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담양 창평 장전마을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사상가, 성리학자, 교육자였던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년∼1883년

장전 2019. 5. 6. 17:33

南道 정자기행(2853)-담양 석전재(石田齋)

뉴스일자: 2016년01월10일 18시20분

내 정사에 살면서 내 밭을 일구고서/돌아와 운림 속에 누우니 즐거움 더욱 오롯해지네
물외(物外)에 자취 감추니 뜻에 딱 맞고 / 책에는 벗이 있어 나이를 잊을 수 있네
居吾精舍鑿吾田 歸臥雲林樂更全 物外藏蹤惟適意 卷中有友可忘年

담양 창평 장전마을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사상가, 성리학자, 교육자였던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 1825년∼1883년)이 석전재(石田齋)를 지어 자신의 서제 겸 유유자자적 터로 정사를 경영하면서 읊은 시다. 원운 시에서 운림 속에서 책과 함께 늙고자 하는 자신을 수양하는  마음가짐을 읽어 낼 수 있다. 

원래는 영서당(迎瑞堂)으로 석전의 부친 일화(一華) 이규형(李奎亨,1797~1851) 선생이 정침(正寢)을 세운 후 1835년 이최선 선생이 석전제(石田齊)라 했다.  이후 1883년 화마(火魔,를 입어 중건 후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 선생이 친필로 영서당(迎瑞堂)이라 이름 지었다. 

근래에는 국제법학자로 제8대 감사원장,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하였던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1917~1995 ) 박사가 개축하였고 그의 장남 이종웅(李鍾雄)이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최선(李最善,  1825~1883)의 자는 낙유(樂裕)이고,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석전(石田)이다.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서재필과 서재창의 이모부다. 조선조 성리학의 6대가의 하나로 꼽을 정도로 대성한 학자였던 노사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으로 고제자로 15살에 노사 문하에 들어가 40년 동안 학문을 닦은 노사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저서로는 ‘석전문집 石田文集’ 4권, ‘독외필 讀猥筆’ 등을 남겼다

담양 장전 현 창평면 장화리에서 양녕대군의 15세손인 규형(奎亨)과 185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861년에는 대대로 살던 장전마을 앞에다 문일정(聞一亭)을 지었는데, 이때 스승인 기정진이 기문을 지어 주었다. 

기문에서 문일(聞一)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종친들끼리만 무리를 짓는 것은 넓은 벌판에서 여러 사람을 사귀고 뜻을 같이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래서 장차 이 정자에서 벗들과 친족 등 저보다 나은 사람들을 맞이하여 듣지 못했던 것을 잘 듣고자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였을까? 병인양요 때 호남의 종친과 친지, 친구들에게 격문을 돌려 동의계를 조직하고 의병을 일으켜 한성부로 달려가 관군을 지원했고, 호남지역에 대기근이 들자 가산을 털어 빈민과 걸인을 구제했다는 등 수 많은 숨을 업적으로 당시의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 남았다. 

이후 문일정에서는 스승을 모시고 큰 강회를 열어서 향촌에서 학문의 중심적으로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석전재와 문일정은 종족들을 회합하는 장소로써 활용되어 문중의 구심점을 바탕이 되어 위정척사운동이나 의병활동의 산지가 되었다. 

그는 송시열의 문인 5대조 기정익(奇挺翼) 기호학파의 맥을 잇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에게서 사사했으며 1863년 고종 즉위 후 삼정(三政:田稅·軍布·還穀) 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에서 지방수령의 각성과 그 실천에 부족함이 있다고 주장하고, 근본적으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고 탐욕을 부리는 것이 원인이며, 양심의 회복으로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을 것을 역설하는 삼정책을 지어 올렸으나 당시 담양군수의 방해로 조정에 전달되지 못했다. 비록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는 스승인 기정진이 병인양요 직전 1866년에 올린 상소로  병인소(丙寅疏)를 올린 영향에 무관하지 않는다. 

주 내용은 외침에 대한 6개 항목에 방비책으로 개국의 불가함을 주청한 것으로 즉 ►외침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를 막고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 위하여 먼저 조정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외국인과 접촉에 대비하여 대답할 내용을 먼저 익혀두었다가 연해 지방의 관원들로 하여금 가지고 있게 하며, ►외침을 예상하여 지세를 이용할 수 있도록 수륙의 지형을 미리 살펴두며, ►군부와 병기를 재정비하여 병사의 훈련을 기하고 ►천하에 불필요한 사람이 없듯이 이용하지 못할 방책은 없으니 방책을 널리 수집하며 ►기강을 확립하고 인심을 결합시킬 수 있는 내정개혁을 서둘러 외양의 근본을 이룩할 것 등으로 그의 내수외양책(內修外攘策)의 대안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정진은  호남지역에 새로운 학파를 형성하고 학문과 문화를 크게 부흥시키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당시 격동기에 위정척사운동으로 노사학파(蘆沙學派)를 형성케 하였으며, 이 학파를 중심으로 조선 말 민족운동의 전형적 형태인 의병투쟁을 일으킨 기우만(奇宇萬)과 기삼연(奇參衍)의 의병지도자가 출현하여 장성·광주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고 문인들 조성가(趙成家)·이최선(李最善)·정재규(鄭載圭)·오준선(吳駿善)·공학원(孔學源)·남정우(南廷瑀) 등은 항일정신을 교육을 통해 항일정신과 의병들을 양산하게 하는 산파적인 역활을 하면서 3.1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전개되면서 지금의 민주주의의 정착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 1857~1928) 이 시를 남긴 정자
위녕재(慰寗齋), 문일정(聞一亭), 물염정(同安季玉奇松友二益登勿染亭), 망미정(次望美亭韻), 송광사(同寗齋遊松廣寺.與牛峯諸益宿松廣寺), 송강정(松江亭), 취가정(醉歌亭), 망미정(望美亭), 사지당(宿四也堂 同松沙昆季宿四也堂), 여존각(題如存閣), 몽한각(題夢漢閣), 명발헌(題明發軒), 석전재(石田齋珠聯),   만취정(題晩翠亭),

이 뉴스클리핑은 http://www.hankukmail.com/newshome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