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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선 이야기]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장전 2023. 2. 24. 19:40
3시간 
 
[삼선 이야기]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2023.2.24.
 
이종웅 님의 페북 글이다. (2023.2.4)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누군가와 더불어 행복해지는 최상의 방식은 혼자서도 행복한 법을 배우는 일이다. 타자의 존재는 선택사항이지 필요가 아니다.” 《팡세》(Pensées, "생각")에서”, 날이 갈수록 구구절절이 다가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혼자서도 행복한 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여기에 이런 답글을 달았다. “한때 이런 글을 읽으면 섣불리 마구 답글을 단 적이 있습니다. 첫 사다리를 오를 적 느낌과 마지막 사다리를 오를 때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몰랐거든요.”
 
그러자 “사람들이 살면서 어떻게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고 느끼며 살아가는지 글을 한편 올려주시기를 앙망합니다.”
 
꽤 오랫동안 글 빚이 있었던 셈이다. 무슨 큰 숙제가 있으면 자꾸 뒤로 미루는 습관으로 인하여 생각만 가득할 뿐 첫 삽을 들지 않는다. 내 생각이 스스로 임계치에 도달하려는 습성 때문이다.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저절로 홍시가 될 때 가장 맛있듯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의 두 편의 고전이 생각났다. <장자>의 첫 편 「소요유(逍遙遊)」다. 장자의 소요유를 아무리 읽어봐도 더불어 “노닐고 노닐어서 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놀 지인이 없었을까?
두 번째는 <맹자>다. 맹자가 왕에게 묻는다. “혼자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즐겁습니까? (獨樂樂 與衆樂樂 孰樂)” 왕이 답한다.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이 다른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만 못합니다.”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연암 박지원의 답이다.
“천자(天子)의 존귀함과 사해(四海)의 부유함을 차지하고서도 단 하루의 즐거움을 노상 구한들 마음에 맞고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하물며 빈천하여 그 근심을 이기지 못하는 필부에 있어서랴. 이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좋음과 싫음이 외물에 좌우되고 이해득실의 계산이 마음속에 오락가락하며, 속으로 악착스레 구하고 늘 서둘러 대도 부족을 느끼는데 어느 겨를에 즐거움에 뜻을 두겠는가.”
사람에게는 생각의 깊이를 가늠하는 사다리가 있다. 장자의 깊이, 맹자의 깊이, 연암의 깊이 모두 다 다르다. 사다리의 첫 계단을 밟는 사람의 독락(獨樂)과 여락(與樂)이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올라앉은 사람의 독락(獨樂)과 여락(與樂)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종웅님은 호남 첫 국무총리를 지낸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 1917~1995년)의 맏아드님이고, 1866년 병인양요 때 의병을 일으켜 한성부로 달려가 관군을 지원하였고 1877년에는 호남 지역에 대기근이 들자 가산을 털어 빈민과 걸인을 구제한 이최선(李最善, 1825년~1883년)의 5대손이다.
 
나는 지난달 연암당과 함께 안동 여행을 했다. 함께 여행하는 장점은 많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관점을 준다. 역사뿐만 아니라 철학, 문학, 공학까지 학문의 폭이 넓은 만큼 즐거움도 다양하다. 폭넓은 사고와 다양성에서 오는 즐거움 또한 포기하기 어렵지만, 홀로 여행하는 호젓함을 방해를 받고, 시간과 공간을 타인에게 양보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많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의 80%는 홀로이고 나머지 20%는 함께한다. 그런 이유는 매우 주관적 행위인 즐거움이 타인의 간섭으로 논쟁으로 번질까 염려함이며 공감 폭이 다르면 느낌 또한 반감되기 때문이다.
 
내 경험으로 즐거움은 떨림처럼 한 번에 훅 달려든다. 그래도 사전 전문지식이 많으면 즐거움으로 달려가는 여러 개의 길을 발견할 수 있어 즐거움이 일상화되는 지루함을 피할 수 있다. 범상치 않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축적된 지식이 임계치를 넘을 때 즐거움이 지속된다는 것을 잘 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부’의 고기잡이와 ‘낚시꾼’의 고기잡이다. 어부가 고기잡이에서 즐거움을 찾기가 매우 어렵듯이 즐거움에 이해득실이 있거나, 즐거움이 외물에 의존한다면 즐거움 또한 저만치 달아난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을까? 혼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면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이든 즐거움이든 모두 주관적 행위라 타인의 시선에 방해를 받지 않을 만큼 마음속에 자족(自足)을 단단하게 움켜잡는다면 가능하다. 자족은 구족(具足)에서 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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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웅
      주신 글 너무 감사합니다. 너무 많은 생각에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조금 시간을 가지고 정리해서 선생님께 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생각으로는 개개인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은 종교든 그 어느 누구던간에 주고 받음이 없는 어떤 형태라도 조건이 간여되지 않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러한 관계는 마지막 호홉을 멈추는 단계에서나 가능할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라면 오직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자유와 행복, 그것이 자유와 행복인지 무언지도 모르는,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있을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종웅
      한가지 덧붙이자면 저는 오해와 고통을 증폭시키는 소통이라는 과정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자유와 행복은 스스로 자기와의 가혹한 싸움의 결과라는 생각입니다, 어느 누구도 간여치 않은...그것이 신이든 그 어느 누구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