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동이’의 주인공 최숙빈은 담양사람
대전면 갑향리 소두촌 출신, 추증 영의정 최효원의 딸
어릴적 월산 ‘용흥사’, 수북 ‘중전’에서 기거 관련 기록
용흥사에서 기도 올려 영조 회임 연유 ‘몽성산 용구사’
‘드라마 장소 마케팅’, 문화관광 분야 적극 활용 나서야
입력날짜 : 2010. 07.2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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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월화 인기 드라마 ‘동이’에서 주인공 ‘최숙빈’ 역을 맡은 배우 한효주씨. | |
요즘 드라마 ‘동이’가 시청자들을 한참 사로잡고 있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치열한 붕당정치의 현실 속에서 속내를 숨기고 슬기롭게 처신하여 자신과 아들의 목숨을 보존한 숙빈 최 씨와 이에 맞서는 영원한 악녀 장희빈, 그리고 조선왕조의 왕권을 확실하게 확립한 최고의 절대군주로 평가되는 숙종과의 사랑과 정쟁, 애증의 관계들은 시청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사실 그런 이유로 역대 후궁 중 미모와 지략이 뛰어난 장희빈은 드라마와 영화 등으로 숱하게 제작되어 왔다.
하지만 이번처럼 영조대왕의 생모로 알려진 숙빈 최씨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는 거의 처음인 거 같다.
천민출신으로 질곡의 삶을 살다가 최하층 무수리라는 신분에서 일약 내명부 최고의 품계에 오른 여인, 숙빈 최씨는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데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이자 실존인물인 숙빈 최씨가 우리 담양 출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최숙빈이 태어난 곳은 당시에는 창평현의 갑향면에 해당되는 곳으로 현재는 대전면 갑향리 소두말(소두촌)이라는 곳이라 한다.
그녀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의 딸로 궁중에서 가장 천하다는 무수리로 입궐하여 숙종을 만나 내명부 종4품 숙원을 거쳐 마침내 정1품 빈(嬪)에 이르렀다.
최숙빈이 궁궐에 들어가게 된 시기에는 여러 논란들이 있지만 기록에는 숙종 2년(1676) 7세의 나이로 입궁했다고 한다. 그러다 숙종 18년(1692)에 숙종을 처음 만나게 되고 1694년에 영조를 낳았다.
그녀의 입궁과 관련해서 우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 재밌는 이야기는 월산면에 소재한 ‘용흥사’와 수북면 궁산리에 소재한 ‘중전’이라는 절터와 관련되어 있다.
월산면 용흥사에 대한 기록을 보면 1871년에 간행된 호남읍지의 창평현 사찰조에 용흥사는 용구산에 자리하고 궁(宮)의 전당(殿堂)이고 지역을 담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복순이라는 궁녀가 이 절에서 기도하여 영조를 낳은 뒤 절 이름을 용흥사라 하고 산 이름도 몽성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어떻든 담양의 향토문화연구회에서 간행한 향사의 맥에는 이와 관련하여 여러 기록을 전하고 있다.
「대전면 소두촌에 최씨가 살았는데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은 예쁘고 영리했으나 가난을 어쩌지 못하여 ‘박덕이(먹을 것만 해결되는 타가살이)’로 용흥사에 있게 되었다.
그때에 마침 관리가 한양에서 내려오자면 월산면 바심재를 넘기 전 용흥사에서 흔히 일박을 했다 한다.
서울에서 전라목사로 부임받아 내려오게 된 민목사도 여기에 들러 묵었는데 그의 딸이 최씨의 딸과 한방에서 자게 되었다.
비록 천한 신분이었지만 최씨가 예쁜데다가 여자로서 숙덕과 재지가 있음을 알고 이튿날 아버지 민목사께 졸라 한 식구가 되길 간청하니 쾌히 승낙하고 나주로 함께 가게 되었다.
나주에서 얼마간 지내다가 민목사가 내직을 받아 한양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는데 민목사의 근척에서 궁녀로 들어가야 할 상황이 되자 대신 들어가게 되었고 그 결과 인생의 극적인 전환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약)
한편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게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대나무축제추진위원장을 역임했던 박용훈씨는 다음과 같이 구술하고 있다.
「최씨는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어린 시절 중전이라 불리는 절터에서 살았다 한다.
그곳에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어느 날 기도 중에 선몽하길 쪽재를 넘어 용흥사라는 절에 가면 귀인을 만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용흥사는 중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기에 그녀는 곧 바로 쪽재를 넘어 용흥사로 갔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서 전라목사로 부임해 오는 민목사 일행을 만나게 되고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여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전술한 바와 같은 사유로 궁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인현왕후의 시중을 드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인연으로 인현왕후가 쫓겨나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에도 의리를 지키며 끝내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1693년 4월 23일 궁에서 쫓겨난 인현왕후의 생일날, 창경궁 퉁명전에서 불을 밝히고 인현왕후의 환궁을 축원하는 제를 올리고 마침 궁중을 돌다 그 모습을 본 숙종에 의해 자초지종을 이야기 듣고 그 충성심을 기특히 여겨 품에 안게 되는 것이다.
이후 최숙빈은 왕자를 생산하고자 용흥사로 내려 와 기도를 드린 후 숙종과 합궁하여 영조대왕이 되는 왕자 금(昑)을 낳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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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숙종 때 최숙빈이 어릴적 기거했다고 알려진 월산면 용흥사. 최숙빈이 용흥사에서 기도를 드린 후 영조를 회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
어떻든 이런 연유로 중전이라는 특이한 절 이름이 탄생된 것 아니냐는 추론을 해 보게 된다.
용흥사라는 절 이름도 당초에 ‘몽성산 용구사’ 였으나 영조의 탄생이후 임금을 용에 비유하는 전통에 따라 임금이 나오게 된 곳이다 하여 용흥사라 했다는 것이다.
사실 마을에서는 ‘중전사’라고 부르지 않고 지금도 ‘중전’이라 부르고 있어 이름 자체부터 특이함을 느끼게 한다.
중전 절터에는 마애불이 2기가 있는데 하나는 풍마에 훼손되어 그 형상을 찾을 길 없고 하나는 원형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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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북면 중전사 절터에 남아 있는 마애불. | |
그러나 영조의 탄생과 관련해 또 다른 기록은 이문정(1656~1726)이 쓴 수문록에 나와 있다. 이 책에는 최숙빈과 장희빈의 악연이 담겨져 있는데 이야기는 숙종 임금의 낮잠으로부터 시작된다.
「선대왕(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신룡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하!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놀란 숙종은 얼른 눈을 뜨고 자신의 아이를 누군가 임신했으며 그 아이가 태중에서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한다.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른 이가 장희빈이었다.
궁금증이 생긴 숙종은 중궁전으로 급히 달려갔지만 임신의 기미를 느낄 수 없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담장 밑에 독이 하나 있는데 거꾸로 엎어진 상태였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그 독을 세워보라고 지시하니 독안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얼마 전 동침을 한 최숙빈이었다.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의 몸에 태기가 있다는 첩보를 빨리 입수한 장희빈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최숙빈은 1701년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노라는 증언을 하면서 사약을 받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숙종은 처첩을 활용하여 탕평정책을 펼쳐나갔기 때문에 최숙빈에게도 많은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
한 세력이 커지면 곧 바로 견제를 했던 숙종의 지혜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어떻든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리면서 다시는 후궁이 중전이 될 수 없도록 하는 왕명을 내렸고 이로 인해 최숙빈은 그녀의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왕후의 칭호를 받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효심이 강한 영조는 그의 어머니 사후에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숙빈 최씨의 소령묘를 소령릉으로 고치려 하였지만 이 또한 신료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소령원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미천한 신분에서 조선왕조 사상 가장 살벌한 정쟁의 와중에서 위대한 군주로 꼽히는 영조대왕을 낳고 키우며 난세를 극복해 왔던 여인, 최숙빈! 그녀가 담양출신임에 자부심을 느끼면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장소마케팅이 필요한 때이다.
드라마 제작진과 적극적인 협의를 통해 동이의 주인공이 담양출신임을 강조해내고 이를 문화관광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규현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