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코피에프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b장조 Op.10 (Piano Concerto No.1 in Db major, Op.10)

장전 2016. 11. 20. 18:52


프로코피에프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b장조 Op.10

Piano Concerto No.1 in Db major, Op.10

     

   

Martha Argerich, piano / New York Philharmonic / Mstislav Rostropovich, conductor

 

프로코피에프 : 피아노 협주곡 제1번 Db장조 Op.10

Piano Concerto No.1 in Db major, Op.10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러시아

 

남러시아의 농학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음악 교육받고, 5세 때 이미 작곡을 하는 등 비범한 재능을 나타냈다. 1904년(13세)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피아노 협주곡 제1번」(1912)을 비롯한 초기의 대표적인 작품을 발표하고, 신진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또한 R. 슈트라우스(오스트리아)나 드뷔시(프랑스)의 음악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고, 러시아 고전 음악과 서구 근대 음악과의 모순에 괴로와하면서 결국 전통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4년(23세) 음악원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런던에서 러시아 발레단의 주재자인 디아길레프를 만나, 그 발레단을 위한 「알라와 롤리 Ala i Lolli」(1914), 「어릿 광대 Skazka pro shuta」(1915)를 작곡했다.

1917년은 러시아 혁명의 해였지만, 그는 밝고 건강한 18세 기풍의 「고전적 교향곡」을 완성하여 이듬해에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망명을 결심한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이 해 페테르스부르크를 출발,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6월에 일본에 도착, 3회의 연주회를 연 뒤 8월에는 미국에 건너갔다. 1918년부터 2년간의 미국 체류 중에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면서 창작 활동을 계속해 「피아노 협주곡 제3번」(1921)과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L’amour des trois oranges」(1919) 등을 작곡했지만 호평을 받지 못했다. 1923년부터 파리로 이주해, 디아길레프를 위한 「강철의 춤 Le pas d’acier」(1925)과 그 밖의 발레 음악, 「제2번」(1924)에서 「제4번」(1930)까지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제4번」(1931), 「제5번」(1932) 등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의 특징이었던 무내용의 추상적인 서구 모더니즘은 결국 그의 작품 창조의 원천이 되지 못했고, 작곡가로서의 위기 의식을 느낀 그는 1932년(41세) 러시아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이미 습득한 모더니즘의 기법을 평이한 형식과 결합시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품을 쓰고자 노력했는데, 그 산물로 모음곡 「키제 중위 Lieutenant Kijé」(1934),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1935), 발레 음악 「로미오와 줄리에트 Romeo and Juliet」(1935) 등의 작품을 남겼다. 또한 영화 음악에 바탕을 둔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9)는 그의 민족적 공감의 열렬한 표현이었다. 독 · 소 전쟁 발발 후에도 그 적극적인 창작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1944년(53세)에 완성시킨 걸작 「교향곡 제5번」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에는 다시 서구적 형식주의 경향이 강해져, 1948년(57세)에 구소련 음악회의에서 지다노프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I. Allegro brioso                     II. Andante assai              III. Allegro scherzando

 

<Piano: Lise de la Salle>


이 해에 그는 프라우다(Prauda)에 자기 비판의 글을 발표했으며, 그 이후의 작풍은 「교향곡 제7번(교향곡)」(1952)으로 대표되는 극히 간명 평이한 고전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우랄 민요에 의한 발레 「석화」에서 그 경향은 더욱 두드러졌지만, 완성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프로코피예프(러시아)는 전통적인 러시아 음악과 서유럽의 형식주의와의 모순에 항상 괴로와했던 작곡가였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풍은 크게 변화해 왔지만, 결국은 차이콥스키(러시아)에서 현대에 이르는 러시아 음악의 전통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킨 음악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으로는 그 밖에 「피터와 이리」(1938), 「피아노 소나타 제7번(독주곡)」(1942) 등이 있다.


Wayne State Sypmhony Orchestra / Alexander Kopitz - solo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