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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5.18: 유언비어와 시민분노와의 상관관계

장전 2006. 9. 5. 07:55
광주사태는 유언비어, 가두방송, 시체놀이, 지하신문 등 시민을 격분시키기 위해 사전에 준비된 조직적인 선동전에 놀아난 17-22세의 양아치 계급, 일반시민, 학생들의 난동이었다고 본다.

특히 지하신문은 5월18일부터 26일까지 9호가 발행됐다. 이 지하신문들은 김대중을 석방하라는 요구에서부터 유언비어 등의 선동문, 정치적 구호들로 채워져 있다. 5,18일부터 지하신문이 발행됐다면 준비는 사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지하신문 하나만 보아도 광주사태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을 자극한 유언비어와 상황전개(상관관계 분석)


                                                            5월18일(D+0)

                                                          <유언비어>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 반란을 일으켰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식이나 굶기고 술과 한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 공수부대원이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여학생을 발가벗겨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상황>

전국비상계엄확대에 따라 광주에 기 출동돼 있던 특전사 7여단 병력 중 33대대는 전남대에, 35대대는 조선대에 출동하여 경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9시경, 전남대 정문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몰려왔다. 게엄군이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구가해 달라” 말해주었지만,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온 돌로 집단 투석을 가해 여러 명의 계엄군이 경상을 입었다.

이들 학생들은 11시경, 시내로 이동, “계엄령을 철폐하라”, “유신잔당은 인민의 적이다”, “외세를 배격하고 미군을 추방하자”, “매판자본과 군발이를 추방하자”, “반공법-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촉구한다”, “경찰과 공무원을 타도하자” “김대중을 석방하라”  등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시가지 시위를 시작했고, 오후 30시까지 시위군중은 수천 명으로 증가했다. 충장로파출소, 산수파출소 등 4개의 파출소에 난입하여 기물을 파손하고, 학생회관 앞에 있던 경찰 찦차를 파괴-방화했다.

당시 광주 향토방위를 맡고 있던 31사단의 사단장 정웅은 31사단장에게 작전 배속된 33대대 및 35대대에게 시내로 진입하여 시위를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내렸다. 진압과정에서 학생들이 연행되고 부상자가 발생하자 시내에는 “계엄군이 학생들을 마구 살해하고 있다”는 등 위에 열거된 바와 같이 악성 유언비어들이 나돌았다.

광주지역계엄당국은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부터 새별4시로 확대했지만 유언비어에 분노한 시민들은 10,00여명으로 증가하여 한일은행 및 도청 앞에서 시위를 계속하면서 자정까지 해산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계엄군 15명, 경찰관3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되자 계엄사령부는 특전사 제11여단에 3개 대대를 추가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렸고(육본작명19-80호), 제11여단은 5.19일 새벽 4시에 광주에 도착했다. 특전사 11여단은 5월19일 새벽 4시부터 31사단 정운 소장의 작전지휘를 받았고. 5월21일, 16시 이후부터는 전교사 사령관의 직전지휘를 받았다.  

계엄군은 시위학생 615명을 검거했다.

                                                                     <투입병력>


군: 장교 251명, 사병 1,933명

경찰: 간부 190명, 진압경 3,660명


                    <피해>

계엄군: 15명
경찰 : 310명
민간: 미상

공공시설 유리창 파손 64판, 깨스차 1대 소실,


                                                             5월19일(D+1)

                                             <추가된 유언비어>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전라도 사람을 쑥밭으로 만든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싣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목이 짧은 시체를 보고는 “목이 없다”로, 유방이 낮은 시체를 보고는 “유방이 없다”로 표현하여 유언비어를 자아냈다.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사람을 깔아죽였다“

“rd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질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싣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상황>


이러한 유언비어들에 현혹된 시민들은 광적으로 함성을 지르며 적개심을 토로했다. 오전 9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전남도지사는 시민들을 향해 질서를 지키고 냉정을 되찾자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고등학생들가지도 등교를 거부하고 교내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전남교육위원회는 5.20일부터 모든 고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다.

오전 10시부터 대학생들은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행동도 전날보다 훨씬 과격해져, 경찰관들을 화염병, 각목, 쇠파이프를 가지고 공격했다.

오후 3시, 수명의 청년들이 소형 트럭에 시체 1구를 싣고 시위군중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계엄군이 무고한 시민을 죽였다. 학생과 시민이 더 이상 희생되기 전에 계엄군과 싸우자”고 선동했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이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갑자기 불어나 1만 명 정도가 되었다.

오후 3:30분, 카톨릭 센터 앞에 모임 3000여명의 군중이 계엄군을 포위하고 폭행을 가했다. 계엄군 1명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그가 가지고 있던 M-16 소총도 피탈되었다.  

과격한 청년들이 경유를 가져와 길에다 붓고 불을 지른 후, 승용차 8대를 불길 속에 밀어 넣어 계엄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바리케이트를 쳤다.

이런 와중에 위 자극적 유언비어들이 적힌 유인물들이 시내 곳곳에 살포되었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이 경남 및 부산 번호판이 붙은 차량들에 불을 지르고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계엄군을 공격했다. 역전파출소, 도문동파출소, 양동파출소, 일동파출소 등이 습격을 받아 전소되었고, 17,000여명의 시위군중은 광주은행, 중앙여고, 광주역, 공용터미날, 도청 등 시가지에서 밤 11시까지 시위를 벌였다.

사태가 확산일로를 치닫자 계엄사령부는 5월19일 14시경, 특전사 제3여단에 출동명령을 내렸다(육본작명20-80). 이에 3여단 5개 대대 병력이 5월20일, 07;30분 경에 광주로 출동했다.  

5월19일, 계엄군은 시위자 120명을 검거했다.


                                                                  <투입병력>

군:   34/227
경찰: 109/2,192


                                                                             <피해>


민간인 사망2,  부상6(중상3,경상3)

군: 1명 빈사상태

승용차10대, 트럭1대 소실

총기(M-16)1정 탈취

유리창 1,600판 파손  
          

                    
                                                                          5월20일(D+3)


                                                                   <추가된 유언비어>



“차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시켜 귀를 자른다”

“광주은행 앞에 끌려간 사람들 신발 30족이 전시됐다”(이는 사실임)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상황>


계속 불어나는 유언비어의 유포로 격앙한 시민들이 점점 많아졌다. 전남 도지사가 “계엄군을 철수시키겠으니 모두 해산하여 귀가해 달라”고 여러 차례 선무방송을 했지만, 시위군중은 오히려 더 늘어나 낯 12시 경에는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 군중은 12시가 되면서 시내 여러 곳에서 동시에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군중은 500-1,000명씩 무리를 지어 조직적으로 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계엄군을 공격했고, 상업은행 앞에서는 점화된 휘발유 드럼을 계엄군 쪽으로 굴리는 등 공격방법이 점점 다양화 험악화되어가고 있었다.

택시기사들에는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이 말에 흥분한 택시기사들은 18:00 경에 무등경기장에 몰렸다. 30분 후, 운전기사들은 택시, 버스, 트럭 등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진격했다. 일부 기사들은 광주소방소에서 소방차 4대를 탈취하여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 때의 군중은 10만명에 이르렀고, 시위는 밤이 되어가면서 더욱 과격해졌다.

밤 9시경, KBS가 파괴되고, 문화방송국이 불에 탔다. 이로 인해 라디오와 TV방송이 일체 중단됐다. 도청 앞에서는 시위자들이 고속버스를 몰고 경찰저지선을 뚫고 돌진하여 경관 4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밤 10시경, 전남대에는 수천명의 시위대가 100여대의 차량을 몰고 계엄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로 인해 3여단 16대대 병사 1명이 즉사했다. 역전파출소 등 6개의 파출소를 불태웠고,  임동우체국과 광주세무서를 불태웠다. 광주세무소 무기고를 부수고 칼빈소총 17정을 탈취해갔다.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계엄사령부는 하루에 3차례에 걸쳐 20사단에 단계적 출동명령을 내렸다. 여기에 계엄사의 고뇌가 잘 나타나 있다.  

5.20일, 22:30분, 육본작명 21-80호로 20사단 61연대에 광주출동령을 내렸고, 3시간30분 후인 21일 오전 2시에 육본작명22-80호로 사단사령부와 62연대에 추가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어서 2시간 30분 후인 04시 30분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새벽 긴급참모회의를 소집하여 5월22일 작명23-80호로 20사단 60연대를 추가로 출동시켰다. 이에 따라 61연대는 5월21일 새벽 4시에, 사단사령부와 62연대는 5월21일 오전 08:58분에, 60연대는 5월 22일 아침 07:00에 광주에 도착하여 전교사 사령관의 작전지휘를 받았다.

광주시위 진압작전은 5월18일 오전까지 경찰력에만 의존했다. 그러나 오전 11시부터 시위가 과격해지고 시위세력이 커지자 경찰력은 진압은커녕 생존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전남경찰국장은 전남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에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했다. 윤흥정 사령관은 31사단장 정웅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명했고, 이에 정웅은 5.18일 12시45분에는 7여단 33대대에, 14시42분에는 7여단 35대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사태는 악화되어 5.18일 오후에는 11여단 3개 대대가 5.20일에는 3여단 5개 대대가 추가 투입되었으며, 끝내는 5월 21-22일에 걸쳐 20사단 3개 연대 및 사단사령부가 연속 투입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5월20일, 밤 8시, 시위군중은 1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는 거점들을 방어하고 있던 3여단 11.12.13.15 대대(4개 대대), 11여단의 61,62,63 대대(개 대대), 7여단 35대대(1개 대대)를 포위하고 돌과 화염병으로 공격했다. 이에 11여단의 3개 대대와 7연단 35대대는 거점들을 포기하고 도청 앞에 집결하여 도청경비에만 집중하면서 밤을 새웠다.

한편, 3여단 11대대는 고립된 채 금남로에서 시위군중에 포위됐고, 12.15대대는 광주역 앞에서 2만 시위대에 포위돼 있었고, 13대대는 광주시청 앞에서 1만 시위대에 포위돼 일방적으로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에 최세창 3여단장은 22일 2300시경, 구조대를 편성하여 시위군중의 공격을 받고 잇는 11.12.13.15대대의 구출작전을 폈다. 구조대가 광주역으로 가는 도중 수천 명의 시위대로부터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이에 구조대 병사들은 다급한 나머지 공중에 대고 위협사격을 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킨 후, 11.12.13.15대대 모두를 구출하여 5월21일, 새벽 02시10분경에 숙소인 전남대로 귀환했다. 이 총성이 광주에서 난 첫 번째 총성이었으며 누구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조건반사적인 자위행동이었다. 만일 포위돼 있던 특전대 요원들에 실탄이 지급돼 있었다면 그들은 고조대의 도움이 필요 없이 그들 스스로 공중에 대고 위협사격을 했을 것이다.    

10만명이 넘는 군중, 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 속에 11여단의 3개 대대와 7여단의 1개 대대병력 1,200명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11여단장인 최웅은 이들 4개 대대를 철수시킬 것을 직속 통제관인 정웅과 윤흥정에게 건의했고,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이를 게엄사령관 이희성에 보고했다. 이에 이희성은 즉시 4개 대대를 철수시키라 지시했지만 정웅과 윤흥정은 고집을 굽히지 않고, 이들 4개 대대에게 전남도청을 사수하라 지시했다. 이에 따라 1,200명의 특전사 요원들은 전남도청을 경비하면서 노상에서 밤을 지샜다.
    

                                                                      <투입병력>

군: 265/1,212 명
경찰: 163/2,395 명

        
                                                                                <피해>


사망: 9명(군인1, 경찰4, 학생1, 민간3)
부상: 57(중상8, 경상49)
차량 41대(파손36, 방화5)
6개 파출소 전소
KBS 파괴
MBC 전소
광주세무소 전소
임동우체국 전소
칼빈 17정 피탈

  
                                                                     5월21일(D+4)
                                                           -시위대 광주 완전 점령-

                                                              <추가된 유언비어>


“신총리 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고교생들이 특공대를 구성하고 있다”

“화염병으로 장갑차를 물리치고 있다”


                                                                                <상황>


5.20일 자정부터 5.21일 새벽 4시경까지 3천여명의 시위대가 대형차량을 앞세우고 11여단 주둔지인 조선대에 몰려와 정문 돌파를 시도했다.

아침 8시,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갔는지 시위대는 광주 톨게이트에 대거 운집해 있다가 육로로 광주에 출동 중이던 20사단 지휘용 찦차 14대와 탑재된 무기를 탈취했다.

아침 9시, 시위대는 방위산업업체인 아시아자동차를 습격하여 2대의 장갑차를 포함 , 군용트럭, 대형버스 등 357대를 탈취하여 시내로 몰고 나왔다.

아침 10시, 시위군중 5만명이 경찰 가스차, 소방차, 대형트럭을 앞세워 전남대로 3공수여단을 공격하러 왔다.

드디어 무기고 습격이 이어졌다. 대한통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칼빈 70정을 탈취했고, 이어서 연초제조창, 호남전기, 전남방직 등의 무기고를 부수고 다량의 무기를 탈취했고. 이어서 지원동에 잇는 탄광용 화약고에서 다이나마이트를 탈취했다.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가 피탈됐고, 소하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52개가 피탈됐다. 시민군은 779대의 차량을 탈취했고, 이들 779대는 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였다. 이는 사단 규모의 차량 수에 해당한다. 이들은 이들 무기로 무장을 하고, 복면을 쓰고, 전남의대 11층 옥상 및 수많은 고층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 계엄군을 향해 난사했고. 도청, 도경, 건찰청, 법원을 점령했다.

난동자들은 탈취한 차량을 이용하여 화순, 나주, 담양, 장성,목포, 영암, 고흥, 관산 등 17개 도시로 진출하여 무기고를 털고 난동을 부리며 시위를 선동했다. 이들은 목면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화순광업소를 습격하여 화약 및 TNT를 탈취했고, 광주에 소재한 (주)한국화약 보급소에서 폭약 2,500여 상자와 35만개의 뇌관, 4만m의 도화선을 탈취했다.    

12시경, 광주사태 기 간중 가장 위험한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교도소에는 간첩 및 좌익수가 170명 있었고, 총 복역수가 2,700여명이었다. 시민군은 복면을 쓰고 APC를 앞세워 5차례의 공격을 시도했고, 여기에서 쌍방간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쌍방 피해가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시민군 사망자만도 50여명에 달했다.

윤흥정은 21일 아침에야 그날 아침 방금 도착한 20사단 61연대와 도청 방어 임무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61연대가 광주로 진입하려 했지만, 광주-송정 간 도로에는 이미 시위대가  바리케이트를 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대가 미리 정보를 안 것이다.

예기치 못한 저항에 부딪친 61연대가 이들 시위대를 뚫고 있는 동안 도청 앞에는 10만 군중이 몰려왔다. 도청 주변 건물들의 옥상에는 기관총들이 설치되어 계엄군을 향해 불을 뿜어냈다. 전남도지사는 헬리콥터로 피신해 나와 계엄 당국과는 아무런 의논도 없이, “게엄군을 12시까지 철수시킬 것이니 시민들은 돌아가라”고 방송을 했다. 이 방송을 들은 안부응 11여단 62대대장이 어찌된 영문이냐고 상부에 확인했지만 윤흥정은 “도청을 계속 지켜라”는 말만 반복했다.

13시경, 시위군중이 탑승한 장갑차, 대형트럭 등 수십 대의 차량이 10만 군중 전명으로 나오더니 장갑차 한대가 11여단을 향해 돌진하였다. 3여단 16대대 정관철 중사가  즉석에서 깔려죽었다. 이어서 나머지 장갑차와 대형트럭으로 또 돌진했다. 동료의 무참한 죽음을 지켜본 병사들, 또 다시 그들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오는 차량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누구를 그런 상황에 투입해 놓는다 해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자위수단으로 총을 쏠 것이다. 그러나 병사들은 미국의 분석가들이 칭찬했듯이 끝까지 시민들에게 직접 총을 쏘지 않고 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을 조준하지 않고 차량에 대해 위협사격을 가했다.

16:50분, 이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도청을 지키던 계엄군에 철수를 명했고, 17:50분에 1,200명의 병력은 겨우 숙영지인 조선대로 철수했다. 이로써 광주시는 시민군에 의해 완전 탈취되었고, 무정부상태가 되었다. 이들을 민주화 인사라 하는 사람들은 해방구라고 말한다.

                                                                 <투입병력

군:    265/1,212

경찰: 163/2,385


                                                                    <피해>


사망: 54(군인2,학생8,민간44)

부상: 343(중상62, 경상281)

피탈자산: 칼빈, M-1, 기관총 등 5,403 대의 화기

소화기 탄약 288,680발,

수류탄 52개

피탈차량 779대(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













수류탄 52개

779대의 차량(군용차 34, 경찰차 50, 아시아자동차 328, 일반차 367대)
출처 : 세상사 바로보기
글쓴이 : 증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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