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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여유, 자주와 독립, 자유와 평등은 당대인은 물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 눈물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노력의 결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는 열강들의 세력 각축장이었다. 열강들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것은 모든 국민의 최대 염원이었다. 그 염원과 백성들의 노력은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전하는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전쟁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전남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최후의 파수꾼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이 땅에서 산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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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을 이끌어간 인물과 그 전적지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의병전쟁에 앞서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하여 척사소를 올린 인물은 기정진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장성 고산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은 후학들에 의해 의병전쟁이 주도되었다. 장성의 기우만과 기삼연, 담양의 이최선과 그의 아들 이승학의 2대에 걸친 의병활동, 이승학의 아들 이광수는 의병활동에 나서는 대신 을사조약 체결의 반대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담양의 고광순 의병활동을 간과할 수 없다. 고광순과 관련된 유적은 담양군 창평면 곳곳에 있다. 담양군에서의 의병활동을 한 인물로서 김태원도 있다. 보성군의 의병장 안규홍과 임창모의 의병활동도 주목된다. 안규홍은 몰락양반으로서 머슴출신이었다. 그의 의병전쟁은 보성군과 그 인근의 군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파청전투는 유명하다. 화순군 이양면 증동 쌍산의소(雙山義所)에는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마련된 의병들의 주둔 막사지, 이를 둘러싼 석축, 무기제작소, 의병활동을 최초로 모의한 민가 등이 있다.
일제식민지체제에서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1919년 3 · 1운동으로 나타났다. 3 · 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분인 양한묵은 전남출신이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화순군 화순읍에 있다. 광주의 3 · 1운동전개는 최한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장성의 3 · 1운동은 장성 북이면 모현리 주민들에 의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 주동자들을 위해 ‘삼일사’를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다.
1926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식민시대에 3 · 1운동에 이은 큰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과 관련된 인물, 유적은 전남지방과 광주에 많다. 특히 광주광역시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재학하였던 학교 일대가 ‘광주학생운동발상지’로 지정되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기념역사관, 기념관, 여학도기념비, 기념비 등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송홍선생의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일제식민지시대 일반 민중들과 함께 억압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중을 깨우치고 교육에 헌신한 신태윤의 유적을 곡성읍 학정리에서 찾을 수 있다. 신태윤은 단군전을 세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곡성지방의 3 · 1운동에 영향을 주고 주도하였다.
일제식민통치시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된 최흥종과 손양원을 통하여 당시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최흥종과 손양원은 목사로서 일제식민지체제하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손양원 목사의 낮은 이들에 대한 섬김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운동은 애양원에 방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보성군 보성읍 보성향교에 세워진 ‘문묘제주조난기(文廟祭酒遭難記)’를 통하여 유림들의 일제의 탄압에 저항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말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김구와 서재필의 생애에 대한 일부 모습은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과 문덕면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하면 생생하게 알아낼 수 있다.
일제의 식민화과정에 철저히 반발하고 일제의 식민화과정에 협력한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했던 나철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건하였다. 그의 탄생지인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 ‘민족독립지도자 홍암나철선생유적비(民族獨立指導者 弘巖羅喆先生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그를 통하여 구국운동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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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에 속한 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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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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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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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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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풍요와 여유, 자주와 독립, 자유와 평등은 당대인은 물론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 눈물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노력의 결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는 열강들의 세력 각축장이었다. 열강들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려는 것은 모든 국민의 최대 염원이었다. 그 염원과 백성들의 노력은 일제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전하는 의병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전쟁은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특히 전남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의병은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려는 최후의 파수꾼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과정에서 이 땅에서 산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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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전쟁을 이끌어간 인물과 그 전적지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의병전쟁에 앞서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하여 척사소를 올린 인물은 기정진이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장성 고산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이은 후학들에 의해 의병전쟁이 주도되었다. 장성의 기우만과 기삼연, 담양의 이최선과 그의 아들 이승학의 2대에 걸친 의병활동, 이승학의 아들 이광수는 의병활동에 나서는 대신 을사조약 체결의 반대와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또 담양의 고광순 의병활동을 간과할 수 없다. 고광순과 관련된 유적은 담양군 창평면 곳곳에 있다. 담양군에서의 의병활동을 한 인물로서 김태원도 있다. 보성군의 의병장 안규홍과 임창모의 의병활동도 주목된다. 안규홍은 몰락양반으로서 머슴출신이었다. 그의 의병전쟁은 보성군과 그 인근의 군에서 전개되었고, 특히 파청전투는 유명하다. 화순군 이양면 증동 쌍산의소(雙山義所)에는 의병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마련된 의병들의 주둔 막사지, 이를 둘러싼 석축, 무기제작소, 의병활동을 최초로 모의한 민가 등이 있다.
일제식민지체제에서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은 1919년 3 · 1운동으로 나타났다. 3 · 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분인 양한묵은 전남출신이다. 그와 관련된 유적은 화순군 화순읍에 있다. 광주의 3 · 1운동전개는 최한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장성의 3 · 1운동은 장성 북이면 모현리 주민들에 의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 주동자들을 위해 ‘삼일사’를 건립하여 추모하고 있다.
1926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식민시대에 3 · 1운동에 이은 큰 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과 관련된 인물, 유적은 전남지방과 광주에 많다. 특히 광주광역시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재학하였던 학교 일대가 ‘광주학생운동발상지’로 지정되어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기념역사관, 기념관, 여학도기념비, 기념비 등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송홍선생의 동상도 건립되어 있다.
일제식민지시대 일반 민중들과 함께 억압을 당하고 고통 속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중을 깨우치고 교육에 헌신한 신태윤의 유적을 곡성읍 학정리에서 찾을 수 있다. 신태윤은 단군전을 세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곡성지방의 3 · 1운동에 영향을 주고 주도하였다.
일제식민통치시대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가 된 최흥종과 손양원을 통하여 당시 사회의 또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최흥종과 손양원은 목사로서 일제식민지체제하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다른 측면에서 보여주었다. 손양원 목사의 낮은 이들에 대한 섬김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항일운동은 애양원에 방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보성군 보성읍 보성향교에 세워진 ‘문묘제주조난기(文廟祭酒遭難記)’를 통하여 유림들의 일제의 탄압에 저항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말 일제에 대한 저항과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던 김구와 서재필의 생애에 대한 일부 모습은 보성군 득량면 쇠실마을과 문덕면 서재필기념관을 방문하면 생생하게 알아낼 수 있다.
일제의 식민화과정에 철저히 반발하고 일제의 식민화과정에 협력한 인사들을 처단하려고 했던 나철은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건하였다. 그의 탄생지인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 ‘민족독립지도자 홍암나철선생유적비(民族獨立指導者 弘巖羅喆先生遺蹟碑)’가 세워져 있다. 그를 통하여 구국운동의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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