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룡의 "교외(郊外)"
Ⅰ
무모(無毛)한 생활에선 이미 잊힌 지 오랜 들꽃이 많다.
더욱이 이렇게 숱한 풀벌레 울어 예는 서녘 벌에
한 알의 원숙한 과물(果物)과도 같은 붉은 낙일을 형벌처럼 등에 하고
홀로 바람의 외진 들길을 걸어 보면
이젠 자꾸만 모진 돌 틈에 비벼 피는 풀꽃들의 생각밖엔 없다.
멀리 멀리 흘러가는 구름 포기
그 구름 포기 하나 떠오름이 없다.
Ⅱ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풀밭엔 꽃잎사귀,
과일 밭엔 나뭇잎들,
이젠 모든 것이 스스로의 무게로만 떨어져 오는
산과 들이 이렇게 무풍(無風)하고 보면
아, 그렇게 푸르기만 하던 하늘, 푸르기만 하던 바다, 그보다도 젊음이란 더욱 더 답답하던 것,
한 없이 더워 있다. 한없이 식어 가는
피 비린 종언(終焉)처럼
나는 오늘 하루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
Ⅲ
바람이여,
풀섶을 가던, 그리고 때로는 저기 북녘의 검은 산맥을 넘나들던 그 무형(無形)한 것이여,
너는 언제나 내가 이렇게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 있을 땐
와 흔들며 애무했거니,
나의 그 풋풋한 것이여.
불어다오,
저 이름 없는 풀꽃들을 향한 나의 사랑이
아직은 이렇게 가시지 않았을 때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아, 사랑이여.
한 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화자가 어떤 사람이며, 그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고,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도회에서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해질 무렵 모처럼 교외로 나가서 풀꽃들을 바라보고 그 싱그러운 풀냄새에 젖으며 자신이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채 무풍 지대에서 소시민으로 살아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 '다시 한 번 불어 다오. 바람이여, / 아, 사랑이여'라고 외치고 있다.
바람이 잘 때 사물들은 제자리에 고요하게 머물러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자는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와 달라고 기원한다. 그것은 자신이 더 이상 무모(無毛)하고 무풍(無風)한 도회의 메마른 생활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저 들의 풀꽃들처럼 '풋물 같은 것에라도 젖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람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그치지 않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한낱 나뭇가지처럼 굳어진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는 숨결로 이해된다.
시인이 자신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시인은 풀잎 하나를 제대로 논의할 때 그것은 온 우주를 노래한 셈이 된다. 구체적으로 본질적인 노래, 그러면서 보다 적확하고 아름다운 언어와 운율로 나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래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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