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Van Cliburn)

장전 2016. 5. 25. 15:07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Van Cliburn)

 

 

 

 

 

(Cliburn)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Mvt I-1

Played by Van Cliburn in Moscow, 1962. He was accompanied by Kirill Kondrashin

 

 

밴 클라이번(Van Cliburn) 1934.7.12 - 2013.2.27 미국

 

밴 클라이번(Van Cliburn, Harvey Lavan "Van" Cliburn Jr, 1934년 7월 12일~ )은 미국

아니스트이다. 루이지애나 주슈리브포트에서 태어났다. 피아노는 피아니스트였던 모친으로부터 기초 교육을 받았다. 1951년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토지나레빈 부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958년에는 구소련의 제 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음악 콩쿠르에 응모했으며, 피아노 부문 제 1위가 됨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피아노는 음이 맑고 밝으며, 낭랑한 울림에 넘쳐 있다. 테크닉이 뛰어나고 악곡의 해석도 유럽인습에 구속되는 일이 없고, 미국다운 신선한 음악성을 이들 고전에 주고자 하는 의욕에 찼다. 명연주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 제1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그 외에 각종 협주곡이며 리스트의 곡과 같은 대규모적인 독주곡에서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었다.

 

 

콩쿠르 우승자들 불운 잇따라… 반 클라이번의 저주?

 

1958년 모스크바에서 차이콥스키 피아노 콩쿠르가 처음 열렸습니다.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성공적으로 쏘아 올린 직후, 러시아 예술의 위대함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야심 차게 창설한 대회였지요. 이 대회에서 23세로 우승하면서 일약 세계적 스타로 떠오른 사람이 '적국(敵國)'인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입니다.

그 뒤 반 클라이번은 RCA 빅터사(社)와 전속 계약을 맺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으로 그래미상까지 수상하며 승승장구합니다. 타임지는 그를 표지 인물로 다루면서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는 제목을 붙였지요.

하지만 반 클라이번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을 위한 백악관 연주 등을 제외하면 1978년부터 사실상 기나긴 은둔에 들어갔습니다. 지나치게 젊은 나이에 많은 조명이 쏟아지면서 차근차근 성장할 기회를 놓친 탓이라는 분석입니다. 올해 75세인 반 클라이번은 자신의 이름을 딴 콩쿠르에서 우승자에게 시상하는 것 외에는 지극히 제한된 연주만 할 뿐입니다.

비슷한 징크스가 반 클라이번 콩쿠르 수상자에게도 쫓아다닙니다. 1966년 우승자인 라두 루푸(루마니아)와 2001년 공동 1위 수상자인 올가 케른(러시아) 등을 제외하면 뚜렷한 스타 연주자를 배출하지 못한 것입니다. 반면 우승자들에게는 불운이 잇따랐습니다. 1977년 우승자 스티븐 디그루트(남아프리카공화국)는 1985년 비행기 추락 사고에서 극적으로 살아났지만, 폐결핵과 폐렴 등으로 투병 끝에 1989년 36세로 숨을 거뒀습니다. 1989년 19세로 최연소 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알렉세이 술타노프(러시아) 역시 수차례 발작과 왼팔 마비를 겪다가 35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때문에 음악계에서는 '반 클라이번의 저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면 197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본선 2차에서 낙방했던 안젤라 휴잇(캐나다)은 현재 최고의 바흐 연주자로, 1989년 2차 통과에 실패했던 프랑스의 장 에플랑 바부제는 드뷔시 해석의 1인자로 각각 발돋움했습니다. 역시 콩쿠르 성적이 곧 예술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조선일보 2009.6.11)

 

 

 

 

피아노로 '러시아 정복한' 클라이번 별세

피아노 하나로 철의 장막을 뛰어넘은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이 숨졌다. 79세. 뉴욕타임스는 클라이번이 27일(현지시간) 텍사스주 자택에서 골(骨)암으로 사망했다고 28일 보도했다.

클라이번은 1934년 루이지애나주에서 태어났다. 피아니스트 어머니를 둔 덕에 세 살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가로의 길은 일찍부터 정해졌다. 석유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그를 선교사로 키우려 했지만 연주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17세 때 줄리어드 음대에 입학한 클라이번은 54년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한다. 콩쿠르는 49년부터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했는데 피아니스트 루돌프 제르킨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등이 심사위원이었다.

58년, 클라이번은 미국 클래식 음악 역사상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다. 러시아의 자존심인 차이코프스키를 내세운 콩쿠르, 그것도 첫 대회에서 미국 피아니스트가 우승한 건 두 나라에게 충격이었다. 한 해 전 러시아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려 충격을 받은 미국민들에게 클라이번은 영웅이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표지에 실으며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고 했다.

콩쿠르를 끝으로 그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59년 뉴욕필과 협연했지만 혹평이 쏟아졌다. 78년 무대를 떠나 89년 복귀했다. 전성기가 지난 뒤였다. 2008년 인터뷰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후 20년 동안 그 순간에 머물렀던 것 같다. 콩쿠르 우승이 큰 압박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62년 자신의 이름을 딴 ‘반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를 만들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 2009년 이 콩쿠르에서 준우승하면서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Cliburn)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Mvt I-2

 (Cliburn)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Mvt II

 

(Cliburn)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Mvt III

 

Tchaikovsky / Piano Concerto No.1

 

아마도 피아노라는 악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유명세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이 초연된 지도 어느 새 15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작품에 대한 애정과 유명세는 점점 더 증폭되어왔지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차이콥스키의 이 대곡은 ‘피아니스트’라면 응당 연주할 수 있고, 연주해야만 하며, 이 곡을 통해 비로소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을 정도로 프로 연주자로서의 가능성과 예술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차이콥스키는 총 세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이 가운데 1번 협주곡만이 유독 유명하다. 흥분에 들뜬 회상이든, 괴롭고 즐거운 기억에 대한 체념이든 간에 이 곡의 가장 큰 주제는 ‘향수’다. 이 ‘향수’가 바로 러시아 낭만주의를 지탱하는 뿌리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른 작품에서도 항상 느껴왔듯이, 러시아인이라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바로 절망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능력이다

 

 

 

1악장 - 알레그로 논 트로포 에 몰토 마에스토소
웅장하고 풍부한 색채로 시작하는 1악장은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조성과 전개가 자유로운 편이다. 오히려 환상곡적인 느낌까지는 이 1악장은 오케스트라의 강렬함과 화려하고 육중한 피아노가 서로 대결하는 듯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특징으로서, 장대한 1주제와 낭만적인 2주제의 뚜렷한 대비가 인상적이다.

 

2악장 - 안단티노 셈플리체
느린 안단테 악장과 스케르초 악장을 뒤섞어놓은 듯한 혁신적인 악장.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드는 아기의 평온함으로 시작하여, 프레스티시모로 질주하는 환상 속의 동화를 꿈꾸다가 첫 자장가로 돌아오는 모습은 지극히 전원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을 연상시킨다.

 

3악장 - 알레그로 콘 푸코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맹렬하고 장대하며 스펙타클한 악장으로 손꼽힌다. 오케스트라의 네 마디 서주 후부터 펼쳐지는 피아노의 굵고 거친 슬라브 무곡풍의 론도 주제와 이어지는 간결한 가요적인 부주제가 잇달아 펼쳐지며 서정과 기교의 긴박감 넘치는 조화와 대비를 이룬다. 특히 마지막 피아노 코다 부분에서의 빠르고 강렬하며 비르투오시티 넘치는 옥타브와 이어지는 오케스트라 총주의 터질 듯 벅차오르는 사운드는 러시아의 호방함과 저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반 틀라이번을 표지에 실으며 ‘러시아를 정복한 텍사스인’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