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정리를 하다가/ 윤일현
누렇게 뜬 시집에서 나온
빛바랜 흑백 명함판 사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서가에 몸을 기댄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좌충우돌하며 돌아다녔건만.
세월은 모든 것을 탈색하여
내 젊은 날들 결국은
5x7cm의 작은 평면 속
흑과 백, 명과 암으로 정리되는구나.
세상의 모든 색채 흑백 속에 가둘 수 있지만
그 색채들 또한 흑백에서 갈라져 나옴을.
밝음 끝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 다하면 새 빛이 돋아남을,
명과 백, 암과 흑만으로는
혁명도 사랑도 형상을 가질 수 없고
흑과 백, 명과 암은 서로 기대고 있음을,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흑백의 풍경 밖으로 나와 보니
지나온 길 아직 먼지 자욱하고
가야할 길 안개 속에 아득하다
강산이 몇 번 바뀌었건만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
여전히 그대로 부여잡고 있는
앙상한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새벽별 하나 가슴에 안겨주고
가장 따뜻한 시로 나를 덮어준 후
그 시집 다시 서가에 고이 꽂아주며
불쑥 찾아온 현기증을 다스린다.
- 계간 《시와반시》 2015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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