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당(迎瑞堂)의 내력(來歷)
영서당은 국제법학자 이한기(李漢基) 박사의 생가(生家)이다. 기당(箕堂) 이한기(1917~1995) 박사는 소년기에 광주학생사건에 연루되어 창평주재소(昌平駐在所)에서 고형(苦刑)을 겪었다. 기당은 대한민국 국제법학의 개척자로서 국익을 옹호하는 법이론에 천착(穿鑿)하였고 저서 <한국의 영토>에서 독도와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국제법적으로 논증하며 ‘명명백백한 자국의 영토도 주장하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절언(切言)을 남겼다. 기당(箕堂)의 부친 춘전(春田) 이혁(李爀,1898~1977) 선생은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한 바 있던 역사학자로서 초대 전남대학교 문리대 학장을 역임하며 후학들의 국사교육에 매진하였다. 또한 춘전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 선생의 유적보존회(1957)를 발족시켰다. 기당(箕堂)의 조부 옥산(玉山) 이광수(李光秀,1873~1953) 선생은 독립의 의지와 토적복수(討賊復讐)를 천명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던 자신회(自新會,1907) 사건으로 1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민족 지도자 양한묵 (梁漢黙,1862.~1919) 선생과 함께 3.1운동의 확산에도 기여하였다. 정부는 이에 건국훈장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敍)하였다. 성균관 박사 옥산의 학문은 <옥산집> (7권2책)에 수록되어 있다. 기당(箕堂)의 증조부인 청고(靑皐) 이승학(李承鶴,1857~1928) 선생은 을미사변(乙未事變,1895) 과 단발령(斷髮令,1895)이 내려지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선생과 함께 장성의병 활동을 주도하였고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하였다. 청고의 학문은 <청고집> (4권2책)에 수록되어 있다. 기당(箕堂)의 고조부인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1825~1883) 선생은 장전(長田) 이씨 가문의 면면한 민족자존정신의 효시(嚆矢)였다. 석전(石田)은 부친 일화(一華) 이규형(李奎亨,1797~1851) 선생과 동학(同學)이었던 거유(巨儒)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 선생의 문인(門人)이 되어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고 옹호한 절의(節義)의 인물이었으며 병인양요(丙寅洋擾,1866)에 의병을 이끌고 한강까지 진격한바 있다. 석전(石田)은 노사(盧沙)와 함께 장성 고산서원(長城 高山書院)에 배향(配享) 되었다. 그의 학문은 <석전집> (4권 2책)에 수록되어 있다. 끝으로 영서당은 일화공(一華公)이 정침(正寢)을 세운후(1835) 이최선 선생이 석전제(石田齊)라 명명하였고, 이후 화마(火魔, 1883)를 입어 재축(再築)한 후 이승학 선생이 영서당(迎瑞堂)이라 이름 지었다. 근래에는 이한기 박사가 개축(改築)했으며, 그의 장남 이종웅(李鍾雄)이 새롭게 수보(修補)하였다. 과거를 모르는 자는 오늘을 바로 살지 못하고, 오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미래를 가늠하지 못한다. 이 가문에 흐르는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신이 이곳 장전마을과 호남지방, 나아가 우리 강토인 대한민국 전역에 생동하기를 기원하며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영서당(迎瑞黨)과 그 집안의 내력(來歷)을 알린다.
2015. 10. 30. 순천대학교 사학과 교수 홍영기
발문(發文): 이규형(李奎亨) 선생 6대손 이종웅(李鍾雄), 이종걸(李鍾傑)
7대손 이용태(李龍泰), 이봉태(李鳳泰), 이학태(李鶴泰), 이인태(李麟泰),이문태(李文泰)
'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서당(迎瑞堂)의 내력(來歷) 2안 - 수정안 151026 (0) | 2015.10.26 |
---|---|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추성수 문중 총람 (0) | 2015.10.25 |
장전에서의 2박3일 2 (0) | 2015.10.19 |
장전에서의 2박3일 (0) | 2015.10.19 |
이한기박사님 묘소선영에서 바라보이는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 (0) | 2015.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