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영서당(迎瑞堂)의 내력(來歷) 2안 - 수정안 151026

장전 2015. 10. 26. 06:45

 

 


영서당(迎瑞堂)의 내력(來)

 

 

  영서당(迎瑞堂)은 국제법학자 기당(箕堂) 이한기(李漢基,1917~1995 ) 박사의 생가(生家)이다. 기당(箕堂)은 대한민국 국제법학의 개척자로서 그의 저서 <한국의 영토>에서 독도와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논증하며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언(切言)을 남겼다. 기당(箕堂)의 부친 춘전(春田) 이혁(李爀,1898~1977) 선생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한 바 있으며 초대 전남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며 후학들의 국사교육에 매진하였다. 기당(箕堂)의 조부 성균관 박사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1873~1953) 선생은 독립의 의지와 토적복수()를 천명하고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던 자신회(自新會) 사건으로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정부는 이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옥산의 학문은 <옥산집> (7권2책)에 수록되어 있다. 기당(箕堂)의 증조부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 선생은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선생과 함께 장성의병(長城義兵) 활동을 주도하였고 정부는 이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청고의 학문은 <청고집> (4권2책)에 수록되어 있다.  기당(箕堂)의 고조부인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1825~1883) 선생은 장전(長田) 이씨 가문의 면면한 민족자존정신의 효시(嚆矢)였다.  석전(石田)은 병인양요(洋擾)에 의병을 이끌고 한강까지 진격한바 있다. 석전(石田)은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선생과 함께 장성 고산서원(長城 高山書院) 배향(配享) 되었다. 그의  학문은 <석전집> (4권 2책)에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영서당은 석전의 부친 일화(一華) 이규형(李奎亨,1797~1851) 선생이 정침(正寢)을 세운후(1835) 이최선 선생이 석전제(石田齊)라 명명하였고, 이후 화마(火魔, 1883)를 입어 재축(再築)한 후 이승학 선생이 영서당(迎瑞堂)이라 이름 지었다. 근래에는 기당(箕堂) 이한기 박사가 개축(改築)하였고 그의 장남 이종웅(李鍾雄)이 새롭게 수보(修補)하며 영서당에 면면히 흐르는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신과 내력(來)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알린다.


2015. 10. 30.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홍영기


발문(發文): 이규형(李奎亨) 선생 6대손 이종웅(李鍾雄), 이종걸(李鍾傑)

7대손 이용태(李龍泰), 이봉태(李鳳泰), 이학태(李鶴泰), 이인태(李麟泰),이문태(李文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