭파하고 순사부장 고바야시 세이지[小林淸治]를 사살한 뒤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였다. 1921년 10월 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흥업단(興業團)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재편성되었다.

의군부 [義軍府]

국내의 의병대장이던 최익현(崔益鉉) 휘하의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하다 만주로 건너가 유림의병군(儒林義兵軍)의 중진으로 활약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경무감(警務監) 전덕천(全德天) 등 불만을 품고 있던 일부가 이탈하여 1922년에 조직하였다. 국내의 일본기관 파괴만을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에 조직도 간략하였다. 간부로는 총장 채상덕(蔡尙德), 군무총감 전덕원(全德元), 정무총감 김평식(金平植), 재무총감 이병기(李炳基), 사령관 오석영(吳錫泳), 부관 강규묵(康奎默), 사법부장 계추강(桂秋岡), 제1중대장 박일초(朴日楚), 사한장(司翰長) 박승연(朴勝衍) 등이었다. 1924년 대한통의부의 4개 중대와 함께 임시정부 직할 군대인 참의부(參議府)에 합류하였다.

태극단 [太極團]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조인관(趙仁官)·정삼승(鄭森承) 등이 중심이 되어 만주 지린성[吉林省] 지역에서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이다.

단장은 조인관이 맡았고, 최승호(崔承浩)·김동준(金東俊)·김병륜(金炳倫)·한원갑(韓元甲) 등이 주요 단원으로 참여해 만주 지린성을 중심으로 활발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2,000명에 달하는 단원으로 의용대를 편성, 국내 잠입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는 한편, 각지에 지단(支團)을 조직해 다각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21년 벌인 후창경찰대와의 전투로 이름을 떨친 이후에는, 창바이현[長白縣]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광복단·흥업단·대진단·군비단 등과 연합해 그해 11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으로 통합되었다가, 1923년 광정단(匡正團)으로 거듭났다.

광한단 [光韓團]

원래 명칭은 의흥단(義興團)이다. 당시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한족회(韓族會)의 소장파(少壯派) 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이시열(李時說)·이호원(李浩源)·김석손(金錫巽)·홍원경(洪元京) 등이 장명환(張明煥)·김관성(金觀聲)·이춘산(李春山)·김태호(金泰浩)·박정호(朴正鎬) 등 국내에서 온 40여 명과 함께 관전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서 조직했다.

이들은 모두 신진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전원위원제(全員委員制)를 채택하고, 단원간에는 정의적(情誼的)인 친목을 중시하였고 평등한 지위에서 평등한 생활을 한다는 원칙을 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직원간의 단결력이 매우 높았다.

광한단은 게릴라전을 투쟁방식으로 하는 소무장편복단체로서 국내에 침입하여 총독부관서를 파괴하고 그 관리들 및 주구를 처치하고자 했다. 활동목표는 전국 218군(郡)의 각 면에 동지를 배치하여 폭탄과 총을 준비, 조선총독부의 군사기관과 행정기관을 파괴하는 데 있었다.

한편으로 국내 각지에 기관을 배치하여 일제 기관의 파괴 및 변절자에 대한 암살 등에 전력하다가, 1922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대한국민단 등의 단체와 통합하여 통군부(統軍府)가 되었다.

광복군사령부 [光復軍司令部]

임시정부의 군무부 직할이었다. 국내에서 3 ·1 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 전 지역에 흩어져 있던 대한의용군사의회(大韓義勇軍事議會) ·한족회(韓族會)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 ·청년단연합회(靑年團聯合會) 등을 통합하기 위하여 조병준(趙秉準) ·안병찬(安秉瓚) 등이 모여서 각 단체 통합책을 협의하여, 원칙적으로 찬동하였다. 이에 각각 총회를 소집한 결과, 각 단체가 행동을 통일할 것을 결의하여 20년 2월 만주 관전현(寬甸縣) 홍통구(紅通溝) ·향로구(香爐溝)에서 결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승학(金承學) ·이탁(李鐸)의 독립단체 결성에 대한 보고에 의해 만주의 교민통치기관(僑民統治機關)을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라 하고, 군사기관을 광복군사령부라 하여 각각 임시정부의 내무부 직속 군무부 직할로 하였으며, 각 지방에는 군영(軍營)을 설치하여 군사훈련과 일제강점기의 군경기관과 행정기관에 대한 파괴활동을 전담하게 하였다.

광복군 참리부장에는 조병준, 협찬(協贊) 김승만(金承萬), 내무사장(內務司長) 신우현(申禹鉉), 외무사장 김두만(金斗萬:1924년에 변절함), 재무사장 백기준 (白基俊), 법무사장 신언갑(申彦甲), 교통사장 백의범(白義範), 경무사장 윤창수(尹昌壽)를 임명하였으며, 광복군 사령장(司令長)에 조맹선(趙孟善), 부관 및 훈련국장 여순근(呂淳根), 참모장 이탁, 군정 겸 군기국장(軍政兼軍機局長) 김승학, 군법국장 변창근(邊昌根), 군수국장 유응하(劉應夏), 군령국장 박이열(朴利烈), 소모국장(召募局長) 홍식(洪植), 정보국장에 양기하(梁基瑕)를 임명하였다.

광복군 지방 영장(營將)은 제1영장에서 제6영장까지 두었고, 그 아래에 다시 제1영 대대장(大隊長) 이하 제7대장(隊長)까지, 제2영 대대장 이하 제7대장까지, 6개 영에 3,782명의 군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20년 전개한 활동을 보면 경찰관 주재소 및 행정기관의 파괴와 교전(交戰) 건수는 78회에 이르고, 주재소 ·습격이 56개소, 면사무소 ·영림서(營林署) 방화가 20개소, 일경(日警) 사살 95명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후 시베리아에 출동한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로 벽지로 이주 분산, 수십 개의 단체로 분열되었다가 22년 만주에 있는 독립군 각 부대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통합될 때 이에 흡수되었다.

광복군총영 [光復軍總營]

광복군사령부가 해산될 때 그 중의 일부가 군대로 재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청년단연합회의 세포단체 가운데 오동진(吳東振)·윤하진(尹河振)·박태열(朴泰烈)·장덕진(張德震)이 조직 지휘한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이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될 때, 오동진은 제2영장이 되었다. 일본군의 남만주 독립군 대학살 당시 광복군사령부가 분산하여 각지로 주둔하였는데, 이 때 일본군의 앞잡이 기관으로서 자민단(自民團)·보민회(保民會)가 분열공작을 하고, 교통불편과 아울러 중국관헌의 감시로 인하여 각 부대간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에 오동진은 제2영 부대를 인솔하고 관전현에 주둔하면서 광복군총영이라 개칭, 스스로 총영장이 되고 부관(副官)에는 박태열 ·김창희(金昌熙)를 임명하였다.

국내의 천마산대(天摩山隊)를 광복군 천마별영(天摩別營)이라 하고, 벽동(碧潼)에 있는 무장단체는 벽파별영(碧波別營)이라 하여 영장에 김석하(金錫河), 총리(總理)에 이관린(李寬隣:女)을 임명하였다. 국내외 각지에서 일제 기관을 습격하여 파괴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22년 광한단(光韓團) 기타 여러 단체들과 합작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개편되면서 흡수되었다

대한통의부 [大韓統義府]

줄여서 통의부라고도 한다.1920년의 경신참변(庚申慘變)과 1921년의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래 일시 침체된 만주의 독립군은 독립전쟁 전선의 재정비와 투쟁역량의 강화를 위하여 연합적인 독립군단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22년 6월 환인현(桓仁縣)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독립군 단체 대표가 모여 통합조직체인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6월 3일 개최된 중앙직원회에서 ‘통군부를 개방하여 다른 독립군 단체와 무조건적으로 통일하자’는 결의를 한 후, 각 단체에 위원을 파견하여 교섭하였다. 그 결과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석한 남만한족통일회가 개최되어 새로운 통합기구로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다.

결성 초기 중앙본부는 마권자에 두었으며, 조직체계는 총장제로서 총장 아래에 민사부 ·교섭부 ·군사부 ·법무부 ·재무부 ·학무부 ·실업부 ·권업부 ·교통부 ·참모부 등 10개 부서를 설치하고 비서과와 사판소(査判所)를 둠으로써 민정과 군정을 겸비한 군정부(軍政府) 형태를 갖추었다.

주요 간부로 총장 김동삼(金東三), 부총장 채상덕(蔡相悳)을 선출하였다. 지방행정조직은 각 현에 총관사무소를 설치하고 총관(總管) 이하 참사(參事) ·서기(書記) ·검무감(檢務監) ·검무원(檢務員) ·통신원 등 임원을 두었는데, 1923년까지 통화현 ·환인현 ·집안현 ·관전현 ·흥안현 ·유하현 ·임강현 ·장백현 등에 총관사무소 26개를 설치하였다. 의용군 조직은 1개 대대 산하에 5개 중대와 독립중대인 유격대, 헌병대의 7개 중대로 800여 명이 소속되었다.

활동은 한인사회 통치행정과 무기 및 군자금 조달, 일제 밀정과 부일배 응징, 일본 영사관 ·경찰서 ·주재소 ·남만철도 등의 일제기관을 공격하는 무장활동 외에도, 광동학교(光東學校) 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기관지 《경종보(警鐘報)》 《대한통의부공보(大韓統義府公報)》 등을 발간하는 등 교육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다양한 구성원과 지도이념의 차이 등에서 오는 갈등으로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이탈하여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였다. 의용군 1 ·2 ·3 ·5중대가 그 해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하고, 1924년 11월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면서 통의부는 참의부 ·정의부에 흡수되었다.

광정단 [匡正團]

1922년 창바이현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흥업단(興業團)의 4단체를 연합하여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단장 김호(金虎), 총무 윤덕보(尹德甫), 군무(軍務) 강진건(姜鎭乾), 재무 김관용(金寬用), 비서 장승언(張承彦) 등의 부서를 정하고 중앙총부를 푸쑹현[撫松縣]에 두었다.

각 현에 지단과 지서를 두어 구역 내의 독립운동단체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1923년과 1924년에 소속 독립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일본 식민통치기관의 파괴와 친일파숙청을 전개했고, 무기구입·군대양성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4년 정의부(正義府)에 통합되었다.

한교공회 [韓橋公會]

1919년 7월 남만주의 한인 민족주의자들이 조직한 항일독립운동단체다.

압록강 대안의 환인현(桓仁縣)에 거주하던 손극장(孫克章)·독고욱(獨孤旭)·독고환(獨孤煥)·이천민(李天民) 등의 발기로 인근의 민족주의적 청년들이 참여하여 조직되었다. 본부는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 지부는 부근 각처에 두었다. 주요간부진은 특무부 이천민, 서무부장 손병헌(孫秉憲), 재무부장 윤세용(尹世茸), 검무부장 독고욱, 청년부장 사병희(史秉熙), 외무위원 김창천(金蒼天) 등이었다. 일제의 기관들을 습격하고 친일앞잡이들을 숙청하는 등의 항일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했다.

1922년 8월 30일 환인현 마권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한교회·대한광복단군영·대한정의군영·대한광복군총영·평북독판부·통군부 등과 함께 남만주지역의 항일연합군 정부인 통의부(統義府)를 결성했다. 이에 한교공회의 회원들도 통의부에 참모 및 의용군으로 참여하여 항일독립전쟁을 수행했다. 1923년 통의부의 분열 이후 백광운(白狂雲)·최석순(崔碩淳) 등이 결성한 참의부(參議府)에 대부분의 회원들이 참여하면서 한교공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상해대한민청년단 [上海大韓民靑年團]

1925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조직된 한국청년들의 독립운동단체다.

당시 프랑스 조계 내에서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임재호(任在鎬)는 1925년 5월 안병무(安炳武)·연충렬(延忠烈)·김석(金晳) 등에게 상하이에 거주하는 조선 청년들의 독립운동 역량의 강화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청년 조직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들과 더불어 대한민청년단을 결성했다.

임원으로는 단장에 임재호, 부단장에 안병무, 총무에 김석, 기타 평의원에 연충렬·선우혁(鮮于爀) 등이 선임되었다. 단체의 구체적인 활동목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 한인동포의 대동단결촉구와 항일의식의 고취, 학생과 유학생들의 학문진흥 등이었다.

상해대한인거류민단 [上海大韓人居留民團]

일제강점기에 상하이[上海]의 한국인 망명인사들이 조직한 동포사회 자치기관이다.

상하이로 이주하는 한국인의 수가 크게 증가하자, 거류민들의 단합과 결속을 위해 1918년 상해고려친목회(上海高麗親睦會)가 조직되었다. 친목회는 1919년 국내의 3·1운동의 소식을 듣고 〈우리들의 소식〉이라는 인쇄물을 발행한 뒤, 만주지역에 배포하여 그 지역의 3·1운동을 고양시켰다. 같은 해 6월 회장 신헌민(申獻民)이 일경에 잡히자 고일청(高一淸)이 회장직을 계승하고, 9월 22일 대한인민단(大韓人民團)으로 확대·개편하여 여운형(呂運亨)을 단장으로 선출했다.

1920년 1월 9일 상해대한인거류민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단장에 여운형, 총무에 선우혁(鮮于爀), 간사에 김보연(金甫淵)·임재호(任在鎬)를 선출했다. 3월 16일 임시정부가 국무원령으로 거류민단제를 공포하자 내무부의 감독을 받는 기관이 되었다.

운영은 19명으로 구성된 의사회를 두고, 집행기관으로서 총무 및 서무, 회계, 교육, 구제의 4개 과를 두었으며, 간사가 각 과의 일을 맡았다. 그리고 상하이 동포사회를 남1구·남2구·남3구·동구·서구·북구의 6개구로 나누고, 각 구의 구장이 통신·납세 등의 사무를 맡도록 했다. 중심활동은 주로 임시정부의 지구 행정의 수행과 학무위원회를 두어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밖에 의경대를 두어 교민 보호 및 일제 밀정 주살 등의 업무와 국어장려연설회·한국역사강연회·시국강연회를 개최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920년 10월 7일 국무원령으로 거류민단제를 폐지하고 자치적 성격을 강화한 교민단제로 개편한 뒤 상해대한교민단으로 발전했다. 임시정부가 직접 해외동포들을 통할하면서 독립운동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운동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 동포 거주 지역에 설치한 기구로서 임시정부와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대한정의군정사 [大韓正義軍政司]

1919년 3·1운동 발발 직후 동만주 안투 현[安圖縣]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한 구한국(舊韓國)의 군인과 의병들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대한정의단임시군정부(大韓正義團臨時軍政府)를 조직하고 이규(李圭)를 총재로 선출하여 본부를 안투 현 내도산(內島山)에 두었다. 군정부의 본부에는 중국 보위단(保衛團)의 이름으로 100여 명이 편성되어 있었고 샤모사허[小沙河] 훈련소에 240여 명의 청년들이 훈련중이었으며, 또 화뎬 현[樺甸縣] 구샹허(古相河)에 1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외에 사냥에 종사하면서 대기하고 있는 포수가 수백 명이 되어 1919년 10월 현재 전체 병력이 800~900명에 이르렀다. 군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권고로 1919년 10월 23일 대한정의군정사로 개칭하고 기구도 정비하여, 총재·부총재 밑에 사령관과 비서과·회계과·서무과·외교과·통신과 및 경리부를 두고, 사령관 아래에 다시 검사과·심판과·교련과·기계과와 참모부·군무부(군대편성)·경위부(사찰과·순찰과)를 두어 소관업무 일체를 관장하게 했다.

군정사는 두만강을 건너와 헌병대와 경찰서·관공서 등을 습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신문과 잡지도 발행하여 재만조선인 동포의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썼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의 협공작전으로 많은 타격을 받은 뒤 이해 12월 닝안 현[寧安縣]에서 김좌진 부대 및 이청천 군부대와 합류해 대한의용군으로 개편되었다.



대한신민단 [大韓新民團]

1919년 4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감리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독립군 단체다.

신민단·대한신민회·신민회로도 불렸다. 간부진은 단장 김규면, 부단장 한광택, 총무부장 최상진, 재무부장 이존수, 외무부장 김덕보 등이었다. 병력은 약 500명이었다. 간도의 왕칭 현[汪淸縣], 훈춘 현[琿春縣]에 각각 지부를 설치했다. 왕칭 현 지부는 병력이 약 200명이었다.

이 지부는 후에 근거지를 옌지 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이전했으며, 간부진은 단장 김준근, 부단장 박승길, 사령장관 양정하 등이었다. 대한신민단은 1920년 6월 4일의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와 6월 7일의 봉오동전투에 참여해 일본군을 무찔렀다.

훈춘사건이 일어나고 이어서 일제의 독립군 소탕전이 전개되자 훈춘 지부는 왕칭 지부와 함께 노령으로 망명·이주했다. 그뒤 군사훈련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약하던 중 1922년 12월 레닌 정부로부터 해체령 및 무장해제령을 통고받았다. 이에 단체가 재소파(在蘇派)와 만주파로 분열되었으며 결국 양쪽 모두 해체되었다

국민군단 [國民軍團]

일제강점기 하와이에 창설된 항일군사단체다.

1914년 6월 10일 오아후 섬 가할루 지방 아후마누 농장에서 설립되었다. 박용만의 주도하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鍊武部)를 확대·개편한 것이었다. 국민군단의 창설을 위한 재원은 안원규(安元奎)와 박종수(朴鍾洙)가 1,500a(에이커)의 파인애플 경작 도급(都給)을 기부하고, 박태경(朴泰敬)·한치운(韓致雲)·이치영(李致英) 등이 그해의 농사수입을 기부하여 마련됐다.

이에 박용만이 하와이 군사령부의 비공식 승낙을 얻어 미국 군제에 따라 편재하고 목총을 써서 훈련했다. 장차 만주·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광복전쟁을 할 것을 전제로 한 훈련이었다. 조직으로는 군단사령부·경리부·제작소·병학교·훈련대·별동대 등이 있었고, 박용만이 단장을 맡았다. 기숙사를 마련하여 낮에는 경작하고 저녁에는 제복을 입고 군기를 갖추었다.

북·나팔 들과 목총 350여 점을 갖추어 정식 군대에 비해 손색없는 훈련을 했으며, 미군이 쓰는 영문서적 28가지를 교과서로 사용했다. 농장 주인이 준 목재를 가지고 학도들의 손으로 영문(營門)을 건축하고 1914년 8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학도들은 군사훈련과 군사학을 배웠고, 순번을 정해 농장에서 경작도 했다. 학도가 처음에 103명에서 300여 명까지 늘어나는 등 국민군단은 1916년 10월까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동안의 경비는 경작도급 수입금과 특별의연금을 합하여 7만 8,642달러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군단경비가 5만 8,442달러, 나머지 경비는 2만 200달러에 이르렀는데, 만주·시베리아에서의 무력항쟁을 위해 적립된 것이었다. 도급계약이 끝나갈 무렵 이승만이 군사훈련보다 외교선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박용만이 실전을 위해 극동지방으로 감으로써 유지가 어려워졌다.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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