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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기 전 총리(우)와 윤영전 尹永典 서울대·감사원·총리실 근무 평화통일시민연대 집행위원장(좌) | ||
우리나라 근 현대사에 몇 번의 국가 위기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위기가 극복되는 듯 했으나 그렇다고 모두가 바른 발전방향으로 수습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 기간에 국무 총리직에 있었던 이한기 총리는 달랐다.
그 해 1월14일에 서울대 박종철 학생이 연행되어 경찰의 고문으로 아까운 젊은 목숨을 잃었는데 정부는 4월초에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 희망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격이었다. 5월18일에는 명동성당에서 광주민주항쟁희생자 7주년 추도미사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집전하면서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에 3명 외에 추가 2명이 고문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발표해, 정국이 소용돌이치게 되었다.
5월 26일 정부는 민심 수습을 위한 개각을 단행했는데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李漢基총리의 임명을 발표하고 있었다. 80년 9월에도 학자로 남겠다고 끝까지 고사한 그를 청렴하다는 이유로 감사원장에 임명했는데, 이번에도 대통령이 전화로 요구하고 지상 발령을 통해 어쩔 수 없이 그 직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무릇 사람들은 고위직에 임명해 달라고 로비도 한다지만 그는 몇 번이고 거절을 한분이다. 그러기에 그의 품성을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서울대에 근무했던 연고로 그를 따라 비서관으로 측근에서 일하게 되었다. 취임식이 끝나고 첫 번째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을 철저히 밝혀 신뢰받는 정부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재야와 학생들은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하였다. 그 첫 번째가 6·10 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였다. 그 날부터 명동성당을 본부로 점심때와 퇴근 시간에 넥타이부대 시민과 함께 전국적으로민주헌법 쟁취와 4·13 호헌 철폐를 요구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낮에는 시위와 데모를 하고 밤에는 농성에 참여한 수가 무려 천명이 넘게 성당에서 농성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명동성당 농성 장에서 결의한 ‘해방구’설정에 따른 대통령의 분노는 대단했다.
6월 12일 21시30분에 청화대 의전 실에서 총리공관으로 전화가 왔다. “나 전두환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한복판 명동성당에서 해방구를 설정했다는데 도대체 말이 됩니까? 엄연한 대한민국 법을 무시하고 있는 작태를 그냥 둘 수 없소. 당장 내일 해결하도록 해요.” 전화를 받고 난 총리는 난감하고 큰 일이 났다고 하시며 어찌하면 좋으냐며 한숨을 쉬었다.
이미 다른 비서관들은 퇴근하고 나밖에 없었다. 나는 “총리님,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발동하면 신부 수녀와 추기경까지 합세하여 반대하고 우리나라 300만 천주교 신자와 세계 4억의 카톨릭 신자에게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한국의 명동성당 사태에 대하여 기도하자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어려운 지경에 처할 지 모를 일입니다. 신중하셔야 합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사실 나는 명동성당에 가서 현장도 살펴보고 그들의 진의를 파악하기도 했기에 나의 건의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李총리께서는 안기부장 내무장관과도 대통령의 지시 사항에 대하여 전화 통화로 논의하시고 다음날 조찬 모임을 총리공관에서 갖기로 했다.
조찬 모임에서 제기된 사항은 현재 명동성당에 농성자 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강한 좌경세력이라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86년 10월 건국대 사건에서도 보았지만 공권력을 발동하여 강경진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면 사태의 악화만 초래한다는데 합의를 하고 있었다.
9시에는 청와대에서 긴급안보회의를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총리께서 복안이 있으시면 말씀해 보세요”라고 해 李총리는 “대화를 모색하여 풀어야지 강하게 대처하면 역효과”라는 답변에, 대통령은 “그럼 총리가 대화를 해서 풀자고 하시니 시도해 보지만 2일 안에 해결이 안되면 그때는 방법이 없다”고 강경 입장을 펴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여당의 중진들이 친분이 있는 카톨릭 신자를 동원하여 함세웅 신부와 추기경을 면담하고 국민운동본부측과도 대화하며, 더 이상 악화되기 전에 농성을 풀기를 권했으나 농성장 분위기는 강경한 세력이 끝장을 보자고 했기에 투표까지 갔으나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섯 차례의 토론과 찬반을 물은 결과 농성해산이 우세하여 6월 14일 계성초등학교 버스 4대와 일반 2대의 버스에 승차하여 명동성당을 떠났으나, 강경 주장을 편 핵심 200여명은 끝까지 반대하다가 나중에 한사람씩 자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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