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렀던 흔적들

[맹꽁깨千] 012 아무리 검불이 많아도 봄은 와

장전 2023. 3. 7. 05:23
 
 
[맹꽁깨千] 012 아무리 검불이 많아도 봄은 와
2023.3.7.
 
실학자 이덕무(李德懋, 1741~1793년)가 지은 「적언찬병서(適言讚幷序)」 중 희환(戱寰), ‘우주 안에서 유희하다.’라는 글이야.
“내 앞에는 내가 없고 내 뒤에도 내가 없다. 이미 무(無)에서 왔건만 다시 무(無)로 되돌아간다. 많지 않은 소수(少數)이니 얽매임도 없고 구속받을 것도 없다. 얼마 전까지 젖 먹던 내가 갑자기 수염이 나고 잠깐 사이에 늙더니 또한 문득 죽음에 이른다. 마치 거대한 바둑판에서 효로(梟盧, 가장 좋은 패)를 핍박하거나 침범하는 듯, 거대한 놀이마당에서 물고기 가죽을 입은 사내처럼 조급하지도 않고 허둥지둥하지도 않으며 하늘을 좇아 즐거워한다.”
봄은 기다려도 오고, 기다리지 않아도 와. 거기에 반응하는 것이 인간이야. 힘겨움과 안쓰러움이 크면 클수록 새싹의 앙증맞음과 기다림의 즐거움이 더 커.
이맘때 들녘으로 나가봐. 어디를 가도 새싹이 검불을 뚫고 올라와. 어떤 곳에는 검불이 한 겹인데도 있고, 어떤 곳에는 검불이 여러 겹인데도 있어. 한 겹인 곳에는 쉽게 움을 뜨지만, 검불이 높이 쌓은 곳에는 힘겹게 뚫고 올라와. 보기에도 안쓰럽지.
검불이 새싹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검불이 뭐야? 바로 작년의 제 몸뚱이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야. 우리는 해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도 어린 새싹만 봐. 그것이 예쁘니까. 그래서 검불을 걷어내고 막 이쁜 새싹만 찾아. 그렇지만 검불이 없는 새싹은 없어. 검불이 추위를 막아주기 때문이야. 무서리가 내리고 북풍한설이 내려도 얼어 죽지 않게 하는 거야. 제 죽은 몸뚱어리에서 생명이 나오는 거지.
세상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아. 검불이 없다고 좋아하지 마. 조그마한 추위에도 이내 얼어 죽고 말아. 그런 사람 많잖아. 한평생 좋은 사람으로 살 것 같은 사람이 조금만 위기에도 무너지는 사람. 참 매력이 없지. 한 방에 무너지니까. 나라가 잘 살면 살수록 개인의 위기를 촘촘히 막아줄 많은 장치가 있어 여간해서 이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어. 이런 사람은 미리미리 준비하면 행복할 수 있어. 근심을 돈으로 사는 거지.
요즈음 채소는 맛이 밋밋해. 그놈이나 저놈이나 모양만 다르지, 맛은 다 똑같아. 왜 그러는 줄 알아. 거름을 너무 많이 줘 독특한 맛이 사라졌기 때문이야. 거름을 주지 않으면 제가 살려고 갖은 애를 쓰면서 몸속에 꼬깃꼬깃 영양분을 다져 넣거든. 그때 채소의 톡 쏘는 맛이 나. 왜, 옛날 무 중에는 아린 맛이 많았잖아.
검불이 수북한 곳에서 움을 튼 놈이 그런 셈이야. 움이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무수히 많은 난관을 뚫어야 해. 어쩌면 제 죽은 몸뚱이인 검불에 눌려 햇빛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어. 이런 사람이 위기에 강한 사람이야. 멋있잖아. 수많은 변수 중에 위기의 직접 원인을 골라내어 제거하는 능력. 뿡뿡 아우라가 넘쳐나지. 이런 사람이 나라를 구한 영웅이잖아.
천자문에 이런 말 있는 거 알아? 제97구 “陳根委翳(진근위예)하고, 落葉飄颻(낙엽표요)”야. 원문을 해석하면, “묵은 뿌리는 시들어 말라 죽고, 떨어진 낙엽은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낀다.” 삼선 평어는 “북풍이 불기 전에 늦가을 여행을 떠나라. 해묵은 나무뿌리와 썩은 낙엽 속에서 새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라.” 그래. 어쩌면 인간은 어린 움은 좋아하지만, 썩은 검불은 좋아하지 않아. 그래도 거기서 새 생명이 움터.
*출처 :공감신문(202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