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산중을 도망 다니다가 끝내 이에야스의 포로가 된다./ Hauser & Caroline Campbell - Czardas

장전 2018. 12. 13. 11:08


적이라고는 하나, 같은 무장, 

그 대접에 실수가 있어서는 대감님의 무사도도, 저의 무사도도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 야마오카 소하치 <대망>중에서.




 적이라고는 하나, 같은 무장, 그 대접에 실수가 있어서는 대감님의 무사도도, 저의 무사도도 위신이 서지 않습니다. 후세에까지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 야마오카 소하치 <대망>중에서.


사람은 몇 겹의 껍질을 가진 존재일까. 인간은 말과 행동을 할 때 어느 깊이까지 그 본의를 감출 수 있으며, 상대의 표정과 말과 행동,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의 변이를 마주할 때 그 저의를 어디까지 헤아릴 수 있을까. 섣부른 의심은 사람을 불신하게 만들어 전체를 흔들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산중을 도망 다니다가 끝내 이에야스의 포로가 된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미쓰나리는 네 마음대로 죽이라,는 식으로 조소하듯 말을 내뱉는다. 이에야스는 그러자며 부하 규고로에게 미쓰나리를 맡긴다. 


미쓰나리와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 규고로. 순간 미쓰나리는 당황한다. 아비의 원수인 자신을 그 아들이 얼마나 잔혹하게 고문하고 죽일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서군의 장수로서 동군의 장수였던 이에야스와 동급의 자격으로 죽을 생각이었는데 자신의 쓸데없는 반발심 때문에 졸지에 개인, 즉 한낱 애송이 청년의 아비를 죽인 원수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좀 더 상을 잘 차리려고 했으나 고기는 오히려 분별없는 것 같아 삼가했습니다. 그럼 천천히 드십시오."

그러나 규고로의 진영으로 옮겨져 받은 대우는 뜻밖에도 목욕과 깨끗한 옷, 따뜻한 음식과 휴식이다. 정갈하게 만들어 죽이려나 보다, 씁쓸하게 생각하던 미쓰나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던 규고로는 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한다.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한 미쓰나리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호의에 대해 그 저의를 묻는다.


"(미쓰나리의) 가족들이 최후를 마치신 지 초 이레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제 손으로 (미쓰나리를) 처형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입니다. 귀하께서 일일이 여러 장수들에게 반발하시니 그대로 두면 누군가 귀하를 죽이려 들 것입니다. 그런 불상사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원한이 가장 큰 저에게 맡겨주신 것이지요."


미쓰나리는 쫓겨 다니느라 자신도 잊고 있던 가족의 참혹한 죽음(자결)까지 마음 쓰고 있는 적에게 감동한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듯, 이 모든 호의가 정말 이에야스의 뜻인지 어떻게 아느냐, 너의 추측일 뿐, 직접 확인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러자 규고로는 네 수준은 그런 것도 물어봐야 알 정도밖에 안 되느냐는 듯, 경멸스런 눈빛으로 이렇게 말한다.


"무사에게는 무사의 체면이 있습니다. 미쓰나리님은 내 부친의 원수가 아닙니다. 보다 큰 동군 전체 적의 대장입니다. .. 미쓰나리님을 내 손으로 처치한다면, 아버님의 죽음이 보잘것없는 게 되어버립니다. 아버님은 천하를 위해 고립된 성을 사수하다 세상을 떠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한 규고로는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 옳고 그름을 모르시는 대감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적의 대장을 맡기니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또 버릇없는 흉포한 자들이 무례한 짓을 못하도록 정중하게 대접해드리라고 명령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그 순간 미쓰나리는 처음으로 뼈가 저리게 깨닫는다. 

"졌다."


<대망>이 놀라운 건,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나 이에야스 같은 명장들 때문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감동하고 감탄하는 것은,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 장막을 여러 겹 들춰보고 그 깊은 속내와 정황을 헤아리는 작가의 심안心眼, 즉 인간에 대한 직관과 통찰력 때문이다. 작가에 대한 존경, 동시에 나는 인간의 껍질을 몇 겹이나 들춰볼 수 있는 작가인가, 하는 생각에 이어지는 깊은 한숨과 절망감. 그리고 이런 작가를 가진 나라와 국민에 대한 부러움.


좀 엉뚱한 짐작이지만, 만약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호감을 더 키울 수 있는 문화 정서였다면, 그래서 만약 <삼국지>가 아니라 <대망>에 대한 해석이 좀 더 보편적인 독서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속을 알 수 없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지만 버섯 목을 뒤집어 보일 것도 없이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이는 한국인들이고 보면, 그들의 음흉하달 수 있는 속내조차 배워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스스로 내 보이는 말과 행동 속에 또 다른 뜻을 능란하게 감출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다른 누구라도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뜻을 감추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당연하게 곱씹을 줄 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다시 뒤집어보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일찍부터 훈련받는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우리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보다는 좀 더 깊이 사람과 사실과 정황과 세상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할 때, 좀 생뚱맞기도 하겠지만 작가라는 이름을 가진 글쟁이로서, 독자에 대한 죄스러움이 생긴다. 저렇게 인간의 속을 겹겹이 풀어내는 <대망> 같은 소설이 베스트셀러인 나라와 <태백산맥>이 굉장한 명작인 줄 알고 꾸준히 베스트셀러가 되는 나라.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가 무슨 이상세계나 되는 것처럼 그려내며 세상의 모든 불행, 개인의 모든 불행은 오직 독재와 자본주의와 사회 구조 때문이라는 일괄 결론에 빠진 소설들을 쏟아내는 이 나라 문단. 세상은 가해자, 너는 피해자야. 그러니 분노해, 라고 외치는 문학 풍토가 이토록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조금 다른 위치에 있지 않았을까.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모자라 이 사람이 이 말하면 우르르, 저 사람이 저 말하면 우르르. 누군가의 '빠'가 되지 않고는, 다른 누군가를 의지하지 않고는, 자기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희망을 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던가, 괴이한 논리로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교묘히 주장하는데도 그 속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이토록 많았는가, 왜 Why를 생각하지 못하는가, 새삼 회의하는 요즘이다.


왜 이에야스는 미쓰나리를 바로 죽이지 않았을까. 왜 부하 규고로에게 맡겼을까. 왜 규고로는 아비의 원수를 당장 고문하지 않고 바로 죽이는 대신 호의를 베풀었을까. 왜 고기반찬을 분별없는 일이라고 했을까. 왜 규고로는 그토록 주군 이에야스의 뜻을 확신했을까. 왜 이에야스는 부하가 자신의 뜻을 알거라고 믿고 적장을 맡겼을까.


우리는 이에야스가, 미쓰나리가 실제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대망>은 오직 소설이다. 

소설이란 작가가 바라본 인간과 삶에 대한 해석이며 독자에게 자신의 ‘편견’을 설득하는 작업이다. <대망>의 작가 야마오카 소하치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이에야스라는 역사 속 인물을 

거인으로 설정하고, 사람이란 적어도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천하란 적어도 이런 정도 크기와 깊이를 가진 사람이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독자를 집요하게 설득한다. 


실제 이에야스와는 무관하다고 해도 좋다. 다만 작가는 자신의 그러한 목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으며 그래서, 역사 속 미쓰나리 또한 당연하게 죽이지 않는다. 그를 죽이는 순간까지도 작가는 Why를 끝없이 파고 또 파서 인간과 인간의 차이, '격格'을 엄격히 구분지어 갈라놓음으로써 미쓰나리가 전쟁술로 패한 것이 아니라 사람됨의 그릇 크기에서 처절히 패했음을 그려내고야 마는 것이다.


문학이란 사람을 파헤치는 일이다. 세상이란 사람이 사람을, 개인이 개인을 어디까지 읽고 짚어내고 헤아릴 수 있는가를, 더 깊이 상대를 읽는 사람만이 이길 수 있는 치열한 전쟁터라는 것을 조근조근 에둘러 말하는 작업, 그것이 소설이다. 그런 문학작품들을 우리가 익숙하게 읽고,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었다면.


 그 결과 조금 더 사람을 읽어낼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사람의 깊은 속을 헤아릴 수 있는 우리였더라면. 인간이란 여러 겹의 껍질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깊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진실에 대한 존중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동시에 인간이란 저마다 자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자기 계산기를 두드리는 존재라는 것까지 냉정하게 읽을 수 있는 눈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그런 통한痛恨.


인간과 욕망과 삶을 가장 쉽게, 가장 깊이, 가장 냉철하고 처절하게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다. 따라서 몇 번이나 말하지만 그 뿌리를 온통 썩어 빠지게 만든, 이 나라 작가들의 글업(文業)은 너무나 크고 무겁다. "난 소설 따위 안 읽어, 문학이 이 난리와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썩어빠진 문학이 뿜어낸 독성에 가장 취약하게 중독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이제라도, 이제라도, 썩은 뿌리를 뽑아내고 새롭게 정신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 

그래야 포스트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다시 인간으로,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TMTU. Trust Me. Trust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