先親과 獨島, 先代 對日 抗爭의 記錄

[스크랩] 이한기 박사_의(義)로운 사람들

장전 2012. 2. 28. 00:02

한말 호남 의병장들의 흔적을찾아서



지난 2월 25일 매우 의미있는 역사의 현장을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대 박물관에서 중·고등학교의 역사 교사들을 대상으로 주관한 "호남의 의리와 의병"이라는 역사 기행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광주를 포함한 남도를 의로움의 고장 즉 의향(義鄕)이라고 부른다. 의로움의 고장이라는 별칭은 결코 하루아침에 붙여질 수 있는 이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남도인만의 정서요 문화이며 전통이기 때문이다.

 

임진란과 한말 의병, 광주학생독립운동, 동학혁명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이 남도에서 일어날 수 있음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찾은 곳은 노사 기정진의 대표적인 문하 인물인 이최선의 생가였다. 이최선은 1866년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서울로 향했던 실천적 성리학자였다. 이최선의 실천적인 의식과 행동은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아들인 이승학은 기우만의 문인으로 아관파천 때 의거하였고, 손자인 이광수는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후손인 이한기 박사는 창평초등학교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이최선의 가문을 통해 한말 위정척사 유림들의 사상이 항일운동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 사상적 계보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와 닿았던 것은 아들 손자로 이어진 뜨거운 가문의 피였다. 그 뜨거운 피는 그 가문의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어 나라 사랑의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남도가 의로움의 고장이 되었던 것도, 남도만이 특별히 간직할 수 있었던 남도만의 역사와 문화와 전통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말 호남 사림의 정신적 지주는 조선시대 성리학 6대가의 한사람인 노사 기정진(1798-1879)이었다. 노사학파 사상은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도학(道學)의 진흥, 국가와 민족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특히 그 문하였던 기우만, 기삼연, 고광순에 의한 의병활동으로의 계승은 한말 남도 의병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점에서 노사가 남도의 성리학이나 위정척사사상 그리고 의병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제자들과 함께 위패가 모셔진 고산서원을 찾아보고 그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김해볼 수 있어 자못 의미 있었다.


고산서원을 나와 찾아간 곳은 남도 후기 의병장 심남일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함평 월야의 신기 마을이었다.
남도의병은 1908년부터 일제에 나라를 잃을 때까지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도에는 교전 횟수에서 전국의 46%, 그리고 교전 의병수에서 60%를 차지하고 있었다. 남도 의병은 일본의 한반도 병합을 연기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실시된 것이 남도 의병을 섬멸하기 위한 "남한대토벌작전"이었다. 이 무렵 남도에는 평민들이 중심이 된 의병장들이 주로 의병을 이끌고 있었다. 심남일, 안규홍, 전해산 등은 당시 대표적인 의병장이었다.


드디어 도착한 심남일 의병장의 생가 터. 그러나 이곳에는 장군이 살았다는 이야기만 마을 사람들에게 전설로 남아 있을 뿐 장군의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장군의 후손 한 분도 살고 있지 않았다. 후손들은 일제의 표적이 되어 이리저리 내동댕이쳐지고 제대로 교육마저 받을 수 없게 되면서 흩어져버린 것이다. 발길을 돌리면서 "장군의 생가터" 라는 푯말, 생애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라도 새겨진 안내판만이라도 세워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내내 떨쳐낼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은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최후를 마친 김준(김태원), 김율 장군 생가에서도 이어졌다. 김준은 기삼연이 이끌던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활동하다 기삼연 사후 새로운 독립부대를 이끌면서 1908년까지 남도 의병의 중심이 된 분이었다.

 

생가에서는 김준 장군 손자인 무등일보 김갑제 편집국장이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살아온 어려웠던 삶에 대한 회상이 있었다. 세끼 밥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몰락해버린 가문, 학교는 생각해볼 수도 없었다던 김국장. 우리 참가자 모두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은 의병장의 후손, 아니 모든 독립 운동가 후손들의 공통적인 삶이었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음은 결코 유쾌하질 못했다. 남도는 의로운 고장, 의향이라고 불린다. 그 의로운 고장이라는 별칭에 맞게 의로운 고장을 만들어왔던 분들 그리고 그 후손들에 대한 정신적·물직적 보상과, 그들을 존경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아니 그러한 작업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사명이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이 올바로 이어질 때 역사가 바로 서고, 올바른 삶이 가치 있는 삶으로 존경받게 되지 않을까?

출처 : http://blog.daum.net/yeolki3439/7690841

출처 : 잠곡 김육(金堉)선생을 존경하며
글쓴이 : 박성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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