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바람처럼

미투(성폭력) 사건으로 돌아보게 된 여성의 삶, 무엇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가. / Tchaikovsky - String sextet D minor Op. 70 "Souvenir de Florence

장전 2019. 2. 3. 18:01


미투, 성폭력으로 시작된 고통과 절망, 그 끝에서 피워낸 사랑과 희망

2017년 첫 장편소설 <트러스트미>를 발표했던 소설가 김규나가 <체리레몬칵테일>로 돌아왔다. 두 여성 주인공에게 가해진 성폭력을 통해 거짓과 탐욕, 권력남용으로 얼룩진 지식인 사회의 부패한 일면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그러나‘개인의 각성’이란 화두를 일깨워줌으로써 독자의 탄탄한 신뢰와 사랑을 받았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독자의 시선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삶을 통찰하고 사랑과 희망을 찾아가는 성숙과 회복의 기회를 독자에게 선물한다. <트러스트미>에 이어 또 한 번 김규나만의 강렬하고도 흥미진진한 소설을 경험하리라 확신한다. 

소설은 중학생 시절부터 친구였던 소설가 미온과 자서전 출판사를 운영하는 강주가 동시에 겪는 성추행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추행을 직접 목격한 미온과 같은 공간 안에 있었으면서도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강주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같은 상황을 중학생 딸이 경험하게 된다면, 하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를 느끼지만 사업상 불이익을 우려, 강주는 사건을 덮고 가자고 미온을 설득한다. 

미온은 고객의 성추행 자체보다 강주와의 감정적 괴리에서 더 큰 고통을 느낀다. 강주는 성추행을 저지른 고객과의 일을 계속 진행하게 되고 미온은 자신의 두려움과 절망이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가를 찾아 그동안 덮어 두었던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데……. 강주는 점점 더 커다란 위험 속으로 빠져 들게 되고, 미온 또한 거짓의 가면을 벗고 진실을 드러내는 운명의 소용돌이를 마주하게 된다. 

사회적 위치에 따른 힘의 불균형에서 시작된 문제는 여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의 갈등으로 불거지고, 결국 부모와 자식. 부부와 연인, 형제와 친구 등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그리고 개인의 본질을 파고들며 인생에서 찾아야 할 사랑과 희망이란 화두를 드러낸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 세상의 찬사와 오해는 진실일까. 

소설가 김규나는 언제나 인물들 간의 관계를 그물처럼 엮어 입체적 스토리를 추구함과 동시에 독자가 재미와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비밀을 풀어가는 추리기법을 잊지 않는다. 강주가 회피했던 태풍의 중심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과정은 물론, 미온이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던 중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아버지의 유작 소설의 진실을 풀어가는 과정 또한 흥미롭다. 그는 왜 죽은 것일까. 그의 유작은 언제 쓰인 것일까.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사실이며 현재 그에 대한 찬사와 흠모는 계속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 속에서 드러나는 부모 세대의 사회상이나 그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미온 자신의 사랑과 근원에 대한 자각 또한 이 소설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세대 불문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그림을 제공한다. 

문단, 출판, 정계, 언론 등 지식인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

두 여성이 겪는 폭력을 자행하는 부류는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의 지식인층이다. 소설은 두 여성에게 가해진 힘 있는 자의 성추행 사건을 계기로 그들의 위선을 한 꺼풀씩 벗겨가고 결국 거짓의 알몸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 독자는 세상의 진실에 한발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2016년 전후, 대한민국의 자화상

국가와 국민을 위해 애쓴 청렴한 여성 대통령이 인격살인을 당하고 거짓 탄핵을 당한 2016년 전후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 그를 주도한 소위 정치, 언론, 지식인 층의 탐욕과 미투 사건들, 그리고 광장 투쟁에 동원되는 젊은 의경들의 모습을 통해 2016년 전후, 대한민국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그려낸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출판사 서평미투(성폭력) 사건으로 돌아보게 된 여성의 삶, 무엇이 그들을 두렵게 하는가. 
소설은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을 것 같은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정작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주위의 반응이다. 손을 댄 것도 아니고, 음탕한 언어폭력을 당한 것도 아닌데 무엇이 미온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움츠러들게 한 것일까. 

성폭력, 성추행으로 시작하지만 이 소설은 그에 대한 응징이나 남성 혐오로 가지 않는다. 남성이 여자에게 가하는 일방적 폭력을 시작으로 삶에서 무작위로 만나게 되는 폭력, 인생에서 늘 상주하는 힘의 불균형 때문에 비일비재하게 자행되고 감춰지는 폭력에 대해 생각게 한다. 어쩌면 삶 자체가 폭력은 아닌가. 폭넓고 심도 있는 질문으로 키워가지만 원망과 불평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바꾸는 작가의 재능이 <트러스트미>에 이어 또 한 번 발휘된다.

거짓과 절망, 위선과 상처 속에서 피워낸 희망. 우리시대 꼭 필요한 소설, 소설가
2016년 촛불로 뒤덮인 거짓 탄핵사태를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작가가 이 소설을 쓰고 있을 당시 터진 문단의 첫 번째 미투 사건이 겹쳐진다. 주위에서는 시류에 따라 출판을 서둘러야 한다는 독촉이 이었지만, 시기를 늦춘 건 작가였다. 남성은 가해자, 여성은 피해자라는 단순 이분법이나 힘의 불균형에서 오는 권력남용이란 관점에서 소설이 소모되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대신 성폭력 사건들을 통해 세상의 폭력과 무작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폭력 앞에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상처를 연민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다시 일어나 어떻게 우리 생을 이어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천착한다. 그렇게 절망의 시대, 추악함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시대, 사랑과 희망, 그리고 행복의 의미를 찾으며 문학 본연의 의미를 고수한다. 

우리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사랑과 행복은 무엇인가.
위태로운 미온과 강주의 삶 속에서 결코 완전한 것도 아닌데 그들의 삶을 지탱시켜주는 인들이 있다. 많은 걸 잃었으면서도 자식의 행복을 지키려 했던 옥임이나 석훈, 단순한 삶을 고집하며 하루하루 행복하기 위해 애쓰는 로움, 무릎 꿇고 절망하는 대신 주어진 삶에 순응하며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려는 영우 같은 사람들. 화려하지도 눈부시지도 않지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리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랑을 찾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