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만약 기당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합니다.”이수성(李壽成) 전 국무총리에게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ㆍ1917~95)선생은 원칙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깨우쳐준 은사이다. 이 전 총리는 ‘글자 하나도 삐뚤어지게 쓰지 않는’ 기당을 배우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다.
69년 7월 ‘서울대 법대생 경찰 구타사건’이 터졌다. 서울대 법대생들이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잠복 근무 중이던 경찰을 구타하자 경찰이 주동자 처벌을 요구하며 교내 진입을 통보한 것. 당시 기당은 법대 학장이었고 이수성 전 총리는 총장 비서실장이었다.
교내진입태세인 경찰을 설득중인 이한기 법대학장
사태가 수습되고 나서 학생 처벌이 논의될 때 기당은 “학생에게 제적은 사형이다. 누구나 실수하지 않느냐. 사형은 인간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아예 뺏는 것”이라며 반대해 관철시켰다. 기당의 이 같은 행동은 이 전총리가 학생처장으로 지내는 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 총리는 서울대 총장, 국무총리, 신한국당 고문 등 큰 자리를 두루거치면서 원칙과 소신이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했다. “조금만 타협하면 눈 앞의 커다란 이익을 거머쥘 기회가 몇 번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당 선생님이라면 과연 위선적이거나 권력욕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짓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고 깨끗하게 단념했습니다.”기당이 87년 5공 말기에 국무총리를 지내다가 6월 항쟁의 와중에서 중도하차한 것을 놓고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 전 총리는 이에 대해 “기당은 법이 흔들리는 현실을 보면서 학자로서 소명의식을 느꼈을 것”이라며 “그분의 현실 참여는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라고 말했다.기당이 사망하기 며칠 전인 95년 1월 초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법대 동료들과 함께 기당과 식사를 했다. 제자들이 “기당당(黨)을 만들어서 국가를바로 세우자”고 제의하자 기당은 온화한 미소로만 일관했다. 그것이 그분과의 마지막 자리가 될 줄이야….
기당은 일본 규슈(九州) 가고시마현에서요양 중 심장마비로 78세에 타계했다. 이 전 총리는 서울대 병원 영안실로달려가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이했고 관을 직접 맸다. 이 전 총리는 해마다 전남 담양에 있는 기당 묘소를 찾고 있다.
맨좌측에서 두번째가 필자(이수성전 총리)
1969년 법대학장 재직 무렵(?)의 이한기박사
노년의 기당 이한기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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