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賢者 송년 릴레이 기고] [1] 테러와의 전쟁 이후
지금 눈앞의 증거들로 보자면 새로운 시대가 부드러운 다극주의 혹은
미국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진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보다는 더욱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시대가…
2009년, 버락 오바마(Obama) 미국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기본 윤곽을 뚜렷이 드러냈다. 오바마 행정부는 체제의 성격이 매우 다른 나라의 정부들과도 대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미국 단독으로 행동하기보다는, 다른 나라들과 함께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는 미국 외교정책의 초점도 각국이 자국 영토 내에서 무엇을 하느냐에서부터 각국이 국경을 넘어 어떻게 행동하느냐로 옮겼다.
이 모든 점에서 오바마는 조지 W 부시(Bush) 전 대통령과는 다르다. 부시 행정부는 몇몇 국가들을 골라 악(惡)이라고 불렀고, 이들과는 협상하기를 대개 거부했다. 또 미국 스스로 제약을 받지 않도록, 다른 나라 정부들과 협력하는 것도 거절했다. 다른 나라들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차원을 넘어, 그 나라들의 체제를 바꾸려 했다.
물론 외교(diplomacy)를 '특혜(favor)'나, 또는 자칫하면 유약함으로 보일 수 있는 '양보(concession)'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오바마는 외교를 대외 정책의 주요 수단이라고 본다. 그는 외교가 대안(代案)적 수단들보다 더 나은 결과를 약속할 수 있을 때에는 외교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바마는 다른 나라들과 협조해 행동하는 것이 거의 항상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이는 옳은 생각이다. 이 시대를 규정하는 도전들, 예를 들어 핵확산과 테러리즘, 세계 기후변화, 전염병 등은 각국의 집단적인 노력으로만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은 현재 경제·군사적으로 지나치게 확장돼 있어서, 혼자의 자원에만 의존해서는 성공을 거둘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바마가 다른 나라의 체제 성격보다, 그 나라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옳다. 혐오스러운 정부들의 도움도 때로는 필요할 뿐 아니라, 다른 사회의 내부 체제를 바꾸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바마가 보여준 외교 정책의 변화와 그의 의사소통 기술, 개인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올 한 해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우선, 그는 다른 정부들과 기꺼이 대화하려고 했지만, 이런 의지가 자동으로 그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이란과 북한에 새롭게 유연한 태도를 보였지만, 지금까지 어느 쪽도 호응이 없다.
- ▲ 리처드 하스(Haass)·미 외교협의회 회장
중국은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꺼린다. 한반도가 불안정해져서 중국으로 대규모 난민이 유입되거나, 미국과 동맹 관계인 '통일 한국'으로 귀결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중국은 불완전하지만, 지금의 현상이 유지되는 것을 더 원한다.
러시아는 이란이 핵 야심을 자제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 같다. 오바마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공을 기울였다. 양국 간의 군축(軍縮)을 최우선 과제로 다시 올렸고, 폴란드와 체코공화국에 계획했던 미사일방어(MD) 체제 배치도 바꾸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도, 러시아는 여전히 이란에 대한 강력한 제재를 거부한다. 제재에 동의할 경우, 러시아와 이란 사이의 금융 거래가 위태로워지고, 이란이 러시아 내부의 소수 무슬림 인구를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후변화 협정을 마련하려는 외교적 노력 역시 올 한 해 이러한 국제사회의 불협화음과 씨름해야 했다. 개발도상국들은 구속력 있는 탄소배출량 제한이 자국 경제성장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다. 미 의회가 탄소규제법에 미온적인 한, 새로운 기후변화 국제협약은 2010년에도 난망(難望)해 보인다.
중동 문제에서, 오바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 재개를 공언했다. 그러나 양측의 합의 범위와 내용, 절차에 관한 이견(異見) 탓에, 여전히 교착 상태다. 여기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하마스로 양분된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서로 타협하지 못하는 점도 한 원인이다.
다른 나라의 국내 정치도 오바마가 무엇을 이룰 수 있느냐에 중요한 변수다.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부패하고 무능하니까, 탈레반 저항세력을 퇴치하려는 미군의 노력도 어려움을 겪는다. 파키스탄 정부는 테러의 위협을 인식하는 정도나 이에 대한 우선순위가 후원국인 미국과 생각이 많이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군사적 노력을 아무리 더해봐야, 극단주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의 국내 정치도 오바마가 달성하려는 외교정책 목표의 길목을 막고 있다. 미 의회가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고 FTA(자유무역협정)의 비준 동의에 반대하면서, 대통령의 추진력은 힘을 잃는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진실은 세계가 주도는커녕 관리하기도 더 어려운 곳이 됐다는 사실이다. 냉전 이후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단극(單極) 시대는 미국의 경제 관리 실패, 이라크전쟁, 다른 나라들의 잇단 부상(浮上), 세계화 등으로 인해 종언을 고했다.
밝은 면도 있다. 중국·인도·일본·러시아·유럽·브라질과 같은 다른 주요 강대국들과 미국의 관계는 오늘날 경쟁적일 뿐만 아니라 협력적이다. 20세기 국제질서를 지배했던 특징인, 강대국들 간의 갈등은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 또한 이란·북한·미얀마·쿠바·베네수엘라와 같이, 오늘날 가장 폐쇄적인 국가들도 시간이 가면서 점차 개방적이고 덜 위협적이 될 것이란 전망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장의 증거들로만 보자면 새로운 국제질서가 부드러운 다극주의 혹은 미국 주도의 시대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따라서 오바마의 다음 3년(혹은 2012년 재선에 성공할 경우엔 7년)은 그의 '성취'만큼이나 '좌절'에 의해 특징지어질 것이다.
리처드 하스(58)는 영국 옥스퍼드대 박사 출신으로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브루킹스 연구소 부소장, 아버지 부시 행정부의 외교·안보 분야 특별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 미 외교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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