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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대구를 지나실 기회가 있으시면, 전화 한번 주십시오. / 단비 Best Collection

장전 2015. 2. 5. 20:13

보내주신 책 잘 받았습니다. - 이진흥
제목  [5회] 이 종 웅 형님,
등록일  2001-11-21
조회수  292회

 

 

이 종 웅 형님,

1995.12.30.(토).맑음


나를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하시니까 시집을 보내주셨겠지요. 참으로 반가운 마음 어떻게 표현해야 할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방학중이고 더구나 오늘은 토요일이기 때문에 집에서 어정거릴까 하다가 그래도 학교에 가는 것이 나을까 싶어서 느즈막하게 출근을 하다가 아파트 우편함 속에서 형님의 시집을 보았습니다.

 

처음 누런 책봉투에서 李鍾雄 詩集 {산다는 건 결국 빈 손 흔드는 일이었구나}라는 표제를 보았을 때 나는 혹시? 하는 예감으로 형님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시와 시학 <젊은 시인선>이라는 글씨를 보고 이종웅이라는 <젊은 新人>이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워밍을 하는 동안 그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예감대로 서강대학 굴뚝 밑에서 대학생 교복을 입고 당인리 발전소 쪽을 바라보던 청년 이종웅 형님이 맞았습니다.

사진으로 뵈오니 이제는 머리 숱도 조금 엷어진, 안경을 쓰고 아주 말쑥한 장년의 신사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습니다.

참 반갑습니다.

헤아려보니 30년만에 형님을 책으로 만나게 된 것이 형언키 어려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지금 구체적으로 그 까마득한 세월 너머에서 형님이 나에게 보여주셨던 몇 편의 습작시편들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한 구절을 분명히 기억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어찌할 텐가/ 전나무 숲에/ 죽음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면



내가 이 구절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있다가 대학 졸업 후 <어찌할 텐가>라는 제목의 시를 한편 쓴 일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형님의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면서 혹시 그 구절이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보았는데, 형님의 시집에 전나무 숲에 죽음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면 어쩌겠느냐던 그 두렵도록 빼어난 시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구절은 형님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를 좋아하면서 어딘가에서 흡사한 구절을 따온 것이 아니었나 하고 나 혼자 추측해 본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내용은 다 잊었지만, 언젠가 <서강 타임스>에 실렸던 형님의 시 <강변에서>라는 제목이 생각납니다. 나의 기억이 맞는다면 그 시는 이번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짧은 소품들과는 달리, 련구분이 없이 상당히 유장한 호흡으로 읽혔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 당시 형님은 나에게는 대단히 재능 있는 시인 후보생(?)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나의 습작 몇 편을 형님께 보여드린 적이 있었는데 칭찬은 별로 없었고, 길게 써서 자꾸만 줄여나가라고 충고해 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아마 그때 형님은 나의 습작들이 너무 가볍고 내용이 빈약했던 데 대해 불만스럽게 몇 마디 했던 것 같았습니다.



형님이 당시 보여주었던 몇 편의 시와 특히 서강 타임스에 실렸던 형님의 시가 나에게 준 인상은 상당해서 그때 나는 형님이 앞으로 우리 나라 문단에 데뷔(?)하여 좋은 시로 이름을 날리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상급학년이 되면서부터였던가, 형님은 시 쓰는 쪽에는 차츰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학 4학년 말엔가, 한국 펜클럽 문예강습회에서 내가 시 부문 본상을 받았다는 것이 서강 타임스에 실렸는데 형님은 그것을 보고 나에게 축하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얘기들은 지금 형님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이지만, 내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 나에게 비쳐졌던 형님의 문학적 능력을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30년 동안 나는 형님에 대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학교 동창회보 속에서 형님이 무슨 D그룹인가에서 일하신다는 것과, 이OO 국무총리께서 바로 형님의 선친이 되신다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전해들은 적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사실 나에게는 고등학교 선배가 되기 때문에 형님은 대학의 동창이면서도 어딘가 어렵게 여겨졌기 때문에 친할 수 없었습니다. 나 같은 문학부 학생들이 무슨 소설책 같은 것이나 끼고 다니면서 주절대는 것을 형님은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아서 가까이 갈 수 없었고, 또한 형님은 어딘가 혼자서 겉도는 듯한 느낌(친구들하고 잘 어울리지 않는)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형님이 소식은 없지만 무슨 수필집이라도 한 권 내신게 없나? 혹은 무슨 잡지 같은 데에 시를 쓰신 게 없나 하고 몇 번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1995년이 다 저무는 12월 30일 아침, 형님은 느닷없이 한 권의 시집을 우리 집 우체통 안에 넣어주신 것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단숨에 그것을 다 읽어버렸습니다.

산다는 건 결국 빈손 흔드는 일이구나

이 제목이 무슨 悟道頌처럼 오늘 아침 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30년 전에 <어찌할 텐가 전나무 숲에 죽음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면>이라고 나에게 크고 무서운 물음을 던졌던 형님이 이제 30년 후에는 <산다는 건 결국 빈손 흔드는 일>이라고 답을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 닿기까지 형님은 여러 가지로 세파에 씻기고, 진흙탕에 빠지고, 고개에서 미끄러지고, 쓰러지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했던 경험을 통해서 도달한 깨달음(悟道)였던 듯 싶습니다.

시집을 읽어보니 사업을 하면서도 잃지 않고 지니고 계셨던 시심들이 잔잔히 느껴졌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고향과 유년시절에 대한 그리움, 세상에 대한 못마땅한 심경, 외로움, 매일의 일상생활 등등이 아무런 설명이나 구차스러운 변명 없이 산뜻하게 나타나 있어서 친근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 읽고 난 다음 아주 조심스럽게 한 말씀 올린다면, 그 옛날 형님이 보여주었던 무서운 물음, <어찌할 텐가 전나무 숲에 죽음 같은 고요가 밀려온다면>이라고 했던, 그런 형이상학적인 전율을 주던 무거운 말들이 거의 사라지고, 이제는 오히려 담담하고 가벼운 터치로 얘길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지배적으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하, 어쩌면 당연한 일일는지 모를 테지요.

고뇌하던 청춘시절의 그 관념적인 것들을 닦아내고 보니 세상이란 오히려 담담한 수묵화 같은 것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어 그 잔잔함이 우리 생의 리얼리티 바로 그것이라고 주장하실는지도......

 

그러나 옛날의 그 <어찌할 텐가...>가 주었던 존재론적 울림이 하도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형님의 시집을 다 읽고 난 나에게는 지금 푸른 하늘에 가벼이 떠가는 새털구름 같은 일말의 아쉬움도 조금은 있었다는 점을 감히 말씀드려야 형님께 정직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간 참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옛날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하루하루 아주 평범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지내고 있습니다.

 

십년 전에 시집을 한 권 냈지만, 워낙 게으르기 때문에 아직 두 번째 시집은 내지 못한 채 그냥 어영부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 답례로 보내드릴 시집이 없어 지난 여름에 묶었던 책(한국 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 한 권 부칩니다. 재미없는 글이므로 읽으실 필요는 없지만, 형님의 후배가 이런데 관심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혹시 대구를 지나실 기회가 있으시면, 전화 한번 주십시오.

술 한잔 대접하겠습니다. 형님의 얼굴을 사진으로 보니 옛날의 그 핸섬한 미남 청년의 모습이 이제는 중후한 장년의 모습으로 바뀌어서 느낌은 다릅니다만, 한번 뵙고 싶습니다.

 

나는 군대에서 제대하던 해에 이곳 대구에서 대학원 다니느라고 잠깐 머물 예정이었는데, 어쩌다가 이곳에서 좋아하는 여자도 생기고 그 여자와 결혼하고 하는 바람에 그냥 주저앉아 이제는 대구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시집의 후기에서 보니, 형님은 세 아들을 두셨는데, 나는 두 명의 딸을 두고 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독문과에서 공부했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은 전문대학에서 국어선생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새해, 그러니까 1996년 1월 4일입니다.

지난 12월 30일에 이 편지를 쓰는 도중에 학교 건물 공사 관계로 정전이 되는 바람에 편지의 뒷부분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의 컴퓨터는 무정전 전원장치가 없는 고물이므로 글을 쓸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저장명령을 해 놓아야 하는데 그날 예기치 않은 정전으로 채 저장하지 못했던 편지의 3분의 1가량이 날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 새해 연휴였기 때문에 쉬었다가 오늘 학교에 나와서 이 편지를 마무리하는 것이므로 내용이 어쩌면 횡설수설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독후감을 차분하게 쓸 생각이었는데 워낙 오랜만에 형님 만난 것 같아서 반가움에 호들갑을 떨고 만 듯 합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으니 올해에는 한번 만나 뵈올 수 있겠지요. 시간이 허락된다면 형님의 자랑스러운 고향구경도 한번 하고 싶습니다.

(담양 근처에는 蘭이 많기 때문에 蘭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따라서 가본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새해 건강하셔서 늦게 불붙기 시작한 형님의 詩作이 더욱 눈부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학생시절에 형님의 시구에서 받았던 두려운 감동을 다시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1996.1.4.
대구에서 이 진 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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