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응(相應)이란 것은 상대를 나의 주관으로 오염시키지 않을 때 가능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내 지식과 내 경험, 그리고 내 재주와 기술로 상대를 지배하려 하지 않을 때,
요컨대 상대를 내 틀 속에 가두려하지 않을 때 상응할 수가 있다.
그것이 관계의 기술이다.
우리가 ‘소통’과 ‘만남’을 자주 말한다.
그러나 평생을 만나도 단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평생을 마주하고 입이 아프게 떠들어도 단 한 번의 소통도 없다.
상응할 수 없기 때문에. 내 식으로 관계하고 ‘내 쪼대로’ 관계하기 때문에.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이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나와 너의 접접이란 것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흔히 대인(大人)이니 소인(小人)이아 하는 말을 쓴다.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만큼 대인이고
자기를 고집하는 만큼 소인이다.
자기를 포기하는 만큼 상대가 보이고 자기를 고집하는 만큼 상대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얻고 잃는 것,
다 여기에 달린 이야기다.
지혜라고 할까,
상황판단의 적합성도 결국 여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배영순 교수의 방하 한생각
-일부 발쵀
배영순(영남대 국사과교수/ baeysoon@yumail.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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