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故鄕 長華里와 迎瑞堂의 빛

담양의 인물지-讓寧大君의 후손들

장전 2008. 8. 18. 14:24

>담양의 인물지
>이해섭|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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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국유(鞠)의 후예들
>담양의 토종이라 하면 제일 먼저 담양 국씨(鞠氏)요, 담양 전씨(田氏)다. 고려말, 탐진(耽羅)를 전별한 공으로 벼슬이-호부상서(戶部尙書)-현 내무부장관에까지 올랐던 국유(鞠肆)는 오늘의 담양 국(鞠)씨의 원조이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그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이태조는 그의 인품을 높이 칭찬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의 벼슬을 내리고 다시 초빙했으나 그는 도리어 그 유명한 무송단시(撫松莎詩)를 지어 이태조를 비웃었다. 화가 난 이태조는 그의 오막살이에 불을 질러 불태워 죽이고 아들 삼형제를 담양에 귀양 보내니 지금의 담양국씨는 바로 이들 삼형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해방 전․후 호남의 갑부로 손꼽히던 만석꾼 국채웅(鞠埰雄) 참봉은 국유의 19대손. 그는 사재를 털어 담양에 부인중견양성소(婦人中堅養成所)를 설립하고 개화문명을 계도하고 담양유치원을 창설 어린이 교육에도 크게 이바지 했다.
>세기상사의 국쾌남(鞠快男)과 국종남(鞠鍾男)은 친형제로 선친은 8천석을 한 농은(農隱) 국정완(鞠定完)씨.
>국쾌남씨는 1958년 5월 2일 실시한 제4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25,684표를 얻어 자유당 공천의 국회의원이 되였다. 그때는 민주당 공천에 김동호(金東鎬) 대한농민회 공천 남상기(南相奇), 통일당 공천에 박영종(朴永鍾)등 4명의 후보자가 치열한 싸움 끝에 차점자는 박영종씨로 8,385표 밖에 얻지 못했다.
>국종남은 제14대 전국구(1992년 3월 24일) 국회의원을 지낸바 있다. 또한 국순홍(鞠淳弘)씨는 집안에 박사가 많기로 소문난 학자가족. 동아일보사 기자, 전무, 사장을 지낸 국태일(鞠泰一)씨. 그는 1950년 5월 30일 실시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동아일보사 주필의 고재욱(高在旭)씨와 대결했다. 당시의 후보자를 잠시 생각해 보면 무소속 입후보자 김홍용(金洪鏞), 국태일, 박영종, 국민회 공천에 금성면 출신 김형렬(金炯烈), 대한촉성회공천 남상기, 국민당공천 고재욱, 정균식(鄭均植), 국민회공천 김동호씨 등 무려 8명이 난립, 치열한 입심공격과 함께 각축전이 전개되었다.
>당선자는 무속의 김홍용씨가 8,982표로 1위를 달렸다. 그런데 차점자 김형렬씨는 8,875표를 얻어 당선자 김홍용씨와의 차이는 107표로 창평과 금성의 싸움은 치열해 오랫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같은 동아일보사에서 출마한 국태일씨는 5,532표. 고재욱씨는 4,507표로 싸움은 끝났다.
>다시 본론에 들어가 국태일씨의 조카뻘 되는 순홍씨는 아들․딸․며느리․사위까지 박사가 아홉 사람, 큰딸 복진(福振)씨는 독일에서 의학박사로 사위 역시 독일에서 산림학박사, 또한 대한약리학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아들 영종씨도 독일에서 수여한 박사요, 며느리 김기복(金基福)씨는 소아과를 전공한 의학박사다. 또한 성남에서 개업 중인 딸 국경(鞠梗)씨는 내과를 전공한 의학박사이며, 전북대 사대학장을 지낸 황석관(黃錫觀) 박사, 전북대 의대 조규박(曺圭朴) 박사, 정인호(鄭寅昊), 이안섭(李安燮) 박사 등은 모두 국순홍씨의 사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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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종 종정 묵담(黙潭)스님
>불교 태고종 종정 묵담스님 역시 담양국씨. 전 서울대 상대 국정효(鞠正孝) 교수와 서울대 약대 국채호(鞠埰豪) 박사, 고려대 국순웅(鞠淳雄) 교수를 비롯한 국순중(鞠承駿) 노인회장, 국순호(鞠淳琥) 농협장, 국세호(鞠世鎬) 학국영화제작협회 전무 등 많은 후예들이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근래에는 국승학(鞠承學)씨의 큰아들 창건(准根), 그는 1991년 6월 20일 실시한 제4대 전남도의회 의원으로 출마 경쟁자 2명을 물리치고 5,967표를 얻어 당선되어 4년 동안 전남도의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이어서 1996년 4월 11일 시행한 제15대 국회의원(담양․장성)에 출마 48,823표를 얻어 압도적으로 당선돼 임기동안에 지역사업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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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 성산별곡의 산실과 와송당(臥松堂)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16살 되던 해 유배에서 풀려난 아버지를 따라 조부의 산소가 있는 담양에 옮겨와 살게 됐다. 그는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눈에 들어 끝내는 그의 외손녀딸과 결혼했고 석천이 쓰던 식영정(息影亭)까지 돌려받았는데 뒷날 유명한 가사 성산별곡의 산실이 바로 이곳이다. 사미인곡과 속사미인곡은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松江亭)에서 지었다고 한다.
>도의원을 지낸 정선택(鄭宣澤), 정일택(鄭馹澤)씨들이 바로 송강의 13대손 정구선(鄭求宣), 정태민(鄭泰敏)을 비롯한 지곡(芝谷) 마을에는 지금도 20여 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창평면 해곡리 230번지 유종헌(柳宗憲)의 집은 문화재자료 제192호다. 바로 송강이 17살 때 장가온 처갓집이다. 약 529년에 창건된 가옥으로 당초에는 와송당(臥松堂)이라 불리었으며, 송강은 문화유씨(文化柳氏) 석헌(石軒) 선생의 손녀와 결혼 신방으로 사용한 곳이다. 여기서 와송당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적어본다.
>와송당은 문화유씨의 종가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 원년(1470년)에 증 이판행훈도(贈 吏判行訓導)인 휘문표공(諱文豹公)이 창평에 들어오면서 이곳에서 살아오고 중종조 명신인 정간공(靖簡公) 석헌 선생의 태지(胎地)이다.
>이 집 앞에 근 5백년의 수령을 가진 거대한 와송이 있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집을 와송당이라 일러왔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이 와송당에서 읊은 시에 「聲暄松外溪綠色己萬地」. 이는 󰡒와송 밖의 시내소리 야단스러워 푸른빛이 땅에 가득 차있다.󰡓라고 했다. 그 당시에도 와송이 이미 무록(茂錄)했음을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와송당의 당초 구조는 터진 「입구자」형으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정침은 대청으로 되어 8간이고, 양측은 회각에 생활하는 주방이 있었다. 송강 정철은 와송당에서 결혼하므로 그 당시의 송강 신방이라고 일러 왔었다. 와송당 정침(正寢)은 굉걸(宏傑)한 건물로 경향에서 명성이 떨치었다. 1981년에 수령관계로 자고(自枯)된 와송을 원형 그대로 보존을 못하였다.
>기미년 1919년에 와송당 정침의 구조를 변혁함에 따라 양측의 횡각인 주방은 떼어내고 정침 5간에다 2간의 대청을 만들고 동서로 양방 2간이요, 서쪽으로 정주 1간으로 구조가 변경되었다.
>인조 25년(1647년)에 대중수를 보았다는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선생의 중수 상량문(重修 上樑文)이 있다. 철종 10년 己未(1859년)에 청간공 석헌 선생의 찬란 연시(延諡)가 와송당에서 있었다. 문헌으로는 주인인 아재공(啞齊公)의 와송당 원운(原韻)이 있고 송사 기우만(奇宇萬) 선생에게 화송당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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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사의 범종
>월산면 용흥리 574번지에 지방유형문화재 90호로 지정된 범종이 대웅전에 보존돼 있다. 높이 78cm, 지름 66cm로 인조 22년(1644년)에 제작된 것이다. 몸체 중앙부에는 凹형의 4각 선곽을 조식하고 그 안에 「순치원년 사월일 창평현 용구산 용흥사 신주종기(順治元年 四月日 昌平縣 龍龜山 龍興寺 新鑄鍾記)」라는 명문(銘文)이 표기되어 있다. 행서종행으로 총38행 25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글에 의하면 종신중앙 위쪽으로는 네 군데 유곽에 9개의 유두와 인동 당초문으로 그 외곽을 장식하고 있다. 전후좌우로 두광(頭光)을 선각한 보살상을 정교하게 새겨 몸체의 장식성을 나타냈다. 가로 두 줄에 범자(梵字)를 양각하고 「육자 대명왕 진언(六字 大明王 眞言)」이라 명문 하였다. 4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 고리에 걸도록 되여 있고 음관은 생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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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상(鄭之祥)의 묘
>정지상 묘의 봉분은 장방형으로 사각형의 석주를 이용하여 3단으로 쌓은 후 봉분을 축조하였으며 묘의 양 쪽에는 8m간격으로 석인상(石人像)이 서 있다. 묘 앞에 있는 상석에는 「하동정씨 순재묘상(河東鄭氏 順齋墓床)」이라고 되어 있는데 역사의 기록으로 보아 정지상으로 나오고 상석에는 정순재로 되어 있어 동일 인물인지는 아직까지도 의문이다.
>역사상의 기록이나 종중에 의하면 정지상은 고려후기 때 문신으로 공민왕 3년인 1354년에 감찰지평(監察持平)에 1355년에는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1356년에는 순군제공(巡軍提控)을 지내다가 1358년 찰방(察訪)에 임명되어 왜적을 물리치는 등 그 후 호부시랑 어사중승(戶部侍郞御使中丞)을 지내고, 관직은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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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密陽朴氏) 오부자(五父子) 순절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는 밀양박씨 5부자의 갸륵한 충성심이 깃든 오충정려(五忠旌閭)가 있다. 전남도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정려는 임진왜란 때 중봉 조헌(重峰 趙憲)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여 싸우다가 순절한 박천붕(朴天鵬)과 그 뒤 병자호란개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싸우다가 순사한 네 아들 즉 큰아들 원겸, 둘째 인겸, 셋째 예겸, 넷째 의겸의 충절을 인정하여 영조 24년(1784년)에 명정되어 건립된 것이다.
>조정에서는 이들 5부자의 충절을 기려 비와 비각을 세우게 하고 사헌대부(士憲大夫)의 명정(命旌)을 내렸으니 충효를 중히 여기는 담양의 또 다른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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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의병장 고경명
>같은 충청남도 금산성(錦山城) 싸움에 두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참전하여 순절한 재봉 고경명(齋峯 高敬命)은 지금의 창평고씨이다.
>이때 재봉은 아들 종후(從厚) 외 인후(因厚) 형제와 함께 전쟁터에 나가 인후는 금산성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고 종후는 다음해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최후를 마쳤다.
>재봉은 원래 장흥(長興)에 본관을 두고 있었으나 인후의 후손들은 오히려 창평고씨로 더 알려져 있다.
>구한말에 창평에는 영어를 가르친 창흥영숙(昌興英塾), 장흥학숙, 창흥의숙 등 신학문의 교육기관을 설립한 고정주(高鼎柱) 선생을 비롯, 일찍부터 고씨 문중은 신학문에 눈을 떠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심강 고재욱(心崗 高在旭) 동아일보사장과 재야법조계의 원로 고재호(高在鎬) 변호사, 전남대학교 상과대학장 고재기(高在騏), 광주대창운수회 사장 고광표(高光表), 동아일보사 기획조정실장 고재언(高在彦), 서울지방법원 판사 고중석(高重錫)씨 등이 이 문중 출신이다.
>고재호 변호사는 재봉(齋峯) 선생의 14대손이다. 창평학교, 광주중, 경성제국대학을 나와 일본고문사법과(日本高文司法科)에 합격, 그 후 대구지방법원 고등법원장, 대법관, 서울변호사회 회장,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신문윤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두루 거친 원로 법조인. 광주지방법원 수석부장 판사를 거쳐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 고재량(高在亮)씨와 고재청(高在淸) 전 의원은 바로 고변호사의 친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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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체성이 철저한 창평인
>󰡒일제 때 창평 지방의 교육열은 전국에서도 제일가는 대단한 열기였다. 민족주체의식도 강해 보통학교에 다닐 때 벌써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동맹휴학을 할 정도였으니까󰡓 당시 고변호사의 회고다. 전남대학교 농대학장 고재천(高在千), 한양대학교 교수 고문석(高文錫), 전남대학교 법대교수 고재일(高在馹),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수 고윤석(高允錫), 한일이공화학회장 고희석(高熙錫), 국회보사분과 전문위원 고재봉(高在琫), 변호사 고재혁(高在赫)씨 등도 모두 창평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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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 홍용, 문용, 성용씨의 검안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였지만 3형제가 국회의원을 지낸 金海金氏 홍용(洪鏞), 문용(汶鏞), 성용(星鏞)씨의 집안은 하나 같이 수재로 소문난 집안이었다. 이 3형제는 모두가 일본인들도 들어가기 힘들었다는 동경제국대학교 출신이며 문용씨는 당시 한국인으로는 2~3명을 헤아릴 정도였다는 일본제일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이 집안의 수재는 문용씨의 바로 위 누님인 김삼순(金三純) 박사다. 김박사는 한국 최초의 여성농학박사이자 자연과학계의 유일한 여자 학술원 회원이였다. 어린시절은 열 살이 되서야 창평보통학교에 입학한 김박사는 경기여고를 졸업과 동시에 일본동경여자사범대학교를 거쳐, 그 때만해도 여자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본북해도 제국대학교를 33살에 나온 만학파였다.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실력으로 씻어보겠다는 일념에서 공부했지요.󰡓 필자가 찾아간 당시의 김박사의 말이다.
>서울여자대학교 명예교수로 직함을 가지고 있던 김박사는 「원래 전공은 화학이었지만 화학은 박사학위 받는데 기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식물생리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말한다.
>중앙대학교 영극영화과의 김정옥(金正鈺) 교수도 바로 김삼순 박사의 가까운 집안 동생이며 국방과학연구소 기획실장 김승철(金承哲)씨, 그는 공군준장에 예편한 우리나라 空軍의 중견 인물로 김박사의 친조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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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讓寧大君의 후손들


>역시 창평에 뿌리를 내린 양녕대군의 후손인 전주이씨도 이 지방의 명문이다. 서울대학교 법대 이한기(李漢基) 학장의 집안이다. 전남대학교 교수를 지낸 이병두(李丙斗)씨와는 가까운 집안.


>이학장의 조부인 광수씨(成均館 박사)는 한일합방 당시 오적(五賊) 토벌사건에 참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후에 진도로 유배됐던 애국지사였다.
>부친은 동아일보 창간초기 기자 생활도 했고 후에 광주서중, 동중교장과 전남대학교 문리대학장 지낸 이혁(李赫)씨, 또한 외국어대학교 이상준(李相俊) 박사도 창평 출신으로 이학장과는 가까운 집안.


>일본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가고 미국 콜롬비아대학 유학한 이한기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박사, 서울대 법대교수, 사법대학원장, 감사원장, 국무총리서리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쳐 온 근면과 성실 그리고 정직을 겸비한 학자파.


>창평장전(昌平長田)으로 알려진 이곳은 옛날 󰡐긴 밭󰡑으로 불러왔으나 지금은 장전으로 통칭되었다. 이재의 텃밭으로 알려진 장전이씨(長田李氏). 이병우(李丙雨)씨 오랫동안 종중회장직을 맡아오다가 지금은 이종무(李鍾武)씨에게 넘겨졌다. 병우씨는 조선대학법대를 나와 고창, 담양, 목포우체국장을 거쳐 광주체신청 회계, 우정과장을 비롯 순천, 광주우체국장을 역임한 우정계의 산증인이다.


>전남경찰국을 두루 거친 이광종(李光鍾)씨 광산, 담양, 광주서부경찰서장을 역임. 전남도의 행정업무를 두루 거친 이종무씨는 전남대학을 나와 1961년에 전남도 공무원 교육원에서 시작, 상곡국을 거쳐 강진, 담양, 광양 등지의 내무, 재무과장, 부군수에 이어 신안, 보성, 화순군수, 전남도 내무국장, 여천시장 등 두뇌가 잘 돌아 가는 행정통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이 곳 이씨 집안에서 유일하게 의학을 전공한 이진기(李晋基)씨 광주고보를 거쳐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제대의학부를 이수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전남의대교수 및 학장, 대학원장, 대한해부학회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등을 거쳐 의학계의 거성으로 알려진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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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박씨(咸陽朴氏) 한때는 2백여 가구
>창평면 유곡리 월봉산 및 절산마을을 중심으로 2백여 가구가 함양박씨다. 조선조 중종때 왕자의 스승을 지낸 보덕공(補德公) 박이관(朴以寬)과 동생 월영당(月影堂) 박이홍(朴以洪)의 후손들이다.
>조광조(趙光祖)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 형제는 기묘사화(己卯士禍)의 화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와 터전을 잡았다. 이 집안 역시 어지러운 벼슬길 보다는 향리에서 후진 교육에 더 열중한 것이 특징이다.
>상유곡려(上維谷閭)에는 인조(1624년)에 참봉 박장경(朴長卿), 박인경(朴仁卿) 형제의 효를 기리고, 계미년(1643년)에 참봉 박광업(朴光業), 학생 박계업(朴繼業)의 효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월영당에는 박이홍의 절조를 읊은 시가 있어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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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길로 옮기어 몸을 마치려하니
>피어오르는 구름이 장비를 만드네.
>세상을 용납 못할 근심은 무엇인가
>옳고 그름 깨닫는 사람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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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건국 후에는 제3대 국회의원을 지낸 박영종 의원, 제6대 박승규(朴升圭) 의원 등 두 분의 국회의원을 내 놓았다. 박영종 의원은 언론계 출신으로 의정사상 최다최장 발언 의원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박승규 의원은 5․16 주체로 한때 한국조패공사 사장도 역임하였다.
>전남대학교 농대학장 박영준(朴永俊), 함평군수, 화순, 담양군수를 지낸 박준식(朴俊植), 일진금속 박영조(朴永助) 사장, 체신부 유선전신전화국장 박하구(朴夏久). 창평대의원 박봉식(朴鳳植)씨 등이 같은 집안이다. 또한 박균식(朴均植)씨는 광주교육대학 교수에 재직하면서 「곡선의 분석」 외 50여편에 달한 저서 및 논문을 남겼다. 창평면 의항리 출신 박종만(朴鍾萬)씨는 강진, 장흥, 해남, 광산 등지의 경찰서장과 광주, 순천철도경찰서장 및 제주, 군산 해양경찰서장을 역임한 경찰상을 갖고 있었다. 일본동경 성중학교를 졸업한 박영만(朴永晩)씨는 금융계통에서, 건축사 시험에 합격 후 대한건축사협회 이사, 호남비료주식회사 취재역,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서울대학교 상대출신 박영조씨는 조폐공사 비서실장, 박용훈(朴用勳)씨는 광주서중, 광주고등학교, 전남대학 법대를 나와 남일피혁, 신양파크호텔회장과 광주전남경영자협회장 등 중소기업체의 활성화에 큰 업적을 남긴 열성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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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착 명문 담양전씨(潭陽田氏)
>담양읍을 본거로 한 담양전씨. 이 지방의 토착 명문. 고려 의종 때 좌복사(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 벼슬을 하고 담양군에 봉해진 전득시(田得時)의 후손들이다. 삼은전(三隱田) 선생으로 전해오고 있는 야은(野隱) 전록생(田綠生), 래은(來隱) 전귀생(田貴生),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은 이 집안의 선조로 모두가 성품이 곧고 결백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집안은 조선조 말까지만 해도 많은 인물들이 벼슬길에 올라 번창했으나 최근에는 조용히 향리를 지키고 있으며 2006년 5월 14일 담양읍 향교리 산 일번지에 제실 등 1백평에 달한 담양재(潭陽齊)를 신축, 조상에 대한 숭배정신을 함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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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낙죽장
>가는 곳마다 무성한 대나무 숲이 담양을 살찌우고 있다. 담양읍 향교리 이동연(李同連)씨와 김동연(金東連)씨 국양수(鞠良洙)씨 이들은 낙죽장으로 인간문화재의 대를 이어온 분이였으나 국씨를 끝으로 낙죽장의 막을 내렸다. 김동연(당시 88세)는 열일곱살때부터 채상(彩箱)을 시작했다는 인간문화재 제53호 당시 김옹은 80대 노인답지 않게 곱게 다듬어진 대나무살로 함지를 재빠른 솜씨로 엮어간다. 옛날에는 궁중이나 대가집 규수들의 필수품이었던 바느질함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갖가지 작은 용구들을 거의 다 만들어 내고 있으며 채상의 색깔이 쉽게 퇴색되는 단점이 있어 특히 외국인의 주문이 크게 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나무 제품의 합죽선, 쟁반에 무늬를 그리는 낙죽, 인간문화재 31호 이옹과 국옹의 손재주도 비범하였으나 지금은 영영 추억 속으로 묻혀 버리고 말았다.