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6.29선언과 전두환 20년 장기집권 플랜 비사

장전 2015. 9. 4. 13:23

 

 

"마지막 꿈과 희망은 평화통일의 길을 가는 것"
 윤영전, 6.29선언과 전두환 20년 장기집권 플랜 비사

 

 

 
▲ 16일 오후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고희 기념문집을 낸 윤영전 평화연대 상임고문과 인터뷰를 가졌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지진과 쓰나미, 방사성 누출로 일대 혼란을 겪고 있는 일본 열도를 바라보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역사와 사회의 소용돌이에서 비켜 설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하물며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 구성원 누구에겐들 그만큼의 아픈 생채기가 없을 수 있겠는가.

가문의 대들보였던 맏형은 1949년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 스물 둘 꽃다운 나이에 스러졌고, 보도연맹에 가입됐던 당숙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끌려가 처형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이 내려오자 아버지는 면 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됐고, 둘째 형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생사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겼다.

윤영전(71세) 평화연대 상임고문은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의 비극을 가족사를 통해 처절하게 체험했고, 자신의 베트남전 참전 경험과 군사독재 시절의 특별한 공직 경험 등을 거쳐 평화통일 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 지난해 12월 발간한 고희기념문집 『인연 아름다운 만남』과 수필선집 『강물은 흐른다』, 그리고 애창가곡집 CD.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지난해 12월 고희기념문집 『인연 아름다운 만남』과 수필선집 『강물은 흐른다』를 발간하고 애창가곡집 CD까지 내놓은 그는 ‘70 고희(古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방면의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서울대학교 근무할 때부터 계속 민주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골수 국가공무원도 못 됐지만 공무원 출신이 평화통일 운동에 나서자 의문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정의사제구현단과 함께 생겨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천정연)에서 상임위원과 감사를 했고, 경실련 민족화해아카데미에 들어갔다가 10년 전 경실련 통일협회가 제 역할을 못하자 이장희, 이철기, 양관수, 홍순명 선생 등과 평화통일 운동을 위해 빠져나와 평화통일시민연대를 창립한 것이다.”

그는 이후 남북경협운동본부, 남북경협포럼, 남북청소년연맹,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범국민위원회, 평화재향군인회, 평화만들기, 통일을준비하는사람들, 공동선 등 여러 단체에서 주요 직책을 맡거나 기고활동을 통해 맹활약했다.

“통일부의 통일교육위원을 6년 했는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서울시에서 제일 열심히 했다고 최우등으로 올라갔지만 ‘역사인식이 부족한 대통령’이라는 글을 써 재임용에서 탈락됐다. 그까짓 것 내가 안 하면 어떠냐. 제 소원이 남북통일도 통일이지만, 정권교체가 소원이었다.”

   
▲ 윤영전 고문은 자신의 호를 따 '구암'서문예원을 운영할 정도로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조성봉 기자]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소원’은 고 이한기 총리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얽혀있다. 이 총리가 서울대 법대 학장이던 시절부터 보좌하며 함께 일해온 그는 군부독재인 5공화국 치하에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로 재직할 때도 지근거리에서 보좌함으로써 87년 6월 항쟁과 6.29선언이 탄생하는 과정을 생생히 증언할 수 있게 됐다. 6월 항쟁이 군부의 유혈진압으로 흐르지 않고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로 우회할 수 있게 된 배경에 그의 노력도 보태져 있는 것이다. (아래 상자기사 참조)

특히 1983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아웅산 참사’는 전두환 대통령이 ‘20년 장기집권 시나리오’ 실현을 위해 버마(미얀마) 레윈 장군의 장기집권 모습을 측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현대사 복원에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아래 상자기사 참조)

윤영전 상임고문은 광주시 효덕동 효골에서 효열가문에 태어난 탓에 “조신하며 행동”해왔고, 열녀 할머니에 이어 아버지와 자신이 효자가 되었고, 지난해 2월에는 부인까지 효부상을 받았다.

그는 “사라져 가는 효열정신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 살아가는 지표요 근본”이라며 “삼대효열가문으로 살기가 힘이 들지만 그 길이 살아가는 방편이고 모토로 되고” 있다고 자신의 고희기념문집에서 밝혔다.

그는 평화통일 활동과 가정에서의 남다른 노력 외에도 서예가와 수필가, 소설가로서 부단히 정진하고 있으며, 노래 또한 수준급이다.

“앞으로 제 마지막 꿈과 희망은 이 땅의 66년 분단을 극복하는 평화통일의 길을 가는 것이다. 실제로 행동도 하고 글로도 남기면서 80살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 윤봉길 의사는 집안 형님뻘 되시고 안중근 의사는 존경하는 분인데, 그 분들의 정신으로 살아가겠다.”

조만간 발족할 ‘안중근의사 평화연구원’에서도 일익을 담당하겠다며 열의를 쏟아내는 그에게 칠순 고희는 아직 아무런 장애가 아닌 듯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