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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개발의 진실

장전 2008. 12. 11. 07:33

 

다음 글은 1994년 북한 남천연합기업소 부직장장으로 핵개발 자금인 '주석궁 710호'자금책을 담당했던 김대호 씨가 귀순 10여년만에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은 피지않는다"는 자전전 소설을 통해 밝힘으로서 그동안 북한 핵개발 역사와 관련된 움직임을 폭로한 것의 주요 내용이다.

 

 
        북한 핵 개발의 진실



1945년 8.15 해방 후, 소련 붉은 군대가 북한으로 진입할 당시 스탈린은 북한 전 지역에 대한 지질 탐사도 진행하였다. 그리고 북한에 질 좋은 우라늄 광맥이 풍부히 매장되어 있다는것을 확인하였다.

그후 핵 개발 야욕을 품게 된 김일성은 자기 가문의 원수인 최진팔 일가를 멸족시키면서도 그 가문 중 소련에서 유학하며 핵물리학을 전공한 최학곤 박사를살려 주었다.  

김일성에겐 김형권이라고 하는 삼촌이 있었는데 그는 1930년대 초에 두만강을 건너와 풍산군 파발리주재소 순사부장 미쯔야마를사살하고 일제 경찰로부터 수배를 받게 되었다. 그런 것을 독립군 총관을 지낸바 있는 최진팔이란 사람이 밀고하여 김형권이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해방 후, 김일성은 그 복수로 최진팔의 가문을 멸족시키려 했는데 핵 개발을 위해 그 가문 중 유독 최학곤 박사만을 살렸던 것이다.

또한 김일성은 6.25 전쟁 직전에 인민군 5군단 정찰부장을 지낸 이학문을 서울에 파견하여 일본 교토 대학 유학시절에 이미 합성섬유 1호를 완성(1939년10월)한 세계적인 화학자 이승기 박사를 납북시켰다. 당시 이학문이 전한 김일성의 친서가 이승기 박사의 북한행 결심에 결정적 작용을 하였다. 그후, 최학곤

박사와 이승기 박사는 북한의 핵 개발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3년간의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그 전후 복구 건설이 끝난 직후인 1960대 들어서면서 영변 분강 지구에 핵 단지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1962년엔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또 영변 핵단지 안에 핵물리 대학을 설립하고, 김일성 종합대학에도 핵물리학부를 설치하여 전문인력을 키워냈다.

1980년대에 들어 와 북한의 핵개발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1982년에 제대한 인민군 제대군인들과 전국 전문학교들에서 졸업생들을 모집하여 핵 단지내의 생산 인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1984년 10월 김정일은 전방부대들인 1군단, 2군단, 5군단들에서 단련되고 우수한 사관들로 모집하여 핵개발 부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에 의해 2개 연대가 조직되었고 황해북도 평산 지방에서 우라늄광산 확장공사와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1985년에 이르러서는 중앙당 직속으로 131 지도국 산하 핵개발 부대들을 조직하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북한은 철도 복선 공사를 위해 공병 3국을 조직하였는바 경제가 낳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자 그 공병 3국을 중앙당 직속131 지도국으로 개편하며 핵개발부대로 전환하였다. 중앙당 직속으로 군대를 두고 직접 지휘한 것은 유일무이하게 핵개발부대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은 '핵 개발부대는 나의 친위대이다.'고 신임하며, 자신은 '핵 개발의 총사령관이다.'고 자처하였다.

또한 핵 개발부대 군인들은 이 세상에 당의 직속으로 소속된군대는 저희들 뿐이라며 맹목적 충성심에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였다. 131 지도국은 41여단, 42여단, 43여단, 47여단, 48여단. 49여단 등의 여단들로 되어 있었고 부흥무역 회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 43여단은 영변 핵단지 내에 지상 및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였고, 47여단은 황해도 평산지방에 대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였으며 49여단은 1985년에 기본 역량은 평안북도 대관군 금창리 일대로 파견되어 지하 핵시설을 건설하였고, 일부는 황해북도 평산지방으로 파견되어 우라늄 광산을 개발 확장하였다. 41여단, 42여단, 48여단은 핵개발에필요한 설비들을 제작하는 부대들인바 최근 42여단과 48여단이 없어지고 620여단이 새로 생겨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 8월 5일엔 전선군단 출신의 핵 개발부대들에서 300여 명의 군인들을 제대시켜 200여 명은 핵연료봉 공장에 배치시켰고, 107명은 우라늄 생산공장에 배치시켰다. 나머지 군인들은 중앙당 직속 부대들인43여단, 47여단, 49여단에 군관 및 사관으로 편입되었다.

1986년에 이르러 영변 핵단지에서 첫 시험 원자로 가동에 성공하였다. 그해 12월 김일성은 핵연료봉 재처리 시설을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전국 전문
대학 졸업생들로 모집하여 12월 기업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1987년엔 폐연료봉 재처리실험(플루토늄 추출실험.) 과정에 생기는 맹독성 가스와 방사능 피해로 관련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이 쓰러져 평양시 봉화 진료소(최고위층 전용 병원)에 후송되어 3개월간 치료를 받았으나 모두 식물인간이 되었다.

북한은 영변 핵단지를 분강지구라고 칭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5기계공업총국이라고 명명한바, 실지북한 정무원 산하 기관명에는 5기계 공업총국이 빠져있다. 또 분강지구 주소는 평양시 중구역 충성동으로 되어있다.

1987년에 북한의 핵개발이 실험적 단계에서 공업화로 이행하며 원자력 위원회는 원자력공업부로 명칭이 바뀌었고, 5기계 공업총국은 원자력 공업부와 분리되어 중앙당 직속으로 되었다. 1987년 김일성은 북한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는 우라늄 농축기를 주체화한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1988년 10월 황해북도 평산 지구에서 우라늄 광산을 개발 확장한 49여단은 평안북도 대관군에 지하 핵시설 공사에 투입되었다. (천마산, 금창리 일대.)
- 49여단은 지하 갱 공사만 전문하는 일명 두더지 여단이며, 갖추고 있는 장비의 대부분이일제였다. 트럭, 채굴설비, 수중펌프 등.

1989년 초, 북한은 무기급 핵물질 개발에 성공했다고 관련 분야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를 통해 알렸으며, 501 연구소 연구사들은 그 무기급 핵물질이 바로 히로시마형이라고 한바, 고농축 우라늄으로 추정된다. 당시 김정일은 그 무기급 핵물질 개발의 성공에 대만족하여 관련과학자들과 기술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라고 하며 일본에서 수입된 도시바 텔레비전을 선물하였고, 간접 분야의 우수 간부들에게는 국내산 대동강 상표의 텔레비전을 선물하였다.(본인은 대동강 TV를 받음.)

1990년 6월 21일, 황해북도 평산 지구에 대규모적 우라늄생산기지인 남천 연합기업소화학공장이 20만톤 처리능력으로 조업하였다.

1991년 9월,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선발 조직하여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한답시고 파견했다. (그해 초에 군사건설국이 건설한 미사일 기지에서 첫 발사 시험이 있었고, 그후 군사건설국이 철수한 후, 핵개발 부대인 3공병국 47여단에서 1개 대대를 파견함.)

1992년 5월, IAEA 한스브릭스 총장 일행이 북한의 핵단지를 방문하기 여러 달 전 이미 북한 지도부는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핵사찰 수용을 결정하고 막대한 량의 납판을 동원하여 영변 핵단지내 지하 핵시설을 덮어 은폐하였다. 본인이 근무한 남천 연합 기업소가 보유하고 있던 납판도 깡그리 털어 보내고, 우라늄탱크 보수 공사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영변 핵단지내 지하 핵시설을 은폐하려면 우라늄 방사선을 차단할 수 있는 납판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지하 핵 시설은 벽체와 천정을 납판 몇 겹으로 씌워 방사선을 차단하였으므로 핵사찰을 받더라도 방사선 측정기에 나타날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북한의 전력사정이 급격히 악화되어 한창 가을철에 농촌에서 탈곡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공장들엔 '교차 생산제'가 도입되어 서로 밤낮으로 엇바꿔가며 생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원인은 지하 핵 시설에 끌어들인 전력 소모 때문인바, 핵 개발분야의 사람들 사이에선 "땅속으로 흘러드는 그 전기를 다시 돌려도 사회의 어려운 전력사정은 회복이 될 것이."고 하였다.
        

1993년 여름, 본인은 평양 101 핵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간부로부터 북한이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핵탄두 폭발시 통상 3만도 이상의 고온에서 핵분열이 일어나지만 그보다 훨씬 낮은 저온에서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는 저폭뇌관 개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황장엽씨도 북한 고위관료로부터 들은바 있다고 본인에게 최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연구사들 사이에선 "만약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이승기 박사는 그 전범자의 한사람으로 재판 받게 될 것이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북한은 710호 자금으로 핵개발을 진행하여 왔다. (은행 계좌는 94 돈자리이며 특수자금과에서 관리함)

- 대안 중기계공장, 단천 광산기계공장 등 대기업들에 710호 지휘부가 있고, 해당 직장들엔 710호 담당 부직장장이 있다.

- 710호 관련설비 생산을 지연시켰거나 710호 물자수송을 지연시킨 자는 군법으로 엄중히 처벌한다.  

1990년대 초에 들어와 구소련이 붕괴되면서 소외 계층으로 밀려난 핵 개발 기술자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생활 형편이 어려워지자 플루토늄 추출물질인 붉은 수은(북한에서 홍수라고 불리는 이 물질은 1킬로그램의 플루토늄을 추출하는데 약 1킬로그램이 필요하며 당시 북한에서 개발한 붉은 수은은 플루토늄을 추출하기엔 역부족이었다.)과 핵탄두 제조에 꼭 필요한 물질로서 플루토늄 핵분열시 도화선역할을 하는 베릴륨(북한 사전엔 베르니움으로 되어 있음.) 등 핵물질들을 유출하기 시작했다.

붉은 수은은 1킬로그램짜리 2개를 묶어 1개 포장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제품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투명유리창이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베릴륨은 손바닥 크기의 납작한 판으로 되어 있고, 거기엔 제품 설명서와 생산연도가 씌어져 있는데 그생산연도는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4년으로 씌어졌다고 들은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러시아에서 밀수되는 그 핵 물질들은 플루토늄 1킬로에 50만 달러, 농축우라늄은 10만 달러, 붉은 수은 15.000 달러, 베릴륨은 1.500 달러에 거래되었다. 그 중에서도 붉은 수은은 김정일의 관심이 컸던 물질이다.플루토늄에 비해 가격이 많이 쌀뿐만 아니라 그 것만 있으면 북한 자체 내에서도 얼마든지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3년 10월, 바로 그 붉은 수은이 평양에까지 밀거래로 들어온 적이 있는데, 김정일은 "당장 그 붉은 수은을 찾아내라."며 "만약 그 붉은 수은을 해외로 빼돌리는 자는 민족반역자로 처형하라."고 까지 엄명을 내렸었다.
        

북한은 러시아에서 그와 같은 핵물질들과 핵개발 기술자들을 끌어오기 위해 자금을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1992년 여름, 함경북도 회령 호텔에서 있은 중국과의 무역면담시 대표단 단장을 맡았던 조선 제 6설비 수출입회사 이권대 수출입과장은 자신이 "한달 뒤에 1억 달러의 710호 자금을 가지고 러시아에 간다."고 본인에게 말한바 있다. 해외 여러 나라들을 다니며 핵 개발 관련 설비와 기술을 끌어들이는 업무를 맡고있던 그는 일본 도쿄 본사(회사명 기억 안남)의 고문, 대동강지사장이라는 직함을 밝힌 명함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본인이 탈북한 후 직책에서 해임되어 지방으로 추방되었으며 현재 그의 부인과 아들이 남한에 와 있음.)  

당시 김정일은 북한에 들어 온 구소련 핵 기술자들을 정무원 총리 이상의 대우를 해주며, 그들에게 총리 및 정치국 위원들이 사는 사택까지 내주며 배려했다.

그리고 710호 자금이 고갈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 우라늄 광석을 운반하여야 할 트럭들이 타이어가 다 닳아도 교체할 수가 없었고, 디젤유, 휘발유마저 떨어져 주저 않을 수밖에 없었다.

- 우라늄 추출 촉매제로 쓰이는 항공 석유까지 보장할 수가 없어 생산이 중단되기도하였다.

- 생산 근로자들에게 영양제(고기, 기름, 사탕, 맥주 등) 공급도 중단되어 일부 노동자들은 우라늄 생산 설비와자재(전동기, 용접기, 스텐, 용접봉 등)를 훔쳐 농촌에 내다주고 돼지와 강냉이 등과 맞바꾸어 먹는 현상도 빈번하였다. 심지어는 우라늄 분말을 훔쳐 국경도시인 혜산에 가지고 가서 밀수한 사건까지 있었다.

본인은 그 현장에 있던 한 사람으로서 남한 정부가 그 북한에 수 천억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한 사실을 알았을 때 참으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막대한 자금으로 해외에서 떠도는 탈북자들을 구했으면 그들 모두를 구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영화 '쉰들러리스트' 라는 영화를 보면 쉰들러가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천명이 넘는 유태인들을 구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런데 남한의 통치자들이 그 수 천억의 자금을 퍼주고 얻은 것이 무엇인가?  최근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배급소에서 식량을 공급받던 일은 까마득한 옛 기억이라 한다. 그렇다면 그 막대한 자금은 어디로 갔겠는가?

분명한 것은 북한이 이젠 핵무기 보유까지 들먹이며 아주 당당해 졌다는 것이다.

또 지난 2월 21일 뉴스에 보도된 바와 같이 북한이 외국에서 플루토늄 추출 용매제로 쓰이는핵 물질을 밀수하여 열차로 들여오려다가 잡혔다는 소식도 들린다.  

본인은 판단하건대 남한 정부가 지원한 그 막대한 자금이 710호 자금으로 보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것이다. 정녕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히 반민족적 행위이며그 대북송금 관련자들을 처벌치 않고 사면해 주는 행위도 역시 반민족적 행위라고 본다.

솔직히 그 당시, 우리는 1만 달러만 있어도 우라늄 1톤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 1만 달러로 자동차 타이어와 디젤유, 휘발유, 항공석유를 수입하면 우라늄 1톤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710호 자금이 완전히 고갈되어서 우라늄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것이 1990년대 초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1992년 김정일은 강계시에 있던 국방대학을 평양시에 들여와 자주 가보고 싶다며, 북한의 핵 개발을 주도하였고, 중앙당 군수담당비서인 전병호에게 그 지시를 내렸다.그래서 그 해부터 평양시 중이에 국방대학 건설이 진행되었는데 1년 후 중단되었다. 우라늄 생산공장의 실태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타이어가 닳고 디젤유, 휘발유가 떨어져 건설물자를 운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본인은 710호 자금 확보를 위해 외화벌이 상무로 파견되어 수산외화벌이 채취대 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그 해결사로 발탁되어 활동했었고, 전병호는 국방대학 학장(군사계급- 소장.)을 통해 약속하기를 본인이 국방대학 건설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해결하면 상좌의 군사칭호와 함께 군에 입대시키고 무역회사를 차려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 본인은 그 약속을 믿고 국방대학 건설을 도와주다가 원자력 공업부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직무태만, 당 생활기피, 외국인 불법면담 죄 등 죄명으로 체포령을 받게 되어 그것이 탈북 동기가 되기도 했었다.
        



        북한의 핵개발이 반드시 저지되어야 할 이유


첫째: 김정일은 핵개발에 관한 자신의 의지에 대해 말하길 "우리는 핵개발에서 조국통일을 시작하고, 핵으로 조국통일을 총화하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반도를 핵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는 김정일의 의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지금 북한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까지도 미사일을 보낼 수 있는 사거리를 확보해 놓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북한의 핵개발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둘째: 북한 핵개발 분야에서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우라늄 탱크 속으로 내몰리고, 우라늄 분말 먼지가 무수히 떠다니는 공간 속에서 호흡하며 작업하는 등 살인적인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맹독성가스와 방사능 피해로 인해 백혈구감소증, 간염, 고안염, 신장염, 등 직업병에 시달리며 핵실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인간에 대한 초보적 예의(추가: 인권?)도 없이 생명존중을 무참히 짓밟는 북한의 핵개발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셋째:북한 우라늄 생산 공장들에서는 우라늄 폐기물을 마구 방출하여 자연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있다. 그리하여 평안북도 운전군 동삼리에 흐르는 대령강과 황해북도 평산군 평화리에 흐르는 남천강에 서식하는 물고기 배속에서 우라늄 잔사가 나오는 형편이며 굶주린 주민들은 그 물고기도 잡아먹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실로 북한의 핵개발이 가져다 준 피해는 엄청나다. 그 후과로 아름다운 우리 조국강산이 심히 오염된 것은 물론 우리 민족은 후세에 기형아를 산생하며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길 것이다. 때문에 북한의 핵개발은 반드시 저지되어야 한다.  

넷째: 북한의 반민족적, 반인륜적 김정일 집단은 어리석게도 핵카드를 이용하여 국제 사회를 위협하여 저들의 독재체제를 장기화시키려 획책하고 있다. 때문에 그 독재 체제하에서 노예화된 인민들의 고통을 속히 끝장내기 위해서도 반드시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