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글은 이한기박사님의 제자가 본인이 겪었던 일화를 소개한것인데,이를 통해 이한기박사님의 인간미(人間美)를 알 수 있기에 옮겨본다. (필자 注)
대학시절 은사이셨던 李漢基 교수님은 육중한 체구에 근엄한 표정으로 좀처럼 가까이 대하기가 부담스러운 분이셨다.
4학년때가 아니었나 싶은데 하루는 늦은 오후에 선생님 연구실에 들렸더니 마침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로 방금 하바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외무부 방교국장으로 계셨던 崔雲祥(최운상) 박사가 와 계셨고 그 밖에 대학원학생 한두명이 더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이야기가 옛날로 돌아가서 교수님께서 동경대학 축구선수로 명성을 떨치시던 시절의 이야기며, 연모하던 여학생과의 사랑 이야기 끝에 문학작품에 나오는 애틋한 사랑의 장면들로 화제의 꽃을 피웠다.
어둑어둑 저녁이 되었으나 아무도 자리를 뜰 생각을 안하는데 마침 전기가 나가서 방안이 껌껌해 지자 좌중에서 제일 어린 나에게 "김군, 나가서 양초 몇자루를 사오지"하고 명령을 하셔서 뛰어나가 양초를 사왔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저녁 결국 교수님의 "목포의 눈물"을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그 청아한 고음 테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 울리는 듯 하다. 선생님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목포와는 별다른 인연이 계셨는지 눈을 지긋이 감고 마치 배우 김승호를 연상시키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열창하셨던 모습이 선하다.
그뒤 결혼주례를 부탁드리려 돈암동 산마루 다 쓰러저가는 한옥으로 방문했을 때도 예비 신랑신부에게 결혼의 중요성과 부부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구구절절이 당부의 말씀을 주시던 인자하신 교수님. 한국 국제법학계의 태두요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공인으로서의 이한기 교수님이나, 개인적으로 결혼 주례를 서주신 고마우신 스승으로서의 이한기 교수님 보다는 희미한 촛불아래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부르시면서 사람냄새 물씬 풍기시던 인간 이한기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어찜일가? 몇년전 산호세를 방문한 북경주재 전 大使 權선배의 전언에 의하면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이 선생님의 추모비를 세웠는데 제막식 날에는 서울에서 전세 버스를 빌려서 당일치기로 다녀왔노라고 하면서, 묘비건립위원 명단에 내 이름을 슬쩍 집어넣어 묘비뒤에 이름이 적히기까지 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분명 비용분담이 있었을 터인데도 굳이 사양하는 바람에 하는수 없이 저녁 한턱 잘 내고 말았던 일도 있었다. 부질없이 흘러간 인생 70을 되돌아 보면서 내가 간 뒤에 나를 기억해 줄 제자 한 사람도 변변히 갖지 못한 쓸쓸함이 스치고 지나간다. 며칠전 이곳을 방문했던 카이스트 교수에게 君子의 三樂 가운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기쁨이 있다니 좋은 학교에서 교편 잡는 분들은 복이 많으신 분이라고 진정어린 부러움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인생 다시 시작한다면 학교 선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다 쓰잘데 없는 한낱 백일몽이지만.
목포의 눈물은 1935년에 발표되었는데, 일제하 한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1930년대후반~1940년대초 일본에서 공부했던 이한기박사님도
일본 동경 타향에서 아마 이노래를 즐겨듣고 불렀기에 위에서 소개된 일화처럼 그 가사를 다알고 촟불켜진 분위기에 감정을 살려 부르지 않으셨을까... 또 해방뒤 서울에서 교수직을 하며, 고향 창평산하를 생각하며 가끔 이노래를 듣고 부르셨으리라 생각해본다.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씨는 1916년생, 이한기박사는 1917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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