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담양의 누정문화와 풍류적 성격 - 읽어보시면 유익하죠?| 『삶의 풍경소리』

장전 2018. 10. 24. 11:05
담양의 누정문화와 풍류적 성격 - 읽어보시면 유익하죠?| 『삶의 풍경소리』

박달나무님(경기지역대학)께서 올려주신 자료를 지금 열심히 읽기 쉽게 (한문)작업하여 올립니다. 학우님들께서 담양에 가시기 전에 한번쯤 읽어 보시고 가시면 매우 유익할 것입니다. 특히 국문학사를 공부하는데 매우 도움이 만히 됩니다. 

潭陽의 樓亭文化와 風流的 性格 담양의 누정문화와 풍류적 성격  


(김정석)  

                      <목차> 


1. 15~16C 시대상황(時代狀況)과 湖南士林 

2. 16C 湖南詩壇에서 ‘星山詩壇’의 位相 

3. 樓亭의 文化的 性格과 意味 

3.1 양산보(梁山甫)와 소쇄원(瀟灑園) 

3.2 金允悌와 환벽당(環碧堂) 

3.3 임억령(林億齡)과 식영정(息影亭) 

3.4 정철(鄭澈)과 송강정(宋江亭) 

3.5 송순(宋純)과 면앙적(俛仰亭) 

4. ‘星山詩壇’의 영향(影響)과 意義 

5. 맺음말 

-. 면앙집, “ 26 

-. 석천시집, 한국문집총간 27 

-. 하서전집, “ 33 

-. 사암집. “ 38 

-. 송강집, “ 46 

-. 이강로·장덕순·이경선 공저, 문학의 산실 누정을 찾아서, 시인사. 1987 

-. 정익섭, 개고 호남가단 연구, 민문고, 1989 

-. 박언곤, 한국의 정자. 대원사, 1989 

-. 임형택, “16세기 光·나지역(羅地域)의 사림층(士林層)과 송순(宋純)의 

詩世界 - 계산풍류(溪山風流)의 發展- 

고전시가의 이념과 표상, 임하 최진원 박사 정년기념논총 1991 

-. 이형권, 문화유산을 찾아서, 매일 경제신문사, 1993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 창작과 비평사, 1993 

-. 조기영, 하서시학과 호남시단, 국학자료원, 1995 

-. 허시명, 조선문인기행, 오늘의 책, 2000 

-. 박영주, 송강평전, 고요아침, 2003 

-. 기타 


1. 15~16C 시대상황(時代狀況)과 湖南士林 


조선시대 지배층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전기의 사화(士禍)와 후기의 당쟁(黨爭)을 빼놓을 수 없다. 士禍는 중소지주적 토지 소유에 기반을 둔 사림파와 대토지소유층인 훈구척신(勳舊戚臣) 간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라면, 黨爭은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후 내부에서 일어났던 권력투쟁의 한 양상이었다. 

담양의 누정문화는 이러한 사림파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림파의 뿌리는 고려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출발시키던 때부터 이어진다. 고려말 대지주 문벌귀족에 대항하여 조선왕조를 성립시킨 신진 사대부의 후예가 다시 왕권 주위에서 권력을 독점하고 부패해 가자, 은둔했던 고려말 충신의 후예들이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초기에는 정치적 박해를 면치 못하였다. 戊午, 甲子, 己卯, 乙巳년의 士禍 특히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사림파의 정장(宗匠)인 정암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유배온 지 한 달여 만에 사약을 받게 되었다. 조광조의 죽음은 사림파에게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서둘러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거나 은둔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사유 토지(私有 土地)를 생활근거로 한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조정의 관료로서 치국평천하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고, 물러나면 수신제가(修身齊家)에 더욱 힘쓰면서 강호(江湖)의 처사(處士)로서 자연을 벗삼아 여유로운 삶을 누렸다. 바로 이러한 사대부들의 생활의 양면성이 그들로 하여금 관료적 문학과 처사적 문학의 세계를 넘나들게 하였다. 이렇게 토지에 기반을 둔 생활근거가 확고하게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이현보(李賢輔)나 송순(宋純), 윤선도(潤善道) 등의 여유작작한 江湖生活이 가능했다. 관료나 처사의 위치에 관계없이 이른바 ‘귀거래(歸去來)’의 강호생활을 청풍고취(淸風高趣)로서 높이 평가하는 관념적 풍조 또한 보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교양인으로 자임하던 당시의 선비들은 곧 누정(樓亭)을 거점으로 하여 교유(交遊)의 장을 이루었고, 여기에서 흔히 유가(儒家)의 이념을 추구하여 수작작시(酬酌作詩)의 락(樂)을 누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15C 조선조에 들어서는 정치적 파란(波瀾)으로 벼슬을 마다하고 은둔한 사족(士族)들이 樓亭의 경영에 많이 참여하였다. 그 한 예로 世祖의 찬탈과 단종(端宗)의 폐위로 정치적 현실을 떠나 湖南으로 낙남(落南)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한 누정의 이름과 관계된 인물을 보면 무안의 유산정(遊山亭)(박익경朴益卿), 함평의 영수정(潁水亭)(이안李岸), 고흥의 서산정(西山亭)(송간宋侃), 곡성의 오대정(鰲戴亭)(김계보金季甫), 순창의 귀래정(歸來亭)(신말주申末舟), 무주의 둔세정(박인정朴仁挺) 등 상당한 수를 헤아릴 수 있다. 그 후 무오년(戊午年)(1498)의 사화를 피하여 은둔한 선비들의 누정을 보면 장성의 관개정(冠盖亭)과 화초정(花草亭)(이재인李在仁), 화순의 해망정(海望亭)(정여해鄭汝諧), 순천의 오림정(五林亭)(신윤보) 등이 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사화의 피해로 落南하여 은신한 선비들이 누정을 찾았던 일은 그후 16C에도 계속되었다. 16C 당시 정국은 사림파 내부의 갈등으로 동·서 붕당이 시작되던 때다. 서인의 수장(首長)이었던 송강 정철은 직제학, 승지,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예조판서·형조판서·대사헌에 오르기까지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게다가 정철의 비타협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동인과 서인의 갈등은 증폭되었다.1) 그러다가 1585년 서인세력을 이끌던 율곡이 죽자, 집권당의 지위를 동인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서인의 핵심이었던 정철은 동인들의 탄핵의 표적이 되었고 궁지에 몰린 그는 관직을 버리고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이때 호남 사림계도 중앙 정계도 마찬가지로 담양·창평 쪽의 서인 세력과 광산·나주 쪼의 동인 세력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었다. 광산·나주 세력은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을 학문적 종장으로 모시고 경헌서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들의 눈에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내려와 벌이던 정철 일파의 세속적 풍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세 해 전 맏아들 기명의 죽음 때문에 4년 동안에 창평 생활을 마감하고 고양 신원동에 와 있을 때,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비밀 장계(狀啓)로 1589년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내용은 전주에 사는 홍문관 수찬 벼슬을 지냈던 정여립의 주도 아래,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하여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서울로 쳐들어와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여립은 송강과 정치적 라이벌이자 호남의 동인세력과 교류가 깊었는데, 당쟁에 염증을 느끼고 천반산 기슭 죽도에 은거하였다. 

선조는 정철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정여립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들여 심판하는 위관(委官) 자리에 앉힌다. 정여립은 전라도 진안 땅에서 자결하고 시신(屍身)은 저잣거리에서 다시 찢겨지고 말았다. 정여립을 두둔한 동인 세력들이 대거 잡혀 들어왔다. 이때 화를 입은 사람은 대동계원 1,000여 명에 달했다. 동인 세력과 전라도 유림이 큰 화를 입었는데, 특히 전라도 선비 중에서 사형당하거나 유배된 이가 20명, 다시는 벼슬에 오를 수 없게 된 이가 400명이나 되어, 전라도 유림의 씨가 말라 버렸다는 소리까지 생겨났다.2) 

오늘 답사할 담양의 누정문화는 당대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 속에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둡고 답답했던 忍苦의 세월 속에서 사림파는 정자와 누정을 짓고 그곳에 모여 학문을 논하거나 詩作을 주고 받으며 불우한 시대를 달랬다고 하겠다. 


2. 16C 湖南詩壇에서 ‘星山詩壇’의 位相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1467~1555)을 중심으로 한 ‘영남가단(嶺南歌壇)’이란 개념을 만들어낸 조윤제는 다시 호남지방에 적용시켜 ‘湖南歌壇’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면앙정 송순(俛仰亭 宋純)(1493~1583)이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를 창도해서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는 ‘江湖歌道’에서 발전된 문학적인 현상을 구체화한 개념이다. 조윤제의 견해를 받아들인 정익섭(丁益燮)은 특히 星山에서 전개되었던 시작활동을 통칭하여 星山歌壇이라 하였다. 박준규(朴焌圭)는 국문학상 김수장(金壽長), 안민영(安玟英) 등의 가객들이 경영하던 歌壇과 구별하고, 漢詩의 創作을 풍류운사(風流韻事)를 위주로 한 만남이기 때문에 詩壇이라고 명명하였다. 임형택은 면앙정의 경우를 들어 가단이라 할만한 정도의 성원이 정기적으로 모여 노래한 것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으니, 관습적인 용어인 ‘계산풍류(溪山風流)’를 제안하였다.3) 

호남의 진산 무등산 자락 그 중에서도 창평 들판을 적시며 담양고을로 흘러가는 것은 원효계곡이다. 이곳은 조선조 16세기 사림문화가 찬란하게 꽃피었던 곳으로 이름높다.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취가정, 풍암정, 명옥헌, 송강정, 면앙정 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亭子와 원림(園林)이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을 ‘정자문화권’ 또는 ‘가사문화권’이라 불러 온다. 

송순은 식영정, 소쇄원, 환벽?瑛? 일동삼승(一洞三勝)이라하여 이곳의 승지(勝地)를 통칭하여 星山洞이라 하고 여기에서 이루어진 시단을 星山詩壇이라고 한다.4) 임억령, 고경명(高敬命), 김성원(金成遠), 정철 등 성산동 사선(四仙)들이 작시창화(作詩唱和)하던 일도 이 곳이다. 

고경명, 김인후, 기대승, 송순, 임억령, 정철, 백광훈 등 16세기에 이르러 호남에서 詩情이 고조되면서 많은 시인이 배출되었다. 누정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단은 당시 호남의 시심을 절실히 드러내며 예향(藝鄕)이라는 평을 얻었고, 우리나라 시가문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16세기 호남시단은 김굉필, 최부, 송흠, 박상의 네 계열로 구분한다. 이 중 박상 계열에 송순, 임억령, 정만종, 채중길, 박순 등이 있다. 

이러한 호남 사림은 다시 명종조에 크게 나주, 화순, 함평, 보성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서경덕 계열과 광주, 장성, 담양, 성산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송순 계열로 나누어 진다. 학문적으로 主氣적이고 主心적인 경향을 띤 서경덕 계열에는 박순, 이중호, 이발, 이길, 정개청 등이 있었고, 노수신, 윤행, 윤의중, 박응남 등이 이들과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다. 

主理的이고 主情的인 성향인 송순 계열에는 김인후, 나세찬, 기대승, 임형수, 임억령, 양산보, 양응정, 유희춘, 오겸 등이 있었고 노진이 이들과 관계를 맺으며 활동하였다. 

정개청과 정철의 대립은 이들 두 계열의 정치 활동과 학문적 취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호남 사림은 선조 8년 붕당 이전인 선조 초기에 이미 학문적인 노선의 차이에 따른 정치적 쟁투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기축옥사 (정여립 사건) 이후로 서경덕 계열을 결정적으로 중앙과 향촌에서 세력을 잃었고, 송순 계열은 도학보다 문학에 경도되어 당시 학문적 주류에서 벗어나 호남 지방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송순 계열은 시주(詩酒)에 치우쳐 사습(士習)을 어지럽힌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인후, 기대승, 이항 등이 이황이나 이이 등의 학문에 상응하는 학문적 일가를 이루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 문예 진흥의 초석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시를 좋아하고, 시에 능통한 시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詩交는 인간적인 인연의 중요한 交分이 된 것이다. 이가 예부터 시인들이 누렸던 교유문화(交遊文化)의 일반적인 양상이었다고 하겠다. 이 때에 뜻이 서로 투합하여 만나는 사람들을 同人 또는 동호인(同好人)이라 이르고, 이들이 갖는 문학 활동의 단체를 詩社라 한다. 시인들의 시적 교유(交遊)로부터 시작되고, 이 시단의 활동을 통해 詩交는 더욱 활발해지며 이러한 계기에 詩社가 결성된다. 

그러나 이곳은 자연을 음풍농월하고 시문의 창자에만 치우쳤던 곳이라기보다는 당대 지식인들의 총체적인 문화활동의 장소로서 ‘계산풍류(溪山風流)’5)의 산실이기도 하다. ‘溪山風流’란 이곳 원효계곡에 머무렀던 은둔지사들의 총체적인 삶을 아우르는 말이다. 

무등산 계곡에서 溪山風流가 발생하는 데에는 영산강 상류지역의 넓은 들판과 이어져 있는 풍요로운 경제력과 정자터로 안성맞춤인 자연적 조건이 있었다. 이곳에서 세거(世居)하였던 제주 양씨, 광산 김씨, 지실(영실) 정씨 등의 경제력과 생리가 넉넉하고 산 좋고 물 맑은 계곡의 풍치가 여기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16세기 조선사회를 휩쓸었던 정치적 소용돌이 특히 중종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정치를 내새우던 사림파가 훈구파에게 된서리를 맞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시작된 것이다.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자리잡은 ‘溪山風流’는 이같은 정치적 변화에 따른 호남 사림 나름대로의 대응양상이었다. 그들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산중에 은둔하였으며,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하여 16세기 사림문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 놓았다. 그리고 무등산 계곡의 정자는 중앙 정계 탈환의 꿈을 도모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 어우러지는 절묘한 조화는 사림파들의 정신세계요 그들의 문화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16세기라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격동기를 살아갔던 지식인들의 고뇌와 사상적 체취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樓亭의 文化的 性格과 意味 

樓亭이라 하면 樓閣과 亭子의 약칭이다. 원래 樓는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벽이나 문을 두지 않고 높이 지은 다락식의 큰 집이다. 그리고 亭子 역시 벽이 없이 기둥과 지붕만으로 된 것으로 樓보다 작은 건물을 두고 말한다. 그런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누정의 형태는 변이되면서 그 쓰임에 따라 방(房)을 갖추는 樓亭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亭은 건축형식 가운데 지붕과 支柱만 있고 벽이 없는 건축물이다. 이러한 건축물이 필요한 이면에는 막힌 공간과 옥외 공간, 곧 안과 밖을 통하게 하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유서깊은 정자라고 하면 이처럼 역사가 오래되고, 뜻있는 인물들의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다.6) 

亭子에는 古來의 樓亭詩가 현액되어 있다. 중수 후에도 창건(創建) 당시의 누정시를 비롯하여 후대 인물들의 차운시(次韻詩)7)가 다수 현액(懸額)되어 있고, 이같은 누정제영(樓亭題詠)은 관계문헌을 통해서 적지 않게 전하고 있다. 누정을 출입하는 선비들은 유흥산경(遊興賞景)의 흥취(興趣)를 펴는 데에 특히 누정을 제목으로 한 제영(題詠)을 이루기 마련이다. 

이는 詩人文士들의 누정 출입과 그들의 시적 교류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파악된다. 특히 누정의 詩社가 있었던 곳에는 당시의 樓亭詩는 물론 후대의 차운시(次韻詩)가 있기 마련이다. 선비들이 누정을 건립하고 나면 동료 士族이나 후학들이 학문의 道를 익히고자 하여 모여들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선비들의 交流에는 흔히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의 모임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樓亭詩壇의 모임은 누정을 무대로 하여 詩友들과 교유하던, 주로 동호인(同好人)끼리의 경가수창(賡歌酬唱)8)의 인연으로 시작된다. 누정시인들의 작시는 본래 한시형(漢詩形)의 제영(題詠)이었다. 누정문학에는 송순의 면앙정가나 정철의 성산별곡과 같은 樓亭歌詞가 있고 또 누정시조(樓亭時調) 등 국문시가 있다. 하지만 조선조 漢詩人들이 선호하던 시문학은 바로 樓亭漢詩라고 할 수 있다.9) 


이 역시 종래의 詩形을 그대로 답습해온 우리의 전통시이며, 관행적으로 익혀온 시 형식이므로 관습시(慣習詩)라 할 전래의 문화유산이다. 그들이 갖는 누정에서의 交流詩는 호운작시(好韻作詩)가 아니면 先作詩에 대한 次韻이 주를 이룬다. 이때의 작시는 개성미를 추구하는 자설적(自說的)인 표현(表現)을 취하기 어려운 면이 있기는 하지만, 공동참여(共同參與)의 연행성(演行性)으로 말미암아 풍류운사(風流韻事)의 흥(興)을 더욱 자아내게 하여 갱가자(賡歌者)의 共感의 미의식(美意識)에 기여하는 누정시단의 한 특색으로 지적된다. 

우리나라의 누정은 왕가의 궁실과 관영으로부터 발달하였는데, 치적(治績)의 위엄과 나라의 발전을 상징하는 뜻으로 표방되어 경영되었던 것이다. 같은 취지에서 지방의 관아와 客舍 등에도 누정을 두었으며, 고을 다스리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출로 문루(門樓), 또는 城樓 등을 축조하여 관부(官府)의 위엄을 보이고, 사신(使臣) 등 빈객접대와 유관연식(遊觀宴息)의 장(場)을 삼기도 하였다. 이에는 대개 府使나 목사(牧使), 또는 영장(營將) 등 한 고을의 現官이 치적의 기념 내지는 그 표방으로 세운 것이 많았다.10)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흥성으로 많은 사찰에 누정이 건립되었는데, 이는 숭불(崇佛)의 존엄과 불교의 융성을 보이고자 하는 뜻에서 건립한 불교의 누정이다. 사찰에 세워진 고루(鼓樓), 종루(鐘樓), 등루(燈樓), 문루(門樓) 등은 같은 개념의 누정이다.11) 불가의 누정은 불사(佛事)와 유관한 일이나 훗날 유관취승(遊觀聚勝)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이르면 官家의 누정보다는 私家의 그것이 현저하게 많이 나타난다. 이 때에도 관가의 누정은 적지 않게 조영(造營)되었지만 이는 유가적(儒家的) 性格의 樓亭이었고, 조선조에는 적극적인 유교사상의 고취로 불가의 누정은 더 확대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새롭게 등장하는 누정은 유교 이념을 추구하던 사대부 사족들의 私家 위주의 경영이 많은 수를 차지하였다. 누정 조영의 주체는 곧 유학(儒學)을 생활규범으로 삼던 사람들이었고, 그 기능은 강도강학(講道講學)과 향약(鄕約) 또는 계회(契會) 등 유가의 윤리관을 중시하는 사족들의 각종 모임을 수행하는 데에 치중하게 되었다. 

處士로 자임(自任)하던 향리의 선비들은 물론 관직에 있던 사대부라도 치사(致仕)하게 되면 전장(田莊)이 있는 한적한 곳에서 별서(別墅)를 경영하기도 하고, 문도강학(問道講學) 하는 유가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처자와 같이 사는 주생활 공간 외에 승지(勝地)를 찾아 별도의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樓亭은 흔히 당대의 대표적 교양인이요 지식인이라 일컫는 사대부 사족들의 소요서식처(逍遙棲息處)요. 강도지소(講道之所)라 함은 이를 의미한다. 

李奎報는 <四輪亭記>에서 

“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은 사람이 모두 아는 바이다. 그러나 음양을 말하는 

사람은 남녀에 비유하거나, 가로나 세로의 步, 尺을 말하는 것은 만물이 모나고 둥근 

이치를 모든 형상에 응하고자 함이다. 바퀴를 4개로 하는 것은 사계절을 뜻한 것이 

요, 정자를 6척으로 한 것은 6기(六氣)를 나타낸 것이며 2개의 들보와 4기둥을 세우 

는 것은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도와 사방의 기둥이 되고자 하는 뜻이다. “ 

라고 하여 자연법칙에 준하고 그 자연의 순리를 이용하여 사회의 안정과 발전을 꾀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한낱 조그마한 정자이지만 형이상학적인 이상을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고매한 의지를 내포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규보의 정자 기능의 예에서 보듯 생활의 여유를 형이상학적으로 즐기는 퇴폐성보다는 식자(識者)와 지도자(指導者)의 깊은 학문을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12) 

그럼 본고에서는 오늘 답사의 핵심인 다섯 곳의 정자와 누정시인을 간력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쇄원(瀟灑園) (1530년) : 고경명, 기대승, 김대기, 金璇, 김성원, 김언거, 김인후, 

백광훈, 백진남(白振南), 송순, 신필(申滭), 양산보(梁山甫), 양응정, 양자순(梁子淳), 

양자징(梁子澂), 오겸(吳謙), 유사(柳泗), 윤인서(尹仁恕), 임억령(林億齡), 정철(鄭澈) 

면앙정(俛仰亭) (1533년) : 고경명, 양 경우(梁慶遇), 기대승, 윤두수(尹斗壽), 양산보, 

소세양(蘇世讓0, 송순, 박순(朴淳), 

이안눌, 임억령, 김인후, 임제(林悌), 노진(盧禛), 이황 

환벽당(環碧堂) (1555년) : 김성원(金成遠), 김윤제(金允悌), 백광훈, 고경명, 기대승, 

김인후, 송순, 양응정, 임억령, 정철 

식영정(息影亭) (1560년) : 고경명, 박광옥, 기대승, 김성원, 송순, 임억령, 

신응시(辛應時), 양자정, 정철 

송강정(松江亭) (1770년) : 죽록정(竹綠亭)을 수정(1586) 


3.1 양산보(梁山甫)와 소쇄원(瀟灑園): 사적 제304호 

애양단(愛陽壇), 오곡문(五曲門),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구역으로 구분 


양산보(梁山甫)(1503~1557)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조광조 문하에서 수학, 신진사류의 등용문이었던 현량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스승이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지석촌에 묻혀 별서정원 소쇄원을 경영하고 평생동안 은일자족(隱逸自適)한 삶을 살았다. 

소쇄원의 건립 시기는 18세에 낙향한 양산보가 장성한 1530년대로 추정한다. 당시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해 온 내종형 면앙정 송순과 사돈관계인 하서 김인후, 소쇄공 양산보가 의기투합하여 호남 사림의 정신적 상징이자 학문의 전당으로서 소쇄원의 역사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소쇄원의 명칭은 공덕장(孔德璋)의 <북산이문(北山移文)>13)(고문진보) 中에서 


“ 대저 생각컨대 고상(高尙)한 절의(節義)가 범속(凡俗)을 빼어난 풍채가 있고, 

소쇄(瀟灑)한 것이 세속을 

벗어난 思想이 있으며, 흰구름은 건너서 써 깨끗함을 견주고, 푸른 구름을 밟고서 곧 

바로 올라가야 하는 것으로 나는 지금 알고 있다. ” 

(…부이경개발속지표(夫以耿介拔俗之標)와 소쇄출진(瀟灑出塵) 

지상(之想)을 도백운이방결(度白雲以方潔)하고 

간청운이직상(干靑雲以直上)은 오방지지의(吾方知之矣)라 …) 에서 따온 것이다.14) 

소쇄원의 옛 모습은 1574년 고경명이 무등산 일대를 답사하고 쓴 <유서석록>과 하서 김인후가 노래한 <소쇄원 48詠>에 잘 나타나 있다. 또한 1755년에 목판으로 제작한 <소쇄원도>가 그 구조와 건물 배치, 조경 식물에 이르기까지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곳은 늘 우리나라 정원문화의 최고봉, 원림건축의 백미라는 찬사가 따라다닐 정도로 자연의 오묘한 기운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15) 

그리고 이곳의 주요한 사용자는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다. 입구 쪽에 세워진 待鳳臺 

와 초가정자는 시원한 벽오동 그늘 아래서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다. 이 ‘기다림’의 염원은 소쇄원 전체 구성에도 중요한 건축적 개념으로 등장한다. 광풍각과 제월당은 계곡을 넘어 대봉대 쪽의 진입로를 바라보도록 구성되었다. 반대로 진입할 때의 시선은 건너편 원림의 전경을 바라보며, 동시에 길을 따라 펼쳐지는 담장과 나무 그늘들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진입방향의 근경과 이에 직각방향을 이루는 원경을 동시에 바라보도록 이중적인 시각구조를 갖는다. 배치 계획 뿐만 아니라, 시각 구성도 방문하는 손님의 동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3.2 김윤제(金允悌)와 환벽당(環碧堂): 
광주직할시 기념물 제 1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남향 


조선시대의 문인 鄭澈의 행적과 관련된 유적으로 환벽당(環碧堂)・ 송강정(松江亭)・식영정(息影亭)이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으로 불린다. 

환벽당(環碧堂)[일명 벽간당(碧澗堂)]도 사촌(沙村) 金允悌(1501~1572)가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나주목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지었고, 環碧堂 앞 개울 노송이 우거진 釣臺와 龍沼가 있다. 사촌 김윤제와 송강 정철이 기이한 인연으로 만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어느 여름날 낮에 김윤제는 앞개울에서 한 마리 용이 노니는 꿈을 꾸었다. 너무도 생생하여 개울가로 나가보니 정철이 멱을 감고 있었다. 14세인 정철은 조부의 묘가 있는 고향 담양에 내려와 살고 있었는데, 당시 순천에 살고 있는 형을 만나러 가려고 환벽당 앞에 지나다가 멱을 감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윤제는 정철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문하에 두고 가르쳤다. 그 인연으로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인 문화 류씨와 혼인하게 되고, 김윤제로부터 얼마간의 재산도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정철의 시비가 환벽당 마당에 있지 않고 조대(釣臺)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시비에는 <성산별곡> 중에서 조대(釣臺)와 용소(龍沼) 그리고 환벽당이 나오는 부분을 새겨 놓고 있다.16) 

환벽당은 대숲에 뚤러싸여 있는 모습을 두고 신잠(申潛)이 이름지은 것이다. 대는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성질로 군자의 행실에 비유된다. 매화, 난초, 국화와 함께 사군자그리고 소나무, 매화와 함께 추운 겨울을 꿋꿋하게 이겨 내는 장부의 기백을 지녔다고 하여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한다. ‘대쪽 같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불의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꼿꼿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17) 

지금은 대숲은 보이지 않고 해묵은 오동나무와 백일홍이 지키고 있다. 대숲보다는 아늑하게 감싸 안고 있는 산줄기와 소나무숲이 푸른 기운을 더해주는 것 같다. 

송강 정철과 누하당 김성원이 대표적인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덕령과 김덕보 형제는 그의 종손으로 영향을 받았다. 정철의 4대손 정수환(鄭守環)이 김윤제의 후손으로부터 사들여 현재 연일 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3.3 임억령(林億齡)과 식영정(息影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 1호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 

해남 출신으로 송순과 더불어 박상의 문인인 임억령(1496~1568)은 1525년에 문과에 급제, 사간원 대사원을 지냈다. 을사년에 아우 임백령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사람들을 해치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곧 을사사화가 있기 전에 골육상쟁의 파벌싸움을 예감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星山에 머물렀던 것이다. 뒷날 다시 등용되어 1557년에는 담양부사를 지냈는데 고경명, 정철, 김성원, 양웅정, 기대승, 박순 등이 그 문하에들어가 시를 배웠다. 1560년 정계 은퇴 뒤에는 식영정의 시선들과 송순, 김윤제, 양산보, 백광훈, 송익필 그리고 그의 문하생들이 중심이되어 성산시단을 형성하였던 것이다. 

식영정은 그의 사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65세)을 위해 1560년에 지은 것이다. 노장사상에 심취해 성정이 활달했던 임억령은 성산에 은거하여 강호시가를 읊었으며. 계산풍류의 시조가 되었다. 송강의 <성산별곡>은 스승 임억령의 <성산동제영> 180수를 바탕으로 지어진 것이다. 

임억령의 <식영정기(息影亭記)>에 


“ 장자에서 말하기를 옛날에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죽을 힘을 다하야 달아났다. 그런데 그림자는 이사람이 빨리 뛰면 빨리 쫓아오고 천천히 뛰면 천천히 쫓아오며 끝끝내 뒤에 붙어다녔다. 그러다 다급한 김에 

나무 그늘 아래로 달아났더니 그림자가 문득 사라져 나타나지 않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 略 내가 이 외진 두메로 들어온 것은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없애려고만 한 것이 

아니고, 시원하게 바람 타고 자연조화와 함께 어울리며 끝없는 거친 들에서 노니는 것이니 

… 그림자도 쉬고 있다는 뜻으로 식영이라 이름짓는 것이 어떠냐. 이에 김성원도 좋다고 응하였다. “ 




주변에는 정철이 김성원과 함께 노닐던 자미탄(紫薇灘)・조대(釣臺)・로자암(鸕鶿巖)・방초주(芳草洲)・서석대(瑞石臺) 등의 승경이 있었다. 지금은 광주호의 준공으로 말미암아 거의 모두가 물 속에 잠겨버리고 정자 옆에 세워진 <성산별곡>의 시비(詩碑)만이 정철의 발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3.4 정철(鄭澈)과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기념물 제 1호 


정자는 동남향으로 앉았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 정면 3칸, 측면 2칸 

정철(1536~1593)이 이곳 담양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왕자들과 어울려 지낼 정도로 명문대가였던 정철의 집안이 을사사화로 하루아침에 몰락하자, 16세인 그는 어머니를 따라 외갓집이 있는 창평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정철의 첫 번째 스승은 사촌 김윤제이고, 장성에 사는 김인후한테서는 선비의 절개와 기품을 배웠는데, 특히 그에게 배운 『大學』은 정철에게 종신토록 수양의 귀감이 되었다. 또한광산의 기대승으로부터는 학문의 방향을 깨닫고 사상의 기반을 다져갔다. 

한편 송강 정철의 문학적 스승은 담양에 은거한 면앙정 송순과 담양부사였던 석천 임억령이다. 면앙정 송순에게는 국문시가를, 석천 임억령한테서는 한시를 배웠다. 정철이 평소 따르고 흠모하던 선배로는 고경명, 기대승이 있었는데, 특히 기대승에게 <근사록>을 배워 학문의 방도를 깨우쳤다. 이렇듯 송강 정철은 당대의 이름난 문사들에 의해 길러진 총아였다고 할 수 있다.18) 

조선시대 정치의 큰 특징인 당쟁인 정철시대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정치로 상처입고 격분하고서 그는 술에 취한 듯 붓을 들었다. 그 붓끝에서 호탕하고 분명한 시가 풀어져 나왔던 것이다. 정철의 문학적 큰 업적은 마지막으로 낙향했을 때 성취된다. 49세에 대사헌을 지내고, 50세에 판돈령 직무를 수행하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난 직후였다. 정철은 그때 스승의 누각인 면앙정에서 10리쯤 떨어진 곳,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竹綠亭을 중수하여 송강정이라 이름짓고 4년 남짓 살았다. 

그후 200여년이 지나 원래의 송강정은 허물어져 주춧돌과 담장 흔적만 남았고, 언덕에는 무덤들만이 총총했다.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정철의 후손들이 무덤을 옮기게 하고 언덕에 소나무 수천 그루를 심고는 영조 46년(1770년)에 다시 정자를 지었다. 정자터 아래의 개울이 죽록천(송강은 이칭)이고 부근의 들을 죽록이라 불렀지만, 이 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정철은 은거하면서도 님으로부터 전갈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심정이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이라는 절세의 문장을 남겼다. 그런데 임금을 가까이 모시면서 성리학의 이상을 펼쳐보이고자 갈망했는데, 정철은 저의를 의심받아 힐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때 지어진 <성산별곡>은 식영정 뒷산인 별뫼가 배경이다. 식영정은 송강의 스승인 석천 임억령(林億齡)을 위해서 지어진 정자인데, 그곳에 송강을 기리는 가사비가 세워져 있다. 

이들 가사들은 원래 노래로 불려졌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들의 노래를 잃어버렸다. <성산별곡>을 지어 쓸쓸히 산 속에 묻혀 살았던 옛 스승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사미인곡>으로 선조에 대한 연모를 노래해 다시 불러 주기를 은근히 기대했다. 또 울분의 세월을 달래기 위해 세속적인 풍류에도 탐닉했다. 

김만중은 <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을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다만 이 세편이고, 천부적인 자질이 저절로 퍼지고 세속의 비리G함이 없다고 칭찬할 정도였다.19) 


3.5 송순(宋純)과 면앙정(俛仰亭): 전라남도 기념물 제 6호 

정면 3칸, 측면 2칸, 팔각지방 건물로 동남향으로 있고, 한가운데에 한칸 넓이의 방이 꾸며졌다. 기둥은 방주(方柱)를 사용하였으며 주두(柱斗)조차 생략되고, 처마도 부연(附椽)이 없는 간소한 건물 


1493년 성종 23년 제월봉 밑 기존마을에서 태어난 宋純(1493~1583)은 눌재 박상과 송세림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과거에 급제했다. 송순은 그를 추천했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자,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낙향하였다. 그 후 임금의 부름으로 두어 차례 관직에 나가기도 했지만 김안로 일파가 집권하면서는 아예 벼슬의 뜻을 버리고 면앙정을 짓고 은거하였던 것이다. 면앙은 하늘과 땅을 보고 한점 부끄러움이 없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원효계곡에서 문풍을 드높이던 송순의 은둔생활도 3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김안로 일파가 실각하자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고 홍문관 직제학으로 영전돼 간 것이다. 사화에 밀려 몇 차례의 외직과 귀양살이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76세의 노령까지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그리고 은퇴한 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14년 동안 면앙정에 머물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송순이 처음 이 정자를 지은 것은 나이 41세 되던 조선 중종 28년(1533)이었다. 원래 이 면앙정터에는 곽씨성을 가진 사람이 살았다. 어느날 금어(金魚)와 옥대(玉帶)를 두른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오락가락하는 꿈을 꾼 그는 자기 아들이 벼슬할 것이라 여겨 공부를 시켰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집안도 어려워져 곽씨는 이곳의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여 갔다. 송순이 그 터를 사 놓았다가 나중에 정자를 지었으니, 뒷날 수많은 가객, 시인, 학자의 중심이 되었다. 면앙정 송순은 이곳에서 소쇄원, 식영정을 넘나들며 호남 사림의 기틀을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김인후, 기대승, 박순, 임제, 임억령, 양산보, 정철, 김성원 등이 모두 그의 뿌리에서 뻗어 나왔다. 곽씨의 해몽은 실제로는 비록 틀렸지만 꿈은 제대로 꾸었던 모양이다. 

송순이 지은 <면앙정가>는 그 창작연대가 송순의 만년설과 40대설 두 가지 있으나, 송순의 행적에 기록된 면앙정 창건시기가 1533년이라는 점과 면앙정 창축 후 읊었다는 <면앙정 삼언가(俛仰亭 三言歌)>의 가의(歌意)가 <면앙정가>와 통하는 것으로 보아 40대설에 더 신빙성을 두고 있다. 

또한 <면앙정가>와 <무등곡>을 같은 작품으로 보는 견해와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면앙정>> 권7 <명앙정잡록> 중 이안눌(李安訥)의 시주(詩注)에 <무등곡>은 <면앙정장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어, 두개가 같은 노래임을 알 수 있다. 

면앙정은 송순이 1524년 곽씨로부터 그 터를 매입한 뒤 1531년에 짓기 시작하여 1552년에 중건하였다. 명종 7년인 1552년 담양부사 오겸의 권유와 도움으로 면앙정이 완공을 보게 되자, 성수침이 정액(亭額)을 쓰고,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짓고, 임제가 <면앙정부>를 지었다. 김인후, 고경명, 임억령, 박순 등이 <면앙정삼십영>을 지어 그곳의 뛰어난 자연 경관을 노래하였다. 

그가 87세때 과거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회방(回榜)잔치가 열렸는데, 제자들인 김인후, 기대승, 임제, 고경명, 정철 등 당대의 으뜸가는 시인 학자들이 스승의 영광을 위하여 그를 가마에 태우고 면암정을 맴돌며 경축하였던 것이다. 

송순이 타계한 후 2백년 후 정조대왕이 전라도 과거시험 제목으로 ‘하여면앙정(荷與俛仰亭)’이라는 구절을 내려 이 일을 기념하기도 했다 

정자에는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와 백호 임제의 <면앙정부>, 하서 김인후의 




4. ‘성산시단(星山詩壇)’의 영향(影響)과 의의(意義) 


누정시단의 발전은 오히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한층 흥융(興隆)하였다. 실제로 누정을 무대로 한 시회(詩會)는 물론 시사(詩社)의 결성 등은 후기의 누정시단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사대부 선비들이 일찍부터 누정의 출입을 즐기며 詩友들과 갱가(賡歌)의 장으로 삼았던 운사(韻事)가 후대에 이르면서 더욱 의미깊게 확산된 결과로 이해된다. 

詩文學上 조선조 후기의 이름있는 詩社를 보면 정약용(丁若鏞)의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비롯하여 천수경(千壽慶)이 중심이 되어 경영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와 지석관(池錫觀)이 주도한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를 손꼽는다. 



또한 서울의 필운동(弼雲洞)에 있었던 정사(亭榭)인 칠송정(七松亭)은 순조 대에 이서(吏胥) 출신인 지석관이동지들과 이곳에서 교유(交遊)하며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방불케 하는 시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칠송정 시인으로 김의령(金義齡), 박기열(朴基悅), 박기연(朴基淵), 김영면(金永冕), 조경식(曺景軾), 류원주(劉元柱) 등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위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와 <칠송정시사(七松亭詩社)>는 이른바 누정시사(樓亭詩社)이다. 특히 당시의 위항인(委巷人)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시사라는 점에서 이는 흥미를 끌게 한다. 조선조 후기 문학에 있어 누정은 士大夫 뿐만 아니라 위항인에 이르기까지 작시 풍영(作詩 諷詠)을 즐기는 지식인들에게 시적 교류(詩的 交遊)의 장소로서 퍽 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지역(湖南地域)에서 이루어졌던 조선조 후기의 이같은 누정시사(樓亭詩社)는 정읍의 원정(遠亭), 목포의 유산정(儒山亭), 구례의 용호정(龍湖亭), 운흥정(雲興亭), 광주의 운림정(雲林亭) 등 수많은 누정을 헤아릴 수 있다. 

담양의 ‘星山詩壇’ 중 <소쇄원>도 조선조 전기의 시풍이 후대에 지속적으로 계승된 대표적인 경우이다. 소쇄원은 이를 창건한 양산보로부터 그의 아들 양자징(梁子澂) 그리고 그의 손자인 양천운(梁千運)에 이르도록 대대로 경영되어온 유서깊은 제주 양시(濟州 梁氏)의 고원(故園)이다.20) 조선 전기의 누정 시인들은 이들 양산보와 양자징의 부자와 교분이 있어 왕래하며 소쇄원제영(瀟灑園題詠)을 남긴 인물이다. 전남의 누정시단을 크게 발전시킨 이들의 활약으로 소쇄원에서 펼쳐진 전기 시단의 문운(文運)은 직접적으로 후기 시단에 영향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특히 양산보의 손자인 양천운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병화(兵火)를 입은 주로 빈객 접대의 누정공간이었던 소쇄원의 광풍각(光風閣)을 복원하였다. 



이처럼 누정을 무대로 펼쳐졌던 누정시인들의 작시활동은 마침내 시회 또는 시사의 결성으로 발전하여 많은 시문학의 흥성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한시문을 애호하던지식인들이 근대에 이르도록 누정시단의 맥이 지속되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조선조 전기부터 누정풍류를 즐기던 지식인들이 누정을 交遊의 주된 장으로 삼고 부시창수(賦詩唱酬)하던 전통적 시풍의 한 영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담양 성산에서 발생한 ‘성산시단’은 후대에 시단과 가단을 형성하여 시가문학을 발전・승화하는데 일정한 공을 남겼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지금 담양 일대의 누정을 답사하면서 이곳 가사문화권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철따라 변하는 산과 들과 강의 풍정(風情)을 즐기고 자연과 더불어 생활한 우리 민족에게 이러한 누정문화는 극히 자연스럽다. 樓亭은 풍류를 즐기고 경치를 완상하고 놀이를 하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신체의 휴식이나 잔치, 놀이를 위한 기능보다는 자연인으로서 자연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려는 정신적 기능이 더 강했다고 하겠다. 강호가도(江湖歌道0를 인식했던 영남의 안동지역은 시와 노래가 대단히 발흥했지만, 그것은 학문의 성황(盛況)에 비할 바 아니었다. 江湖歌道의 성격 또한 학문=도학에 종속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光・羅 지역은 학문은 상대적으로 부진하고 문예 분야로 경사(傾斜)되었다. 이는 기질이 명랑하여 도학에 몰두하지 않는 호남 사람의 문학예술을 애호하는 성향과도 관련있다고 하겠다. 

또한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누정문화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도 확인하였다. 정치적 입장에 따라 굴곡이 심한 생애를 살았지만, 자신의 처지에 결코 낙담하지 않고 시작(詩作)과 가작(歌作)을 통해 여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자세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潭陽 樓亭文化 關聯資料)> 

1. 송순 (宋純), <면앙정가 삼언(俛仰亭歌 三言)> 
[면앙집 권 3(俛仰集 卷3)] 


면유지앙유천(俛有地仰有天)이요 정기중흥호연(亭其中興浩然)이라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러 보면 하늘. 그 가운데 정자를 지어 대자연을 노래하네 

招風月挹山川하여 扶藜杖送百年이라 

바람과 달을 부르고 산과 물을 끌어내어, 명아주 지팡이 짚고 한 백년을 살리라 



2. 宋純, <俛仰亭> (俛仰集 卷1) 


백리군사옹야평(百里群山擁野平)하니 임계모옥행초성(臨溪茅屋幸初成)이라 

백리에 뻗어내린 산맥 평야를 끌어안아, 시냇가 모옥이 이제 막 이제 막 지어졌네. 

此身不繫蒼生望하여 宜與沙鷗結好盟이라 

이몸은 창생의 원망 매이지 않아, 백구와 더불어 좋은 친구 되리로다 



3. 송순(宋純), <면앙정제영(俛仰亭題詠)> (俛仰集 卷2) 

초연우화숙운란(超然羽化孰云難)가 득와봉래제일만(得臥蓬萊第一巒)이라 

초연히 우화등선(羽化登仙)함이 누가 어렵다 하리오 봉래산 제일봉에 누워 있는 걸 


각하산천분묘묘(脚下山川紛渺渺)하니 안정천지활만만(眼前天地闊漫漫)이라 

발 아래 산천은 아스라이 펼쳐져 있고, 눈 앞의 넓디넓은 천지 끝이 없네 


붕박구만유혐착(鵬搏九萬猶嫌窄)하니 수격삼척직대건(水擊三天直待乾)이라 

구만리를 박차오르는 붕새에겐 오히려 좁고, 삼천 척의 물결은 곧바로 하늘에 닿겠네 

욕어냉풍운외거(欲御冷風雲外去)하니 요간성두대난간(腰間星斗帶欄干)이라 

시원한 바람타고 구름 밖에 떠나려 하니, 어느새 별들이 허리에 닿을 듯 난간을 둘렀네. 


4. 임억령(林億齡), <환벽당(環碧堂)> 
[석천시집 권7(石川詩集 卷七)] 


석양사제소선횡(夕陽沙際小船橫)하니 포산여연수저월(布傘如蓮水底月)이라 

쇠노종무겸제력(衰老縱無兼濟力)하니 사풍세우왕래경(斜風細雨往來輕)이라 


5. 鄭澈(1536~1593), <山寺夜吟> 


소소낙목성(蕭蕭落木聲)하니 착인위소우(錯認爲疎雨)라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 성글은 비 소리로 잘못 알고서 


호승출문간(呼僧出門看)하니 월괘계남수(月掛溪南樹)라 

중을 불러 창밖에 나가 보랬더니, 시냇가 나뭇가지에 달 걸렸다네 



6. 정철(鄭澈), <추일작(秋日作)> 


산우야명죽(山雨夜鳴竹)하니 초충추근(입)상[草蟲秋近(入)床]이라 

유년나가주(流年那可駐)리오 백발불금장(白髮不禁長)이라 




7. 권필(權韠)(1569~1613), <과송강묘(過松江墓)> 


공산목락우수수(空山木落雨蕭蕭)하니 상국풍류차적요( 相國風流此寂寥)라 

빈 산에 잎은 지고 비는 우수수, 한 세상 풍류 재상 여기 묻혔네 



추창일배난경진(惆愴一杯難更進)하여 석년가곡즉금조(昔年歌曲卽今朝)라 

애닲다, 한 잔 술을 다시 못 올려, 오늘을 이름인가 옛날 그 노래 



8. 경심영외청원소(更深嶺外靑猿嘯)하고 
연담사두백로면(煙淡沙讀白鷺眠)이라 

밤이 깊으니 고개 너머엔 원숭이가 울고, 연기가 맑으니 모래 위에는 백로가 조네 

[백련초해(百聯抄解)] 



9. 鄭澈, <장진주사(將進酒辭)> 


鄭徹 (『송강가사(松江歌辭)』) 


한잔(盞)잔먹새그려또한잔(盞)잔먹새그려 


곳것거산(筭)산노코무(無)무진(盡)진무(無)무진(盡)진 
먹새그려 


이몸주근후면지게우거적더퍼주리혀 
여가나 


류(流)뉴소(蘇)소보(寶)보장(帳)댱의만(萬)만인(人)인이우러녜나 


어옥새속새21)덥가나무백(白)양(楊)양수페가기 
곳가면 


누른흰비굴근눈쇼쇼리람불제 
뉘盞잔먹쟈고 


물며무덤우나비람불제뉘우 엇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