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1987년 유월항쟁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장전 2015. 9. 4. 13:36

 

 

 촛불정국의 해법을 찾는다면!

1987년 유월항쟁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윤영전 (기사입력: 2008/07/14 10:10)   

촛불이 켜진지도 벌써 70일이 넘어서고 있다. 촛불정국의 해법을 유월항쟁 역사에서 찾으면 한다. 지난 7월9일은 21년전 이한열 열사의 장례노제에 100만의 추모인파가 서울광장에 운집하여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였던 역사적인 날이었다. 성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마치 역사는 반복되고 있듯이 6.10항쟁의 날에도 70만의 시민이 태평로와 서울광장에 운집했다.

이어진 7월5일에도 50만의 촛불을 든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매웠다. 계속되는 촛불문화제는 경찰의 원천봉쇄에 따라 시내중심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오늘의 시민들 구호가 지난날과 다르긴 했지만 분명한 것은 옳지 못한 정부의 정책과 행위에 항의하고 있다.

1987년 7월9일 당시의 서울광장에 백만의 추모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이한열 열사의 노제를 광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이군의 모교인 연세대에서 발인제를 지내고 신촌 로터리에서는 이애주 한풀이 춤사위에 거리제를 지내고 광장에 운집한 장례행렬이었다.

시청을 향해 이어진 행렬에는 김대중 김영삼 당시 야당총제도 윗옷을 벋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연대 발인제에도 무려 10만이 추모하고 로터리에도 15만이 넘은 추모인파가 모였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이 서울광장에 도착하기 전에 수십만 명이 이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장례위원회와 경찰은 “최루 직격탄을 맞아 숨진 이군의 장례 날에 절대로 최루탄을 발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경찰은 세종로 네거리 이순신 동상 앞에 최루탄과 페퍼포크 차량을 배치하고 이어서 청와대 길에는 수경사 장갑차가 출동하였다.

시청광장의 추모노제 준비위는 시청 청사의 국기를 조기로 게양하라는 요구를 했지만 시청관계자는 국무회의에서 결정한바 없어서 조기게양이 불가하다고 옥신각신했다. 결국 추모인파 중에 국기 게양대에 올라가 조기를 달고 프라자 호텔도 조기로 게양했다.

시청광장을 기준으로 광화문에서부터 남대문에서 서소문거리 무교동과 을지로입구까지 그리고 신세계백화점 도로까지 운집한 추모인파였기에 10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경찰의 보고는 20만도 안된다고 했다. 나는 광화문 청사에서 시청으로 달려와 확인하였다.

무서운 민중의 움직임이었다. 그해 1월14일 박종철 열사가 경찰의 남영동 분실에서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새빨간 거짓 발표가 고문흔적이 있다는 양심적 담당의사의 소견으로 박군에 대한 고문치사가 세상에 알려져 학생들과 시민들이 분노했다.

전국적인 항의 시위에도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을 기만하였다. 이에 학생들과 민중들이 유월항쟁의 깃발을 든 6.10 하루 전에 이한열군이 연대정문 앞에서 데모진압 경찰이 쏜 최루탄 직격탄이 가슴에 맞아 중태에 빠진 후 7월5일 숨을 거뒀다.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박종철군에 이어 이한열군까지 공권력에 의해 귀하고 귀한 목숨을 잃은 슬픔은 부모형제 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의 슬픔이었기에 시청광장에 추모의 심정으로 모였다. 무서운 100만의 인파들은 조용히 이한열군의 추모제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100만의 민중들의 불만은 엄청났었는데 10일전에 있었던 6.29선언으로 국민의 요구를 모두 들어준 항복 선언이었기에 그렇게 과열되었던 데모와 시위가 일순간 멈추었다. 만약 6.29 선언이 없었다면 그 많은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모인 100만이 조용했을까?

그날 결코 조용하지는 않았다. 이군의 장례행렬이 시청을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따라 고향 광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시청과 조선일보사 앞에 운집했던 추모인파가 갑자기 청와대로 가자는 구호에 일제히 수만 명의 군중이 광화문 네거리 바리게이트 앞까지 진출하니 약속했던 최루탄 발사를 어기고 말았다. 페퍼퍼그 발사에 상당기간 밀고 당기고 하다가 결국은 시청광장으로 돌아가 을지로와 명동을 누비며 시위를 계속하다 대학로에서 시위하였다.

한편 이군의 장례행렬은 광주 도청 민주광장에서 다시 노제를 지내고 시내를 거쳐 망월동 국립묘지에 자정을 넘긴 밤중 3시에 안장이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총리와 나는 오지 않는 잠자리에 들었다. 대학로의 시위대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가 한바탕 한풀이를 마감했다.

그 당시에 총리와 나는 5월18일 광주항쟁 7주년 명동성당 추도미사에서 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박종철 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을 폭로하여 박군의 죽음과 4.13호헌조치 여파로 경색된 정국의 안정을 위해 ‘민심수습을 위한 대폭 내각개편’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이한기 총리가 지상 발령되고 나는 총리를 보좌했었다.

정부는 총리와 5개 부처 장관과 당시 장세동 안기부장까지 경질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미 6월 항쟁의 국민의 뜻은 15년만의 직선제 헌법 개정과 민주화 조치였다. 6월10일부터 명동 농성을 기점으로 항쟁이 거세졌고 어쩌면 혁명으로 갈지도 몰랐다. 군대가 이미 출동을 했고 정국은 초긴장이었다. 그러나 6.29를 이끌어 냈다.

나는 21년 전의 유월광장에 서서 생각했다. 과연 그때에 국민에 항복한 선언이 없었다면 그날의 백만 추모인파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도 그때에 반기문 보좌관과 함께 총리에게 강한 의견을 올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나” 란 반기문 총장이 기당추모문집에 쓴 글처럼 측근 보좌관과 비서관의 건의를 수렴해주신 총리에 감사한다.

그런데 오늘의 서울광장 의미는 무엇일까? 두 달이 넘도록 촛불은 꺼지지 않고 대통령은 두 번이나 국민에게 사과하고 관계자의 20번이나 해명의 회견이 있었지만 아직도 믿음을 얻지 못하는 이명박 정부다. 더구나 민심수습을 위한 대폭개각도 아닌 소폭 개각을 단행하여 오히려 더욱 꼬이기만 하는 국민들의 감정이기에 안타까운 심정이다.

21년전 에도 국민의 뜻을 모두 수렴하니 비록 속이구라 했지만 민주화의 방향으로 길이 열린 게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쇠고기 협상만이 아닌 8천만 동포의 과제인 평화통일과 남북과제도 뒷북을 치는 실상이니 답답한 국민들이 많다. 역사인식에 다가간 대통령이 되기를 나는 염원했었다. 그런데 국내외 제 문제뿐만 아니라 남북문제가 너무도 답보상태다.

그러기에 제2의 6.29같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물론 지난 유월항쟁과는 다른 점이 있다. 개헌과 88올림픽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은 오히려 그때보다 더 난제 해 있는지도 모른다. 우선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다. 아직도 창창한 임기인데 이렇게도 빨리 지지율이 떨어지다니 결국 발상의 전환으로 돌파해야 한다.

먼저 믿음의 대통령과 정부가 되어야 한다. 광우병대책위를 포함한 국민의 여론 수렴을 위한 허심탄회한 국민과의 진솔한 대화의 장이 필요하다. 경제 살리기와 실용주의를 위해서는 국민과 정치권과 소통하고 특히 남북관계는 평화가 경제라는 의지가 필요하다. 특단의 결단으로 역사에 다가가는 대통령과 정부가 되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지난 역사는 오늘의 역사에 반면교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도자는 먼 훗날 역사가 바라볼 때 어떤 평가를 받을 까도 생각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물려줄 역사적 과제들을 소홀이 하지 말고 보다 국민에 다가가는 지도자이기를 바란다. 21년 전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박. 이의 불꽃같은 열사의 영면하기를 기원하고 평화의 세상이 오기를 소원한다.

순수한 여중생들이 촛불을 든 날도 두 달이 지나고 있다. 야당세가 약한 국회에서 광우병특위가 활동을 벌린다고 한다. 이미 대다수 국민들의 의사와 요구는 다 표출되어 있다. 10년 전에 기승을 부렸던 최루탄은 다시 재발하고 있지 않으나 그와 비슷한 공권력이 난무하다.

물대포를 비롯한 색소소화기를 사용하고 폭력을 유발하고 있다. 시민들의 평화적 시위를 보장해야 할 경찰이 온통 경찰차로 사전 봉쇄하여 촛불을 들고 정당한 항의를 표출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방황은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고 교통체증을 가져와 시민들의 원성을 듣는다.

유가가 폭등하고 정부는 유류절약정책을 펴면서 수백 대의 시위저지차량이 도심한가운데에서 대기오염을 내고 유류를 소비하는 행태는 하루빨리 없어야 한다.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촛불시위의 요구를 수용하여 소모적인 공권력의 과잉 행위를 중지하는 결단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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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통일원 통일교육위원. 작가(수필. 소설. 서예) (사)평화연대 상임고문. (사)남북 청소년연맹 자문위원. 남북경협포럼 전문위원. 한국인물전기학회 이사. 구암서문예원 원장, <에세이21>기획위원. 산영수필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무학진흥회 이사. 백두산문학회 편집위원. <실험수필> 편집위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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